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82화 (82/132)

#082화. 침투 (1)

본디 북부에서 도시의 이름은, 그 도시 하나만을 칭하는 법이다. 알-란자스와 알-라스델처럼 말이다.

하지만 특정 경우에는 도시 근처의 영역을 통틀어 칭하기도 한다.

도시의 주인이 가진 영향력이 지대하여 남다른 치세를 자랑하는 경우. 그럴 땐 보통 도시 주변을 통틀어서 도시의 이름으로 부른다.

로-엘펠란의 경우가 그러했다.

로-엘펠란은 중심 도시를 중심으로 작은 위성 도시만 네 개를 포함한 거대한 땅이기에, 보통은 로-엘펠란 지방으로 통했다.

‘영주’라는 직위를 없애고 ‘시장’이라는 직함만이 남게 된 아르곤 왕국에선 몹시 드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영주 직위를 없애기로 결정한 왕가가 이례적으로 자비를 베풀어, 옛 엘펠란의 공도를 지배할 수 있게 조치한 것.

그리고 현재.

로-엘펠란은 대공국의 중심이자, 공도로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또한 모여든 병력이 그야말로 왕국의 기준에선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본래부터 군벌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도적 떼 소탕과 이따금 북쪽에서 내려오는 그린스킨 무리와의 야전을 도맡았던 대공이었기에, 숱한 실전 경험과 충성심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병사를 순식간에 소집할 수 있었던 것.

그런 상태에서 반강제로 복속된 귀족들이 하나둘 병력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군벌들의 합류가 더해졌다면, 물경 천오백의 무장된 병사가 공도에 머무르게 되는 셈이라고 리브론은 설명했다.

그런 곳에 침투하려는 것이다.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냐? 라고 엄중히 따져 묻는 그에게, 칸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널 데려온 것 아니겠느냐고-.

*

*

*

그렇게 다시, 로-엘펠란.

로-엘펠란으로 침입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관문은 크게 셋.

성 아래의 일반 시민들이 모여서 사는 성하마을. 상업 및 군사 관련 시설과 성에서 종사하는 이들이 머무르는 저택 지구가 자리한 외성 구역, 그리고 대공이 머무르는 내성 구역. 즉, 대공성이었다.

성하마을의 경우에는 침입하는 것이 크게 까다롭지 않았다. 외곽을 따라 낮은 성벽이 있기는 하지만, 일행의 능력이라면 몰래 타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정도였다.

게다가 감시해야 하는 영역이 워낙 넓었다. 사람의 눈으로 감시하는 이상, 반드시 사각지대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해야겠지.

“이쪽.”

암갈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론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행을 선도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 총 넷이었고, 모두가 론처럼 암갈색의 로브로 전신을 가린 상태였다.

‘역시, 돈이 최고라니까.’

[밤을 걷는 자의 누비옷]

─기척을 감춰주는 용도의 주문이 새겨진 의복 형태의 마도구. 어둠에 더욱 깊이 녹아들고, 인기척이 희미해진다.

─은신 관련 스킬을 보유한 경우, 추가 보정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칼엘손이 일행의 숫자에 맞춰서 준비해준 장비로, 본래는 용병조합의 요인들이 비밀리에 움직일 때를 위하여 준비된 물건이라고.

실제로 어떤 회차에선 ‘용병왕’의 칭호도 얻어봤던 칸이기에, 그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너무나 잘 이해했다.

‘조합 본부에서도 숫자를 제한해서 생산하는 귀중품이니 말 다 했지.’

기왕 저점매수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투자할 생각인 것이다. 정의의 신이 칸의 배후에 붙은 이상 떡상할 일만 남았을 거란 계산도 있을 테고.

[끄응. 답답하군. 그냥 다 때려 부수면 안 되는 거냐? 조카야.]

[…모르면 그냥 따라오시오.]

어떤 무식한 야만인이 무식한 소리로 답답함을 호소하는 일도 있었지만, 첫 만남에서 벌인 싸움으로 손에 넣은 ‘승자의 권리’를 행사한 칸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쯧. 그래도 답답한 건 사실인가.’

론의 길잡이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추정 A, 최대 S등급의 길잡이 스킬을 보유한 녀석이니까.

칼엘손이 준비한 ‘오두막’은 공도와 가장 인접한 로-엘펠란의 위성도시 소재의 은신처다. 론의 역할은 그곳에서부터 성하마을을 지나, 외성벽의 앞까지 일행을 안내하는 것.

