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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83화 (83/132)

#083화. 침투 (2)

인형술사와의 전투를 치르고 정신을 잃은 사이 대공이 독립을 선언하며 칸을 ‘악마의 하수인’으로 내몰았다-. 라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지 않았더라면 멀뚱멀뚱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을 가능성이 높았을 터였다.

거기서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레븐의 하얀 까마귀였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고객님이 서부에서 내 애들을 두들겨 팼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소. 대충 짐작은 하고 계셨나?”

“뭐….”

칸은 적당히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했다.

‘엘리야한테 통수를 맞고서, 다르킨의 다른 제자를 찾겠답시고 정보 조합을 들쑤셨던 때의 일을 말하는 건가.’

당시, 정보 길드의 놈들이 과하게 비협조적으로 나오길래 적당히 어루만진 적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줘팼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안 그래도 로렌의 마녀와 함께 오우거를 사냥한 ‘오우거 슬레이어’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던 참이었는데, 동부에서 흘러들어온 야만인이 업장을 아주 작살을 내놨더군. 그래서 이것저것 파봤지. 사람도 여럿 붙이고.”

‘악성 스토커였군.’

그 이후의 얘기는 대강 상상이 간다.

자신의 행보를 그대로 따라서 정보를 수집하다가, 북부의 참수자와 동일한 인물임을 알아차렸겠지. 당시에 이런저런 일로 하얀 까마귀 길드의 신세를 좀 졌으니까. 특정하는 건 쉬웠을 테고….

“뭐, 그렇게 옛날 책에 나오는 모험담이라도 구경하듯 그쪽 정보를 받아보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데일론 후작이 사고를 쳐버렸잖소? 내 심심함을 달래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죽이겠다면서….”

나는 내 독서를 방해하는 짓거리를 제일 싫어하는데 말이오. 레븐이 짓궂은 농담이라도 하는 듯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대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떠올렸소. 참수자라는 이름으로 알-로세느와 알-로렌느 인근을 뒤집던 야만인과 모종의 연결이 있는 인물이면서, 그대와 깊게 엮인 로렌의 마녀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인물을.”

“…잘 보여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녀의 편의를 봐주는 거다. 받은 도움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뭐, 어쨌든. 실제로 그는 관심을 보였고, 특정 조건하에 당신과 만나기로 약속까지 잡았지. 지금은 아예 한 배를 탄 모양새지만 말이오.”

레븐의 눈빛을 마주한 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짙은 호기심과 호의, 그리고 알 수 없는 빛깔로 얼룩진 눈동자가 칸의 이곳저곳을 스캔하듯 훑는 것이 다소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시발, 이 새끼 그쪽 취향은 아니겠지.’

“그 배경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지만… 굳이 따져 묻진 않겠소. 그것보단 슬슬 일 이야기로 넘어가지. 내가 그대를 왜 돕는지는 충분한 설명이 된 것 같고. 리브론 궁중백? 맞소?”

“엇, 크흠. 맞네.”

“우선 당신이 사라지고서 공도의 상황은 이렇소. 참모부가 당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모양새로 있는데, 그마저도 최근 교체된 듯하더군.”

레븐이 무언가가 복잡하게 적힌 종이를 펼치며, 손끝으로 어떤 그림을 가리켰다.

“이건… 평면도? 설마 대공성의?!”

“맞소. 꽤 고생해서 구했지. 거기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라서.”

리브론이 불신이 담긴 시선을 레븐에게 보냈다. 고생해서 구했다?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리브론이 놀란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이번 일을 위해서 구한 게 아니야, 꽤 오랜 시간…. 몇 년의 시간을 들여서 그린 평면도다!’

지도의 정교함만 따지자면야,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겠으나 리브론이 주목한 점은 레븐의 평면도가 가진 방대한 정보량이었다.

그가 모르는 구역에 대한 정보까지 적힌 평면도는, 몇 번이고 덧그린 흔적이 가득했다.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완성한 평면도라는 뜻이다.

‘아주 긴 세월을 들여 조금씩, 조금씩 보완해 지금의 상태가 된 거겠지.’

“뭐, 진짜 반란군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면 예전부터 대공을 암살할 작정이었던가…….”

