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79화 (79/132)

#079화. 반란 (11)

쾅. 쾅. 쾅.

쾅──!!

“으헉….”

별안간 덮쳐든 흔들림에 리브론 궁중백이 바닥을 굴렀다. 어디서 지진이라도 난 건가? 설마 알-라스델의 미친놈들이 땅을 파다가 뭘 잘 못 건드린 게…….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가운데. 잠옷 바람에 두툼한 로브만을 겨우 걸치고 방을 나섰다.

‘이, 이게 무슨……!’

시체, 시체, 시체.

안 그래도 좁은 수녀원의 복도가 온통 시체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끄아악! 서걱. 쾅─!

게다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람의 비명, 살거죽이 잘려나가는 절삭음, 거대한 마물들이 전투라도 벌이는 게 아닌가 싶은 굉음이 그야말로 동시에 궁중백의 귓가를 파고든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말이 귀족이지, 전쟁은커녕 멀리서 기사가 벌이는 학살을 지켜볼 줄만 알던 그로서는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습격? 설마 자작이 수녀원을 덮친 건가?’

절대 그럴 리가 없노라 확신했건만, 지금 상황에 가장 유력한 흉수는 알-란자스의 시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도시 전체가 습격을 받았던지….

리브론 궁중백은 제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약소한 귀족으로 어린 나이에 도시를 물려받은 그가,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단 하나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침착해. 머리를 써라.’

우선 복도에서 죽은 시체를 살핀 리브론 궁중백이 헛구역질을 삼켰다.

마치 무식한 힘을 지닌 괴물이 발톱으로 찢어발긴 듯한 흔적이, 대부분의 시체에서 발견된 까닭.

언뜻 보기에는 마물에게 당한 흔적처럼 보이지만, 정말 상대가 마물이라면 시체를 잡아먹었을 공산이 컸다. 하지만 흉수는 치명상을 입히고는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만 몰두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건….

‘흉수는 한 명이라고?!’

아니, 그건 확실하지 않다.

바깥에서 싸우고 있는 존재와 복도에서 살육을 버린 존재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이들이 한 명에게 학살당한 것만은 확실했다. 대공과 함께 북부에 난립하는 군벌과 도적 떼, 왕가의 눈총을 산 귀족가를 쓸어버리는 데에 앞장선 정예들을 단 한 명이-.

“꺼흐읍.”

“자, 자네! 살아있었나?”

“끄으으…. 끄윽!”

궁중백이 필사적으로 말을 걸어봤지만, 숨만 겨우 붙은 채로 살아남은 병사에겐 대화할 여력 따위가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필사의 정신력으로 그는 제 임무를 끝마쳤다.

처억….

“후문…. 마차를… 준비…….”

그것으로 병사의 숨이 끊어졌다. 리브론 궁중백은 병사의 눈을 감겨줄 새조차 없이 허약한 몸을 움직였다.

싸움이 벌어지는 곳의 반대쪽에서 도주할 준비를 끝마쳤다, 거기까지 들은 순간 리브론 궁중백은 대강의 상황을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모조리 파악한 지 오래.

‘나다. 내가 목표였어.’

우연의 일치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애초에 흉수는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난장판은 그걸 막으려다 벌어진 일이고, 궁중백을 확보하지 못하게 기사들이 움직인 결과가 바깥에서 벌어지는 싸움이겠지.

탁탁탁탁!

오늘만큼 단련을 게을리한 것이 통탄한 적이 없었다. 머리만 잘 굴리면 된다며 살아온 것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망할. 망할 대공!’

이게 다, 대공이 자신을 궁중백이라는 자리에 앉힌 탓이다. 아니…. 쓸데없이 반란을 일으킨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은 작은 도시의 주인으로 그럭저럭 만족스런 삶을 살아왔을 텐데……!

콰당! 쿵!

시체에 걸려 넘어진다.

피에 미끄러져 비틀거리고, 숨이 차서 발이 멈칫거렸지만, 리브론 궁중백은 육체를 채찍질해 수도원의 후문에 도착했다.

“구, 궁중백!”

“당장 타십시오! 어서…!”

“고맙네……!”

과연 후문의 바깥에 대공의 병사들이 모든 채비를 마치고선 궁중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곤 마차에 올라타려던 궁중백이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멈칫했다.

“자네들, 잠깐 투구를 들어서…….”

