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던전 (1)
[카르얀──!!]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제 민족의 신을 부르짖은 파샨투가 대공이 선물한 도끼를 양손에 쥐고서 뛰쳐나갔다. 칸보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폭발적인 속도로.
그 움직임이 마치 거대한 범이 먹잇감을 덮치는 모습을 닮아 있었다.
촤아아악!
빗줄기를 헤치며, 통로의 건너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무장한 병사들의 간격으로 서슴없이 발을 들이밀었다.
단지 한 명의 야만인이 통로에 들어섰을 뿐인데,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된 통로가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실제로 비좁은 것이 맞았다.
실제로 파샨투가 감당해야 하는 숫자라고 해봐야 한 번에 셋이 고작. 게다가 그녀가 처음부터 거리를 바싹 좁힌 탓에 창의 위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힘든 간격이었다.
계산이 아닌, 본능의 영역이다.
모든 서릿골의 전사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전투의 달인이었고, 본능적으로 적의 약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커억!”
창끝이 살갗을 스칠 정도의 간격만을 남기고 회피한 그녀가 도끼를 휘둘렀다. 정확히 갑옷의 이음새를 노린 공격은, 정확히 어느 정도의 힘으로 끊어쳐야 근육을 찢고 뼈를 끊을 수 있는지 알고 행한 것처럼 정교했다.
물론, 당장 죽을 정도의 치명상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죽일 필요 또한 없었다. 통로에 들어선 것은 그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서걱. 서걱. 서걱.
세 번의 절삭음이 거의 겹치듯 들렸다. 그러나 아무도 검이 휘둘러진 걸 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암살자가 도사리는 듯한 광경에, 대공의 병사들이 주춤 물러서면서 태세를 정비했다.
“간격을 벌려! 통로를 지나지 못하게만 막아!”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타워 쉴드를 든 채 파샨투의 앞을 막아섰다. 아예 몸으로 통로를 틀어막겠다는 의지가 엿보였고, 최선의 판단이기도 했다.
일직선의 통로에 방패진을 몇 겹이고 쌓은 채 버틴다면, 제아무리 파샨투라도 억지로 뚫기란 어려웠으니까. 게다가 그냥 당할 생각은 아니라는 듯, ‘투두둥-‘하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강철로 만든 볼트가 파샨투의 전면을 꽉 채웠다.
제아무리 전투의 달인인 그녀라도, 좁은 통로에서 발사된 십수 발의 볼트를 모조리 쳐낼 수는 없음이라. 대공의 병사들이 얼마나 정예로운 강병인지 알 수 있는 판단력이었다.
만약, 그녀 혼자였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지.
“돈이 아주 썩어나나 보군.”
짧게 이죽대는 목소리가 들린 직후에 강철로 된 볼트들이 후두두- 바닥에 떨어졌다. 그 전부가 반쪽으로 잘린 채였다.
“그냥 병사들도 이만큼 무장시키다니. 대체 어디서 다 구한 거야?”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언행.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이 만든 결과 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통로를 철통같이 가로막고 있던 방패 위로 새하얀 빗금이 그어졌다.
푸화하학!
그리고 선혈이 낭자했다.
“방패는 다 잘라 줄 테니. 알아서 날뛰라고. 대전사 양반.”
“대전사. 아니다!”
통짜 강철로 만든 방패와 그걸 든 사람까지 단번에 베어버리고도, 핏자국 하나 없는 검을 손에 쥔-.
검호 칼엘손이었다.
“맞건, 아니건…. 일단은 길부터 뚫자고!”
카르얀─! 파샨투의 돌진이 다시 시작되자, 새로운 병사들이 서둘러 빈자리를 채운다.
그 즉시 칼엘손의 검이 방패를 아무렇지 않게 잘라내고, 파샨투가 재차 전선을 밀어내듯 병사들을 밟고 달렸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왕국의 그 어떤 병사들과 비교하더라도 압도적인 교환비로 사상자를 낼 거라 자신하던 대공의 병사들이, 고작 두 사람을 막지 못하고 번번이 밀려나야만 했다.
좁고 일직선으로 된 통로 탓에 수적 이점을 발휘할 수 없다곤 하나, 그걸 감안해도 믿기 힘든 상황.
개인으로도 능히 전술적 파괴 행동이 가능하며, 수십 수백의 병사를 갈아버리는 괴물이다. 기사나, 검호와 같은 초인이 전장에서 가지는 파괴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순식간에 통로가 반쯤 뚫렸다. 그때쯤부터 병사들의 움직임이 다급해졌고, 칼엘손의 시선이 비스듬히 하늘을 향했다.
