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침투 (3)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소. 외성의 문은 반나절에 한 번씩 돌아가며 번을 서지만, 성벽 위에서 감시하는 인원의 순환이 끊임없게 짜여 있거든.”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만, 상당한 돈을 썼노라고 장난스레 말한 레븐이 이번에는 로-엘펠란의 전경이 그려진 듯한 그림을 가져왔다.
“현재 외성문을 지키는 건 대공의 직속 병사와 이번에 복속된 귀족의 병력이 반쯤 섞인 형태요. 숫자는 바깥에 열, 안쪽에 다시 열이지. 기사는 추정키로 둘.”
“검붉은 오러를 쓰는 놈이겠군. 그건 칼엘손이 잡는다. 최대한 일격에,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처리해야 해.”
“조용히 거리만 좁힐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검호인 총지부장이라면 쉽겠군요. 하지만 기사와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는, 궁중백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내 역할이…?”
레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대공은 당신의 행적을 완전히 놓쳤소. 중간에 마차를 세 번이나 교체했으니, 설마 로-엘펠란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그건 외성을 지키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고.”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전말을 확인하기 위해 안으로 들일 거란 말이군.”
“이해가 빨라서 좋소. 물론, 안쪽에 소식을 먼저 넣으려 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현장에서의 판단에 맡겨야지.”
“큰 소란 없이 성문의 기사와 병사들을 제거하면, 얼마나 여유가 주어지지?”
“한 시간. 아무리 길게 잡아도 거기까지가 한계요. 변수가 있다면 아예 없을 수도 있지. 최우선적으로 시신을 깔끔히 처리하고, 전투의 흔적을 많이 남기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한 시간이라…….”
칸의 시선이 로-엘펠란의 전도를 향했다.
중세의 지도답게 축척이나, 정확한 지형의 묘사가 모호하다. 하지만 외성 구역을 돌파해 내성에 침입하기까지의 여유가 한 시간이란 게 짧다는 건 충분히 실감될 정도의 크기였다.
“…외성을 돌파한 뒤에는? 난 어쩌란 거지?”
그때 리브론이 의문을 표했다. 주먹이나 겨우 휘두를까 싶은 허약한 그가 앞으로 있을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건 당연한 바.
칸은 시큰둥한 반응으로 레븐을 돌아보았다. ‘니가 알아서 설명해.’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에 레븐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협력자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소. 궁중백께선 외성 구역에 들어선 직후, 협력자가 기다리는 접선지로 홀로 향하면 되오.”
“……협력자? 그게 누구지?”
“그건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시구려. 몹시 반가워할 상대라는 것만은 확실히 해두지.”
의뭉스러운 말투에 리브론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더 이상 의문을 재기하진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그도 잘 이해한 까닭이다.
“그럼! 각자 할 일을 해야겠지. 당신네가 외성으로 향하면, 나도 나머지 계획을 준비해야 하거든.”
“실수하지 마라. 그쪽의 역할이 절대 가볍지 않으니까. 제대로 도우란 말이다.”
“흐. 이를 말이오?”
레븐이 감히 누굴 의심하냐는 듯 씨익 웃었다.
“오늘로써, 하얀 까마귀는 왕국 최대의 정보상이 될 거요. 반란군 진압에 결정적 도움을 준 정보상이라, 벌써부터 돈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먼.”
*
*
*
“문을 열어라…! 어서!”
갑작스러운 소동에 외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도개교를 넘는 네 명을 향해서 창을 겨누었다. 물론, 어물쩍 눈치만 보는 병사가 반이었지만-.
“확인해.”
그때 갑옷을 입은 채 석상처럼 굳어있던 기사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창을 겨누고 있던 병사들이 창을 내리고, 엄한 눈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인원을 향해 외쳤다.
“신분을 밝히시오!”
“이놈들…! 설마 날 못 알아봤다고 말할 셈이냐? 어서 문이나 열래두!”
대체 저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그 누구도 대공성의 문을 아무런 검문 없이 지나칠 수 없었다. 그들의 주군인 대공과, 대공이 허락한 소수의 인물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에 호통을 치려던 병사들 중 하나가 ‘엇!’하는 소리를 냈다.
“궁중백?”
“뭐? 궁중백이라고?”
상대의 정체가 알-란자스에서 습격을 받고 실종되었던 궁중백임을 인지한 병사들이 놀란 눈으로 창을 반쯤 거뒀다. 창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것은, 반쯤 남은 의심 탓이리라.
“어서 비켜! 대공께 소식을 전해야 한다…!”
