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반란 (12)
“궁중백을 태운 마차가 알-란자스를 벗어나, 알-라스델을 그대로 통과한 걸 수많은 이가 보았다고 합니다. 흉수는 현재 알-란자스의 시장인 페란 자작이 구금 중이라 밝혔사온데, 그는 궁중백이 실종되기 전에 전향 의사를 밝혔으니 대공의 뜻에 따르겠노라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만.”
낮게 가라앉은 대공의 음성은, 범의 그것을 연상케 할 만큼의 위압감을 풍겼다.
“…궁중백이 사라졌다. 그 말을 전하려고 이렇게 온 것인가?”
리브론이 궁중백이 되기 이전, 대공이 후작이었던 시절부터 가신으로 있었던 참모가 공포에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 정도로 격렬한 분노.
“그에 대한 대책은? 당연히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뻔뻔하게 보고를 올리러 온 것이겠지?”
“……그에 대한 논의를 드리고자 이렇게 온 것입니다.”
“논의. 논의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달으면 되레 침착해지는 걸까. 대공은 그의 옥좌에 몸을 뉘이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설마, 궁중백을 급습한 자의 정체가 알-란자스 수녀원에 있는 전직 성기사단 부단장이고. 그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내게 물어보러 온 것이라면. 당장 참모진을 갈아치울 것을 고려해봐야겠군. 아니 그런가? 참모장…….”
“아니, 절대 아닙니다…! 당연히 그에 대한 해결책을 대공과 논의할 작정으로!”
“그럼 말해보게. 내가 어쩌면 좋겠나?”
꿀꺽.
참모. 아니, 후작가의 참모장이었던 이가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사실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 까닭이다.
‘대공께서 우리에게 공유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진행하고 계신 건 분명한 바. 그 상황에서 최선의 수를 내야 한다니…. 변수가 너무 많아.’
그렇다. 정보가 지나치게 부족했다. 다름 아닌 대공의 비밀로 인해 벌어진 정보 부족 현상이, 현재의 참모부를 무능력자 집단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
‘악마의 하수인’을 추격하던 로열가드의 실종. 그것만으로도 대공가는 국가의 뿌리가 뒤틀릴 정도의 심대한 타격을 입은 셈이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기사들이 빈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채워버렸다. 대공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조차 없었고.
‘그 기사들까지도 알-란자스에서 전 성기사단 부단장에게 궤멸당했다. 그런데도 대공께선 별다른 반응이 없어. 큰 전력 손실이 아니라고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별개의 루트로 전력을 공급…. 혹은 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참모장은 본인이 떠올린 생각에 돋은 닭살을 소매로 감췄다.
“그……. 우선은 알-란자스를 완전히 손에 두고, 군벌을 해체하여 곧장 병합하는 방식이 상책일 듯합니다.”
즉석에서 떠올린 생각이지만,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없음을 참모장은 확신했다.
대공이 최우선으로 삼은 것이 바로, 공도로 병력을 집결하는 일이었으니.
‘알-란자스는 거점으로서의 가치는 전무하다. 베르타의 존재로 인해 오히려 독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대공의 목적을 위해선 독이 든 성배라도 삼킬 수밖에.’
“다음으로는 소문을 잠재우는 겁니다. 내부의 결속을 흔들리게 두는 요소를 전부 해소한 뒤에, 유화책을 풀어 민심과 귀족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시지요.”
“대공국의 주인인 내가, 그들에게 무릎을 꿇으라?”
“…그게 아닙니다. 먹이를 던져주고, 길들인 뒤에 채찍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지요. 대공께서 한미한 귀족이었던 궁중백을 중용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성에 들여서 직책을 주십시오. 실권은 약하지만, 명예는 있는 그런 자리로.”
“눈길을 먼저 돌려라?”
“예. 제 예상이지만, 대공께선 최대한 많은 병력이 공도에 묶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침묵이 흐른다.
참모장은 제 의견이 대공의 입맛에 맞았을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괜찮군. 그렇게 진행하도록. 자세한 편성은 자네 수하를 내게 보내서 짜도록 하고.”
됐다…! 참모장은 고개를 꾸벅이고선 애써 침착한 걸음으로 알현실을 나섰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대공이 빈 허공에 대고 명령을 내렸다.
“참모실을 먼저 개편할 필요가 있겠군. 그러고 보니, 영양 상태가 양호한 육체가 더 효율이 좋다고 했던가? 아쉬스.”