상황이 급하지만, 정체불명의 흉수에게 습격당하는 마당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그때였다.

쾅─! 쾅─! 쾅──!!

“궁중백!”

“그자가 옵니다…!”

충돌의 여파가 떨림으로 전해질 정도라니. 흉수와 기사들 간의 전투가 그만큼 격렬하단 건 진작 알았으나, 직전의 충돌은 조금 달랐다.

“막아라! 오러로 방패를 세워!”

“정면으로 부딪치지 마! 통째로 으스러진…!”

“끄아아악─!”

기사들의 고함과 비명이 지척이라 착각할 만큼 크게 들린다.

흉수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궁중백은 병사들의 얼굴이나 확인할 새가 아니란 걸 깨닫고,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머리만 조금 내밀어 바깥을 확인한 궁중백의 눈동자가, 불신과 경악으로 마구 흔들렸다.

“어, 어째서 저자가…?!”

기사들은 습격을 받기 전에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듯, 갑옷으로 무장한 채 오러의 빛을 사방으로 마구 퍼뜨리며 싸웠다.

그에 반해 흉수는 판금 갑옷은커녕, 나풀거리는 의복 하나만을 걸친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순백의 불꽃을 갑옷처럼 전신에 두르기는 했다. 그것이 성기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신성갑주’라는 걸, 궁중백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또한 그녀의 정체까지도.

“베, 베르타 수녀원장! 당신이 어째서?!”

하얗게 센 머리와 시력을 반쯤 상실한 듯 눈동자가 탁했다. 그에 대비되는 주름살이 적은 얼굴은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왜 이제야 알아챘는지 의아할 만큼 찬란한 빛과 함께 궁중백이 탄 마차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기사들이 내친 오러가 그녀의 신성갑주를 끊임없이 두들겼음에도, 그녀의 돌진을 조금도 늦추지 못했다. 그에 리브론 궁중백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카펜타의 분쇄자!’

정의의 신의 뜻을 받들어 수많은 이단을 분쇄했다는 베르타의 명성은 교회의 영향력이 미미한 땅의 귀족인 리브론조차 주시했을 정도로 흉흉한 것이었다.

흑마법사로 인해 망자들의 도시가 된 곳을, 한 번의 돌진으로 모조리 분쇄했다던가.

그렇게 붙여진 ‘카펜타의 분쇄자’란 별칭은 모든 이단들에겐 공포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날…!’

어째서 대공을 적대하는가.

정의의 신을 위해서 일평생을 바쳤다던 은퇴한 성기사가, 다시금 검을 쥐고 대공의 기사와 병사를 학살하는 이유는 대체-.

“출발하겠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상념의 답을 얻기도 전에 마차가 다급히 출발했다. 그걸 저지하려는 듯 베르타의 돌진이, 더욱 가열찬 위력으로 기사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콰과광! 쾅! 퍼억!

하지만.

그저 맨몸으로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돌격이다.

초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오러도, 수백 근의 무게가 실린 기사의 육탄 돌격도, 방패를 겹겹이 쌓은 병사들의 방패진도, 분노한 성기사의 돌진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베르타와 부딪칠 때마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몸이 멀리 날아가 처박힌다.

‘성기사단의 부단장이라더니……!’

그 이름의 무게는 리브론이 상상을 한참 뛰어넘는 것이었던가.

미들랜드 전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단의 성기사들 중, 두 번째로 높은 성기사란 이토록 강하단 말인가.

만약, 야만인을 추격하는 과정에 실종된 로열가드들이라면 그녀를 막을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의문을 품었다.

‘역시, 대공에게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저토록 파멸적인 신위를 내보이는 성기사가, 노망이 나서 대공을 적대할 가능성은 전무.

그건 즉, 대공이 만신전의 눈 밖에 날 행동을 저지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대공과 관련한 소문이 전부 사실일지도…!

쾅──!

“으아악!”

그때 기어코 수십의 인간 방파제들을 돌파한 베르타가 크게 도약했다. 다행히 마차도 속도가 붙어 곧장 따라잡히진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듯했다.

“멈. 춰!”

그리고 상황이 다시 한번 반전했다.

기사들의 오러가 검붉은 빛을 띠는가 싶더니, 베르타의 신형을 완전히 집어삼켜 버린 것.