“재밌는 농담을 하시는군. 나 같은 정보상이 뭐 얻을 게 있다고 반란을 일으키겠소? 오히려 나는 지금처럼 누군가 일으킨 혼란에 편승하는 쪽이 본업이오. 여러모로 돈이 되거든.”

“그럼. 성의 평면도는…?”

“뭐. 언젠가는 사갈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꾸준히 증언을 수집했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소. 성에서 일했던 하인들이나, 병사로 근무했던 이력이 존재하는 이들, 별개의 용무로 성에 들어간 이들에게 접근해서 소정의 대가를 주고 몇 마디 말만 주고받으면 끝나는 일이라.”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거래를 시도할 만한 대상을 선별하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을 게 분명했다. 리브론은 ‘정보 길드’라는 집단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을 완전히 고쳤다.

‘성의 구조가 그려진 평면도는 그 자체로 폭탄이다. 자칫하면 길드 자체가 노려지거나, 결국 아무런 이득도 못 봤을 수도 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이 넘도록 인력과 자금력을 쏟아부었고, 이렇게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눈앞의 남자는 아마 엄청난 수완을 가진 사업가거나, 제 흥미를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광인이겠지.

그리고 거의 확실하게 후자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있는 거고.’

“뭐, 내 사업 얘기야 관심 있으면 나중에 날 찾으시오. 우선은 대공성에 대한 얘기를 합시다. 이게 생각보다 흥미롭거든.”

“흥미롭다?”

“여기, 이것들도 함께 보지.”

레븐이 다른 종이를 평면도 위에 겹치듯 펼쳤다. 그를 본 장내의 반응은 ‘잘 모르겠다.’ 정도였다.

“마법진처럼 생겼군.”

“응? 마법진이라고?”

“빈 구멍이 많아서 확실하진 않지만…. 평면도의 그림을 겹치면, 마법진이랑 비슷한 형태가 나온다. 보고도 모르나?”

칸이 한심하단 투로 일행들을 타박했다. 대충 흘겨만 봐도 마법진의 형태가 연상되지 않는 건가? 답을 알려줘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평면도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모습에 혀를 찬 칸이 고개를 까딱였다.

“됐으니까 넘어가라.”

“흠…. 내 입장에선 당신이 단번에 꿰뚫어 본 쪽이 더 놀랍다마는. 맞소. 마법진의 형태를 하고 있지. 대공성 자체가 하나의 마법진인 것이오. 아주 거대한….”

“그거. 저놈이 퍼뜨린 소문에도 있던 얘기 같은데?”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거지. 우리의 참수자께서 알고 퍼뜨린 건지는 몰라도.”

“쓸데없는 소리는 됐다. 얘기했던 건?”

당연히 파악해놨소. 씨익- 입꼬리를 올린 레븐이 평면도의 특정 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쪽 분야의 전문가를 수배하는 게 쉽지는 않았소만, 얼추 구성은 맞출 수 있었지.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추려낸 루트는 총 셋이오. ‘대공의 공방’이 차지하는 공간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후보가 많지 않더군?”

“일단 보고 얘기하지.”

“하나는 지하요. 대대로 대공의 마법사들이 쓰는 공간은 전부 지하에 있었지.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고.”

수색하는 과정에서 마법적 함정을 맞닥뜨릴 가능성이 농후한 데다가, 마법사들이 사전에 대비를 마치고선 일행을 덮칠 가능성도 있기에 만만치 않은 후보지였다.

“다음은 대공성에서 가장 은밀한 곳 중 하나요. 옛 엘펠란 공국 시절부터 간직해온 대공가의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지. 그만큼 경비도 삼엄하고, 알려진 것도 적어. 아마 공국을 멸망시킨 찬탈왕 정도나 가 보지 않았을까.”

“가장 그럴싸한 장소 아닌가? 내가 대공이어도 자기 뒷구멍은 가장 은밀한 곳에 숨길 것 같은데?”

“추잡한 표현이지만, 총지부장의 말이 맞소. 내 생각에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장소지. 그리고 마지막은…….”

평면도 위를 매끄럽게 훑은 레븐의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고, 리브론이 움찔 반응했다. 레븐은 예상한 반응에 즐거운 듯이 웃었다.

“궁중백도 잘 아는 공간이지. 그렇지 않소?”