“잠깐 진정하십시오. 궁중백. 대체 무슨 연유로 이런 오밤중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셨단 말입니까. 게다가 뒤쪽에는…….”
병사의 시선이 대공을 호위하듯 뒤쪽에 선 이들을 향했다. 암갈색의 천을 누더기처럼 엮어 만든 옷에 후드까지 걸친 이들. 숫자는 모두 셋이었는데, 얼굴을 감췄음에도 행색이 범상치 않았다.
‘그린스킨인가?’
세 명의 호위 중 둘의 몸뚱어리가 엄청나게 커다랬다. 오크 투사를 데려다가 호위로 고용한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올 정도로.
“알-란자스에서 쫓기다, 현지에서 고용한 호위들일세. 병사들도 다 죽은 마당에 혼자 로-엘펠란까지 올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용병입니까?”
“그럼 용병이지. 자꾸 쓸데없이 말꼬리나 잡을 셈인가? 그게 아니라면 비키게. 대공께 서둘러 전해야 할 소식이 있으니까…!”
병사는 그 말에 섣불리 반응하지 않고 침묵했다.
눈앞의 인물은 확실히 궁중백 본인이 맞았다. 그 말은 즉, 대공이 직접 출입 허가를 내린 그의 출입을 막을 명분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막을 이유는 존재했다.
사실상 죽었거나, 적의 손에 떨어졌을 거라던 궁중백이 멀쩡한 상태로, 하물며 수상쩍은 호위를 대동하고서 모습을 드러냈으니. 자세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대공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이럴 땐.’
만약, 어수룩한 여타 도시의 병사라면 일단 통과시키고 봤겠지. 하지만 대공의 병사들은 숱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
“그럼. 저희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내성에서도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따로 말도 전하지요.”
현장의 최고책임자로 ‘기사’가 둘 있긴 하지만, 그들의 힘을 빌리되 판단은 그들의 선에서 내리란 명령이 있었다.
그렇다면 조장인 자신이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우선은 궁중백의 신변을 확보한다. 그리고 정당한 명분을 들어 안쪽에 소식을 전한다.’
그것이 그의 판단이었고,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기도 했다.
“경들께서도 동행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일개 병사인 저보다는, 기사님들께서 있어 주시는 게 설득력이 있으니.”
“…….”
“…….”
기사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궁중백과 그 호위를 둥그렇게 감싼 형태로 내성까지 호송하게 된 병사들이 조용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혹여나 일이 생겼을 때, 망설임 없이 손을 쓰라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그리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궁중백의 용병 호위로 위장한 칸과 칼엘손이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언제 죽이면 되는 거냐.’
‘참아라. 적당한 때에 신호를 줄 테니까.’
‘지금 죽여도 상관없어 보이는데.’
‘확실하게 가야지.’
눈빛으로만 나눈 대화지만, 실제로도 비슷한 의견이 오갔을 게 분명했다. 서로 함께 싸운 경험은 없지만, 수없이 많은 실전 경험으로 다져진 감각이 그 공백을 대신했다.
칸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성문을 정확히 지나치는 지점이다.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성벽 위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무언가를 하려면 지금보다 더 적합한 순간이 없다는 뜻.
신호는 따로 주어지지 않았다. ‘네리아의 마법 송곳’을 꺼내든 칸이 앞쪽에 자리한 기사의 뒷목을 순식간에 붙잡아 뜯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 놀란 눈으로 창을 드는 병사의 목을 송곳으로 꿰뚫었다.
그때 뒤쪽에서 사학- 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기사의 목과 심장에 구멍이 뚫리는 소리였다. 연이어 춤을 추듯 회전한 칼엘손의 검이 병사 셋의 목을 가볍게 훑었다.
그 사이에 파샨투의 도끼가 마구잡이로 병사들을 난도질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열 명의 병사와 두 명의 기사가 시체가 되어 쓰러진 것이다.
‘미친…!’
그 중심에서 모든 걸 지켜본 ─엄연히 말하자면 일행의 움직임을 하나도 보지 못했지만─ 리브론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야말로 눈 깜빡하는 사이에 모든 일이 벌어지고 끝났다.
‘아니, 아직 안 끝났다!’
뒤늦게 나머지 열 명의 병사 쪽에 생각이 미친다.
대공이 귀족들에게서 차출한 병사들이, 바로 건너편에서 모든 광경을 봐 버렸다. 소란이 생기지 않으려면 서둘러서 저들까지 처리해야….
“헤른 자작님…!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생각할 틈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건너편의 병사들이 먼저 다가와 리브론의 팔을 붙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그가 발버둥 쳤고, 무언가를 보곤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나머지 분들도 모시겠습니다.”