그리고 현재 일행의 위치는 성하마을 바깥쪽에 둘러쳐진 방벽의 인근이었다.

‘또 오는군.’

아직 방벽 내부에 침입하기도 전이건만, 수시로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밤을 걷는 자의 누비옷’의 효과로 인기척을 감추고, 모습을 어둠에 동화시킨다고 해서 사람의 눈을 완벽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은신 스킬을 보유한 칸이나, 검호인 칼엘손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머지 일행의 경우엔 감시의 눈을 최대한 피해서 잠입할 필요가 있었다.

“쉬. 신호할 때까지 숨 참으시게…….”

그 신호에 일행이 건물의 뒤로 몸을 숨겼다. 자기가 왜 숨어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파샨투가 어물쩍대는 걸, 칸이 억지로 끌고 와서 건물 뒤로 몸을 숨기게 했다.

그리고 은신 스킬을 활성화한 칸이 고개를 슬쩍 내밀어 병사들이 있는 곳을 흘기니, 횃불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섯 명의 인형이 보였다.

툭. 툭.

허리를 두드리는 감촉에 뒤를 돌아본 칸이 얼굴을 찡그렸다. 파샨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죽여도 돼?’라고 묻고 있었기에.

‘미개한 야만인 같으니라고….’

고개를 저어 보이자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모습에 분통이 터질 때쯤. 칼엘손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기이하게도 발걸음 소리가 하나 나질 않았다.

설마 녀석도 야만인처럼 피맛을 보겠다는 것 아닐 테고, 아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본인이 손을 쓰겠다는 뜻이리라.

검호인 칼엘손이라면, 조금의 소음도 없이 여섯을 동시에 베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일곱 걸음.”

신호는 칸이 했다. 그의 감각에선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벽 너머의 움직임이 훤히 느껴졌기에.

“여섯. 다섯. 넷…….”

그때부턴 신호가 필요하지 않았다.

칼엘손의 검이 너무나 부드럽게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럴 순간이 온다면, 저 검이 단번에 여섯 개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

저들이 몸을 숨긴 건물을 지나쳐 시야에 완전히 들어오는 순간에…….

“조장.”

멈칫.

횃불의 불빛이 일행이 몸을 숨긴 곳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고, 거의 발검을 마친 칼엘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멀리 나가면, 오늘도 술은커녕, 잠도 못 자게 생겼는데….”

“흠. 그런가……?”

“낮에는 도시 돌고, 밤에는 바깥 순찰하고…. 이러다 과로로 먼저 가시겠어요. 그래놓고 자기 병사들은 순찰은커녕 맨날 내성에 박아두다니…….”

“어이, 그러다 끌려간다. 안 그래도 소문 가지고 떠들던 놈들 붙잡혀갔다는 얘기 못 들었어? 그냥…. 가자고. 그래.”

대화를 끝으로 횃불의 빛이 멀어진다.

흐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던 리브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보다 소리가 크게 난 탓이었는데, 다행히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듣지 못한 눈치였다.

‘시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태어날 때부터 귀족으로 자란 그가, 쥐새끼처럼 숨어서 도시에 침입하는 일을 하리라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으리라.

“이런…!”

‘저, 저 미친.’

게다가 사람 못 죽였다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여자 야만인과 동행하게 될 줄도 몰랐을 테고.

“무슨 문제 있나? 자네 얼굴빛이 안 좋은데. 과호흡인가?”

게다가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멍청한 얼굴의 길잡이 때문에 더욱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저 얼굴로 당연한 질문을 하니까, 괜스레 알면서도 놀리는 것처럼 들려서 더 열이 받는다고 할까.

‘이 자리에 내가 낀 것부터가 문제라고!’

마음 같아선 그렇게 외치고선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도망을 어디로 어떻게 친단 말인가. 혼자 도망치다가 도적이나, 마물이라도 마주치면?

아니, 솔직히 말해 리브론에게는 그런 것보다 주위에 있는 인간 백정들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시 가자고.”

결국 리브론이 할 말이라곤, 어서 방벽을 넘도록 일행을 재촉하는 것뿐이었다. 사람으로 붐비는 성하마을이라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는, 스스로도 믿지 못할 바람과 함께.

*

*

*

리브론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아니지만, 일행은 론의 인도를 따라 성하마을을 감싼 방벽 바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벽이라기엔 애매한 높이지만, 뛰어서 오를 정도는 아니어서 방벽이다. 게다가 두껍기도 두꺼워서 무너뜨리고 지나갈 수도 없었다.