“……알현실.”

“맞소. 대공이 공적인 업무를 보거나, 제 가신 혹은 외부의 인사를 맞이하는 장소. 어쩌면 가장 개방된 공간이라 할 수 있지.”

“알현실에 소문의 ‘흑색 철문’이 있다고? 그럴 리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오. 알현실은 대공성의 중심에 자리했지. 전문가들의 의견으로는, 바깥에서 본 대공성의 모습에서 추정한 크기와 알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니까.”

뭐, 선택은 어쨌든 참수자의 몫이지. 레븐은 고개를 으쓱이곤 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어느 루트로 행차하실 생각이오? 오늘의 주인공께서는.”

흠- 질문에 대한 답을 보류한 칸이 평면도를 유심히 살폈다.

그가 인형술사의 기억에서 본 복도는 창문이 없어 폐쇄된 복도였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지하인 첫 번째 루트가 가장 그럴싸하기는 했다. 하지만 주문쟁이의 음습한 습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가장 가능성이 적은 루트이기도 했다.

‘주문쟁이들은 자기 연구를 다른 주문쟁이랑 공유하거나, 도둑질당하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니까. 다른 마법사가 쉽게 출입하는 곳은 꺼리겠지.’

그리고 레븐의 의견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두 번째 루트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대공성에서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이라고는 말하지만. 이미 옛적에 ‘찬탈왕’이라는 양반이 한 번 발을 디뎠던 공간 아닌가. 그가 왕가에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을 남겼다면?

‘왕가에 반기를 들어야 하는 처지에서, 한 번 뚫린 공간을 다시 활용하고 싶을까? 노려지기 쉬운 만큼, 오히려 함정으로 써먹을 가능성도…….’

그렇다고 마지막 루트가 썩 와닿지도 않았다. 대공가의 내부인은 물론이고, 외부의 출입도 가장 빈번한 공간에 주문쟁이가 제 음습한 비밀기지를 감춰뒀을까? 하고 스스로 되묻는다면 고개가 저어지는 까닭.

결국, 감으로 찍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아니면 한 명씩 찢어져서 수색을 하던가….

‘어렵군.’

아무리 고민해도 확실한 선택지가 없음에, 잠시 고민하던 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

*

*

‘공방’에 발을 들인 대공의 시선이 정면을 향한다. 모든 계획의 시작이자, 끝을 장식하게 될 ‘알파’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제대로 읽을 수도 없군. 이제는.’

처음 알파의 설계에는 대공 본인도 참여했지만, 이후로는 아쉬스와 인형술사가 도맡아서 실험을 진행했기에 그가 아는 것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새겨진 마법진의 복잡함이 처음 설계 당시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수십, 아니 수백의 마법진을 사람 크기의 인형에 새기는 작업이다. 금색 마탑의 마구스라도 불가능할 광기와 집착의 산물.

‘그만큼의 결과물이 나오는 건 당연한 바. 마지막 단계만 성공적으로 끝마친다면….’

두 마리의 뱀이 해골을 감싼 형태의 왕홀을 움켜쥔 대공이 천천히 알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를 따라 왕홀이 웅웅- 공명했다.

“대공. 더 다가가면, 알파에게 새긴 주문이 반응할 겁니다.”

“인형술사.”

그때 알파가 잠든 목관에서 인형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구의 결실이 코앞인데, 그걸 제 손으로 망치는 짓은…. 하지 않으시겠지요?”

“건방진 소리를.”

“하하.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그나저나 대공께서 많이 궁금하셨나 봅니다? 알파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로 변했는지-.”

“이게 어떤 존재가 될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것의 설계에 나 또한 참여했다는 것. 잊었나?”

“당연히 잊지 않았지요. 큰 도움이 됐었으니까.”

어쩐지 묘하게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는 놈.

“시답잖은 얘기는 됐다. 대마법진의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나 말하라.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대비해놓으라 일러둔 것. 잊지 않았겠지.”

“당연히. 대공께서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대마법진은 언제고 발동할 겁니다. 그리고…….”

대마법진을 딛고 선 인간들의 영혼을 모조리 빨아들여, 제 양분으로 삼을 겁니다.

“대공. 당신이 처음부터 바란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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