검붉은 오러를 피워낸 기사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르타가 있는 자리를 향해 검붉은 덩어리를 마구잡이로 투사했다. 콰과과과광!

고즈넉함으로 가득하던 수녀원의 모습이 순식간에 폐허나 다름없이 변한다.

그러나 기사들은 감정이란 게 없는 것처럼, 오로지 베르타를 확실히 죽이겠다는 일념하에 검붉은 오러를 쏟아냈다.

그 섬뜩한 광경에 리브론 궁중백은 공포와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오러가 아닌 무언가를 다루는 대공의 기사에 대한 공포, 일단은 지금 이 순간 살아남았음에 대한 안도를…….

“이런 고약한 힘을 다루다니.”

“……!”

“변명의 여지가 없음이다.”

검붉은 기류가 순식간에 소멸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베르타의 상태는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쥔 검에서 뿜어지는 빛이 이전보다 더욱 밝았다. 알-란자스의 밤이 일순간 걷힐 정도로.

“정의께서 너희 타락자에게 내릴 징벌은.”

베르타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현역에서 물러난 성기사들은 육체에 담았던 신의 힘을 모두 상실하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 살아가게 된다.

베르타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신의 힘을 품었던 육체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정정하나, 신성력이 없이는 그저 비정상적으로 튼튼한 노인에 불과했다.

정의의 신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 거두어갔던 신성력의 일부를 베르타에게 되돌려주었다.

당연하지만 전성기와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세월의 흐름을 완전히 비껴가지 못한 육체는 본래의 기량을 절반도 채 낼 수 없었고, 부단장이던 시절에 착용했던 장비들은 검을 제외하곤 모두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서 없다.

그렇지만.

쩌저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의 누구도 베르타의 목숨을 위협할 수는 없음이라. 대륙 최대의 종교이자, 신들이 선택한 그릇들로 구성된 성기사단의 이인자란 그런 의미였다.

“즉참(卽斬).”

빛이 검붉은 어둠을 양단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까지 베르타가 휘두른 빛을 어찌하지 못하고 휘말렸다. 마치 검 한 자루로 공간을 둘로 나눠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빛은 더 나아가, 리브론이 탄 마차의 바로 뒤까지 바싹 따라붙었다.

“허억!”

다급히 바닥에 엎어진 궁중백이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천운인지, 베르타의 계산이 틀렸던 건지, 그녀의 빛은 마차에 닿지 않은 듯했다.

후둑. 후두둑!

그러나 빛에 직격당한 이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잠시나마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운 빛의 검격은, 휘말린 이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완전히 둘로 나눠버렸다.

그 흔적이 마치 거대한 짐승이 억지로 쥐어뜯은 것만 같았다.

“우웨엑……!”

리브론 궁중백은 토악질을 하는 와중에도, 멀어지는 마차를 가만히 지켜보는 베르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도 평생…. 지금의 광경을 잊지 못하리라. 그는 조용히 확신했다.

*

*

*

“……화려하게도 저지르셨군. 이만한 힘을 가지고도 그리 조용히 사셨으니, 좀이라도 쑤셨던 겁니까? 경.”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신께서 명하신 일이니 행한 것뿐입니다. 페란 자작.”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자들, 멀리서 지켜보니 괴상한 걸 쓰더군요. 오러가 그렇게 변할 수도 있는 겁니까?”

“애초에 오러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혀 다른 무언가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베르타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명백히 아는 게 더 있는 듯한 반응이나, 페란 자작은 눈치 좋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흠.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군요. 이토록 소란스럽게 전투를 벌인 데다가, 대공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다급히 도시를 벗어났으니. 소문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퍼지겠지요.”

“성기사단의 전직 부단장이, 대공국의 궁중백을 야습했다는 소문이 말이지요.”

“그럼, 저는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 손을.”

베르타는 본인의 검을 자작에게 넘기고, 얌전히 그가 내민 사슬을 받아들였다. 마치, 죄인이 되어 붙잡히는 것처럼.

“대공국의 궁중백을 암살하려 한 죄로, 당신을 구금하겠습니다. 성의 깊은 곳에서, 편안히 모시지요.”

어색한 연기와 함께 베르타의 손목을 느슨하게 묶은 자작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다음 들려올 소식이 기대되는군요. 그자들이 대체 궁중백을 납치해다가 어떤 식으로 쓸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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