리브론은 자기 키보다 높게 지어진 방벽을 툭- 툭- 두들기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뭘 어쩌려고….”

“어쩌기는. 이 꽉 깨물고, 비명 지르지 마라.”

“뭐라고옥……!”

갑작스런 부유감에 놀란 리브론의 입을 무언가가 틀어막았다. 그가 비명을 지를 걸 예상한 칸이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아예 얼굴을 덮고서 뛰어오른 것이다.

흐어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던 리브론의 몸을 지배하던 부유감은 금새 자취를 감췄다.

“…사람의 신체 능력이 아니군. 야만인들은 전부 다 괴물인 건가?”

“호들갑은…. 가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방벽을 뛰어넘은 일행들이 하나둘 칸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다소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론이 파샨투의 도움을 받고서 방벽을 넘은 게 마지막이었다.

성하마을은 북부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된 곳인 만큼,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다.

낯선 인물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당연히 눈에 띄기야 하겠지만, 일행의 일차적인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그럼. 나는 이쯤에서…….”

“고생했다.”

그 전에.

머뭇머뭇 발을 떼지 못하는 론의 어깨를 칸이 두들겼다.

용병답지 않게 동료애가 강한 녀석이니, 망설이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겠지. 하지만 론이 남는다고 해서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다는 건, 애초에 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저리 머뭇머뭇하는 거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만 해도, 금화가 아깝지 않을 정도다. 이만하면 충분해.”

“내, 내 직감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네 길잡이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필요한 건 길을 찾는 재주가 아니라. 다 때려 부수는 능력이야. 게다가. 넌 따로 할 일이 있을 텐데.”

“……그렇지. 내가 잠깐 멍청한 소릴 했어.”

론이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그의 내면에서 어떤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을지, 칸은 감히 재단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의 등을 떠밀어주듯,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머지는 맡기겠다.”

“맡기게. 책임지고 전부 다 데리고 들어올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론의 기척이 번잡한 성하마을의 풍경 속에 뒤섞여 사라졌다.

“이쪽이다.”

그리고 론의 대신으로 길잡이 자리에 선 칼엘손이 거침없이 길목을 누볐다.

워낙 눈에 띄는 행색으로 이루어진 일행이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성하마을의 경우에는 오히려 머뭇거리는 쪽이 더욱 수상하게 느껴질 터였다.

성 바깥의 민간지구라 할 수 있는 성하마을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까닭. 물론, 일차적으로 까다로운 검문 과정을 거쳐야 들어설 수 있기에 더욱 그런 편이었다.

게다가.

현재 성하마을의 경비 책임자는 대공의 사람이지만, 실제 현장 인력들 대부분이 외부의 병력으로 구성된 탓에 엉성한 부분이 많았다.

‘흔한 중세식 행정 처리지.’

무엇보다 그 명령을 직접 대공에게 명받고서 처리한 인물이 일행과 함께하는 중 아니던가. 물론, 그가 실종된 이후로 경비 태세가 강화되었을 가능성도 있긴 했다마는.

대공의 입장에서 딱히 리브론의 존재가 중요치 않았던 걸까. 성하마을의 경비 상태는 리브론이 실종되기 전과 완전히 동일한 눈치였다.

덕분에 일행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일차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쿵- 쿵쿵. 끼이익….

“왔군. 기다리고 있었소. 총지부장, 그리고…….”

칼엘손이 정해진 신호대로 노크를 하자 문을 걸어 잠근 2층짜리 상가 건물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모습을 보인 건 대공 측의 병사가 입는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였다.

그에 파샨투가 움찔했지만, 칸이 만류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침 사내의 시선 또한 칸을 향했다.

“우리의 포악스런 고객님께서도. 잘 오셨소.”

“대공이 사람 대우를 괜찮게 하나 본데. 정보 조합 대가리를 병사로 쓸 정도면 말이야.”

“뭐, 돈은 나쁘지 않게 주더군. 내가 평소에 챙겨먹는 뒷돈만큼은 아니어도.”

아르곤 왕국에서 가장 거대한 정보 조합을 이끄는 수장이자, 인형술사와의 전투로 정신을 잃은 사이 졸지에 대공에게 쫓기는 처지가 된 칸에게 접촉하여 칼엘손과의 만남을 주선한 이.

하얀 까마귀의 길드장, 레븐이 씩 웃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해야 할 얘기가 많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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