나머지 일행은 처음부터 약속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귀족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내성문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외성 구역에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들어간다는, 어쩌면 이후 계획의 난이도를 크게 좌우할 첫 난관을 어떻게든 성공해냈다. 리브론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기사와 병사들이 한꺼번에 사정권 안에 들어오도록 유도할 수 없었겠지.
언젠가는 관문 병력의 공백과 시체가 발견되겠지만, 그때면 진작 일이 터지고도 남았을 터.
‘녀석한테 시킬 일이 아직 남았긴 했지만…. 당장 중요한 건 결국, 내성에 침투하게 될 이쪽이다.’
성하마을과 외성 구역은 고작 성벽 하나만을 사이에 두었을 따름인데, 겉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평생 서로를 잠재적 강도 취급하며, 불편한 이웃처럼 대해오던 귀족들이 한 곳에 모였다. 실제로 도시 사이의 분쟁이 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반쯤 강제로 하나의 세력이 되어 움직이려니 삐걱대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 분위기가 결과적으로는 칸 일행의 움직임을 편하게 만들어 줬다.
수상쩍은 복색의 거한들이 귀족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내성으로 향하는 걸 보고도, 굳이 다가와서 아는 체하거나 참견하지 않고 쉬쉬하며 지나간다.
괜히 엮여서 피곤해지기 싫다는 분위기가, 대공 휘하에 복속된 귀족들 사이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게 별다른 방해 없이, 순조롭게 외성 구역을 돌파하던 칸의 고개가 문득 하늘을 향했다.
톡- 톡-
마침 떨어진 물방울 몇 개가 얼굴을 때렸고, 물방울은 점차 세기를 더하여 빗줄기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
외성 구역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호우에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흩어졌다. 그렇게 마주치는 인적조차 거의 없어지게 되고, 잘 정비된 대로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이용하게 된 칸이 누비옷의 후드를 걷었다.
“뭐야. 벌써?”
“이만하면 충분하지.”
“뭐…. 그런가?”
칼엘손과 파샨투도 기다렸다는 듯이 후드를 걷었다. 파샨투는 전신을 덮는 누비옷이 답답했는지, 아예 벗어 던져버렸다.
“어이! 그거 비싼 거라니까!”
“흐하하하! 시작이구나!”
“염병할. 그거 하나 만드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
파샨투가 떨어뜨린 누비옷을 잽싸게 주워 챙긴 칼엘손이 투덜거리는 가운데. 칸은 주위를 감싼 병사들에게 돌아가라 일러두었다.
“이제는 우리끼리면 충분하니, 그쪽은 주인이랑 같이 몸을 숨기고 계시오.”
병사들은 무어라 대꾸조차 없이 등을 돌려서 대로를 벗어났다. 그렇게 셋만이 남게 된 일행이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고, 내성으로 돌입할 준비를 마쳤다.
드드드드드…!
그리고 멀지 않은 거리에서 도르레 소리가 났다.
내성으로 들어가는 통로의 쇠창살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내리기 시작하는 비 때문에, 폐문 시간을 앞당기는 듯했다. 저 통로를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일행에게는 악재나 다름없는 소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은 물론이고, 나머지 둘에게서도 조급한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자를 수 있겠나?”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칸의 물음에 콧방귀를 낀 칼엘손이 통로를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그때쯤 일행의 접근을 알아차린 병사들이 마구 고함치며 창칼을 들이밀었지만, 칼엘손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다가갔다.
“접근……!”
“찔러어……!”
권고를 무시당한 대공의 병사들이 문답무용으로 창을 내질렀다. 그리고 몇 갈래의 섬광이 그들의 목과 가슴, 팔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촤아아악─.
칼엘손의 검격이 지나간 자리로 순간 빗줄기의 흐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섬광에 닿은 병사들의 몸이 스르르- 허물어지고, 이어서 내려친 칼엘손의 검이 통로를 막고 있는 쇠창살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소란이 퍼진다.
내성의 통로에서 발생한 이변을 알아차린 듯, 통로 건너편에서 수많은 기척이 칸의 감각에 잡혔다.
이제껏 몰래몰래 잠입한 것이 순식간에 무의미해진 것이다. 하지만 칸은 담담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기에.
성하마을과 외성 구역에서부터 일을 벌이면, 끝도 없이 밀려드는 불나방들을 모조리 쳐내며 움직여야만 하기에 쥐새끼처럼 행동한 것뿐. 칸이 일을 해결하는 방식은, 결국엔 하나로 귀결되었다. 언제나처럼-.
‘그러고 보니, 고위 귀족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본 적이 없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