“예. 적당한 인선이 선별되면, 갈아치우겠습니다.”
“그리고… 알파 개체를 조금 이른 시기에 깨우는 것도 생각해두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일전에 내린 출입 금지 명령은 철회할 테니, 그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이번에야말로 혼자가 된 대공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전직 성기사단 부단장이라는 변수가 또 등장했지만, 크게 당황할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대계가 진행됨에 따라 치울 예정인 작자였으니.
물론, 다소 주변이 시끌시끌해지는 건 감수해야겠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잠잠해질 것이다. 소문이란 것도 결국 퍼 나르는 이목이 없으면 사그라지는 법이니까.
‘그래. 모든 건 엘펠란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외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
*
*
덜컹- 덜컹-
“으으음…….’
마차의 흔들림에 천천히 잠에서 깨어난 리브론 궁중백이 비몽사몽한 상태로 목소리를 냈다. 마부에게 공도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묻기 위해-.
“으으읍?”
그리고선 깨달았다.
자신의 입에 무언가가 물려 있어, 말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다행히 팔다리는 묶이지 않아 자유로웠지만, 그래봤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허약한 몸으로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짓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
천천히 기억을 되새겼다.
‘카펜타의 분쇄자’를 피해 알-란자스를 벗어난 이후, 그대로 최단 경로를 지나 공도로 향했고… 중간에 말을 쉬게 하는 겸 병사가 준비해준 밥을…….
‘독!’
식사에 수면제 따위를 탄 것이다. 대공의 병사가 자신에게 그럴 이유가 있나? 없다.
리브론 궁중백은 출발하기 전에 병사의 신원을 확인하려다, 베르타의 개입으로 그러지 못했던 걸 떠올렸다.
바꿔치기다.
누군가가 대공의 병사를 죽이고서, 갑옷과 투구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납치한 것이리라. 베르타의 습격을 정확히 노린 걸 보면, 처음부터 베르타 또한 한패였던 것일 테고.
덜컹. 덜컹. 그그극.
그가 저간의 사정을 파악했을 즈음에 마차가 정지했다.
“안에 이미 깼잖수? 알아서 나오시게. 다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러지.”
다소 걸걸한 목소리와 교양 없는 말투다. 어째선지 대공을 적대하기 시작한 용병조합의 존재를 떠올린 궁중백은, 납치범의 정체가 용병임을 짐작했다.
‘멍청한 얼굴이군.’
마차에서 내린 후, 얼굴을 확인한 뒤엔 그 추측은 거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설마 저런 멍청한 얼굴의 귀족이나 기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까닭.
“저쪽으로 가슈. 건물 보이지?”
멍청한 얼굴의 용병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해괴한 손짓에 얼굴을 찡그린 궁중백은 한숨을 삼키곤, 얌전히 용병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었다.
정체를 가려줄 투구를 벗었다는 건, 그래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니. 자신이 살아서 돌아가려면 최대한 저쪽의 입맛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급조한 건물 같군.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조합의 은신처인가?’
이제 깨달았지만, 꽤 긴 시간 잠들었는지 극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생각보다 먼 거리까지 내달렸다는 뜻…….
대체 어딜까. 리브론 궁중백은 반쯤 습관처럼 주변의 정보를 흡수하듯 읽어내며, 통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
그리고 내부에 자리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너, 너는…!”
“뭐야. 날 아나?”
“설마. 대공이 쫓는 야만인이 정말 네놈이었나……!”
“이놈은 왜 지혼자 떠들어?”
의자에 앉았음에도 눈높이가 엇비슷하게 느껴지는 거구, 의복 대신에 짐승의 털가죽만 덜렁 걸친 미개한 옷차림, 그렇게 드러난 몸뚱어리에 흉악할 정도로 들어찬 근육….
그리고 잿빛의 피부만큼이나 짙은 회색으로 물든 눈동자까지.
“참수자! 네놈이 어째서 대공과 적대하고 있는 거냐…!”
*
*
*
론과 조합의 용병이 공수해온 대공국의 수뇌부. ‘리브론 궁중백’이 뜻밖에도 자신을 알아본 것에 칸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리브론이라는 귀족이랑 엮인 기억이 없던 까닭.
“알-로세느 지방에서 네놈이 쳤던 깽판을 전부 까먹었다고 말할 셈이냐…! 그 탓에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고!”
“알-로세느? 거기서 내가 뭔 짓을 했던가…? 뭐, 기억에 없는 걸 보면 별거 아니었겠지.”
“벼, 별거 아닌…?!”
“시시껄렁한 과거 얘기는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대공국의 궁중백 나으리.”
흠칫.
뒤늦게 자기가 어떤 처지인지 깨달은 건지, 화들짝 놀라는 궁중백의 모습에 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나쁜 얘기까진 아닐 거다. 어차피 좋아서 반란군 대가리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내게 뭘 바라는 거지?”
“오. 이야기가 빨라서 좋은데.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었나 보지?”
“…….”
“대충 의심은 하고 있었나 본데, 확실하게 말해주마. 대공과 관련한 소문 중 일부는 사실이다. 놈이 ‘살아있는 시체’를 퍼뜨리고, 그와 관련한 실험을 흑색 철문으로 막힌 공방에서 진행하고 있으며, 인형술사라는 놈과도 엮여있지.”
“나보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허무맹랑한 것에도 정도가 있…….”
“그럼. 북부의 고위 귀족이 대뜸 대공이 되겠다고 설치는 건 말이 되고? 게다가 알-란자스에서 이미 몸으로 겪었을 텐데.”
대공은 만신전조차 적으로 돌렸다는 걸. 그 말이 쐐기가 되어 심중을 파고드는 듯했다.
“그리고 제정신이라면 보이지 않나? 대공의 반란은 미래가 없는 방식이야. 왕가건, 흑익공이건, 나서는 순간 북부 전체가 동요할 테고. 모래성으로 쌓은 세력은 순식간에 무너질 테지.”
“왕가의 개입은 없다.”
“뭐야. 거기까지 들었나?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쓸데없이 이것저것 떠들었잖냐.”
리브론 궁중백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어쩌면 왕국 전체 정세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건에 대하여 의논하는 와중에, 시정잡배처럼 껄렁거리는 작태라니.
‘성격은 흉폭해도 야만인답지 않은 지성을 지녔다 생각했건만, 역시나 야만인은 야만인인가…….’
“보아하니, 네놈. 용병조합과 손을 잡은 모양인데, 그것만으로는 대공을 저지할 수는 없다.”
“음?”
“네놈을 추격하다 실종된 로열가드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처럼 갑자기 기사가 된 이들이 있다. 알-란자스에서 ‘카펜타의 분쇄자’에게 참살당한 이들이지. 그리고 그들은…… 오러가 아닌 무언가를 쓰면서 그녀에게 대항했다. 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살당했지만.”
“꽤나 친절한 설명이시군. 그래서?”
“만약, 만약……. 그곳에서 죽은 기사들을 대신해, 또 다른 기사들이 공백을 채운다면? 왕가가 부재한 지금 유일한 위협이라 할 수 있는 흑익공조차 대공을 막지 못할 거다.”
칸은 그 말을 듣고서도 딱히 두려움을 내비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오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흠. 그럼 말이야. 흑익공의 대전사인가 하는 놈이랑 흑익공의 전력이 나서도 불가능한 정도인가?”
“말했지 않은가. 기사를 양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확실하다면, 전략적으로 패배할 수가 없다. 설령 흑익공의 대전사가 나선다고 한들,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기사를 모두 막을 수나 있겠나?”
“어이, 얘가 흑익공의 대전사는 좆밥이라는데?”
“네놈. 갑자기 누구한테 말을…….”
“나. 이긴다. 가짜 공작. 찢어서 죽일 거다.”
“누구……!”
갑자기 실내에서 울려 퍼지는 낯선 목소리에 리브론 궁중백이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리고 칸의 등 뒤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어눌하게나마 왕국어를 구사하지 않았더라면, 그린스킨 투사가 나타났다 착각할 정도의 거인이.
“그리고 나는 대전사 아니다. 대전사는. 오로지 한 명.”
그 거인의 피부는 창백한 잿빛이었으며,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머리카락은 야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허리에는 검 대신에 작은 손도끼를 두 자루 걸어두었는데, 피가 잔뜩 엉겨 붙었음에도 날의 예기가 소름 끼칠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브론 궁중백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잿빛의 피부 위로 새겨진 흑색의 쌍익이었다.
“서, 설마!”
리브론 궁중백은 갑자기 등장한 야만인의 정체를 단박에 꿰뚫어 보았다. 아니,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수준이겠지.
“나는 대전사가 아니라 아툰의 딸, 파샨투다.”
현 국왕의 종친이자, 왕국의 유일한 공작.
흑익공이 가장 아낀다는 흑익공의 대전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