드르르륵….
도르레 소리였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 따로 해놓은 장치가 있는 건지-. 칼엘손의 시선이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속도를 내야겠군.’
저쪽에서 무슨 개짓거리를 벌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다시 물러날 수는 없는 법. 결국 칼엘손에게 남은 선택지란 더욱 빠르게 통로를 돌파하는 것뿐이었다.
조금 더 힘을 쓸 작정으로 칼엘손이 자세를 달리하려던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칸의 목소리에 소름이 바짝 돋았다.
“어이! 벽에 붙어…….”
다급히 경고하던 칼엘손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보다 파샨투가 먼저, 말없이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있던 것.
“이런 씨!”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지꺼리를 애써 삼킨 칼엘손도 파샨투처럼 벽에 몸을 붙였다. 그리고-.
──────.
‘미친……!’
통로의 한가운데를 무언가가 가로질렀다. 범인의 수준을 벗어난 칼엘손의 반사신경으로도 ‘희끄무레한 물체’로만 인식될 만큼 빠른 속도로.
표현 그대로 찰나간에 그들을 지나친 물체가, 방패를 들고선 이들을 그대로 관통하며 모습을 감췄다.
그 물체를 따라 뒤늦게 고개를 돌린 칼엘손의 눈두덩이가 충격을 머금는다.
통로를 채우고 있던 중갑병들이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갈려나간 상태였다. 아니, 흔적은 남았다. 통로의 벽에 묻은 혈흔과 바닥에 떨어진 쇳조각이 그들의 존재를 겨우 증명했다.
‘어지간한 제국 기사도 흉내조차 못 내겠군. 이건….’
왕국과 제국의 평균적인 수준 차이가 까마득한 수준임을 고려하면, 칸의 괴력은 그야말로 ‘초인’이란 말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물며 마나조차 없이….
“꾸물대지 말고 달려!”
멍하니 있던 칼엘손이 날 선 경고에 텅 비어버린 통로를 달렸다. 그때쯤 사방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처럼!
그 생각은 정확했다. 칼엘손과 파샨투가 통로를 벗어나기 무섭게 뒤쪽에서 쿵!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막 통과한 길쭉한 통로가 돌무더기에 파묻혀 있었다.
제아무리 검호인 칼엘손이라도 통로가 통째로 무너지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조금만 꾸물댔더라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돌무더기에 깔려 압사당할 뻔했음을 깨달은 그의 등줄기로 닭살이 돋았다.
“뭐, 이딴…….”
“앞! 주문이다!”
알고 있다고. 속으로 투덜거린 칼엘손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검을 휘둘러 너덧 개의 화염구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그리고 나서야 고개를 돌린 칼엘손의 시야에, 일찌감치 침입자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중장갑의 병사들과 기사, 소수의 마법사가 들어왔다. 게다가 저 멀리서, 더 많은 숫자의 병력이 실시간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무조건 앞만 뚫는다. 성안에 들어가는 게 먼저야. 투사체는….”
“내가 다 잘라주지. 접근하는 놈들이나 잘 치워라.”
“죽인다! 전부!”
전부 죽일 시간은 없소, 숙모. 칸이 서릿골의 말로 내뱉은 충고를 못 들은 건지, 크게 웃음을 터뜨린 파샨투가 냅다 앞으로 뛰었다.
[카르얀──!!]
그녀는 정말 공포란 감정을 모르는 것처럼 달려들었다.
흑익공이 선물한 도끼는 판금 갑옷조차 뚫을 만큼 뛰어난 무구였다. 실제로 중장갑의 관절부에 틀어박힌 일격은 모두가 절단에 가까운 상처를 냈다. 하지만 저항감을 아예 없앨 정도는 아니었다.
도끼를 회수하는 틈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격이 파샨투의 육체에도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수십은커녕, 백수십에 달하는 중장갑 보병을 사방이 뻥- 뚫린 공간에서 마주한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감각을 지닌 그녀라도 사방팔방에서 짓쳐 드는 공격을 전부 감당할 수는 없다.
[제법! 싸울 맛이 나는 전사들이구나─!]
그러나 파샨투는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되레 흉폭함을 더했다. 아예 창칼의 틈바구니로 몸뚱어리를 내던지며, 도끼를 마구잡이로 내리찍었다. 몇 개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하하하하─!!
‘이래서 야만인은….’
그 꼴을 뒤에서 바라보는 칸이 한숨을 삼켰지만, 그녀의 돌발 행동을 굳이 제지하지는 않았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싸움법을 압도적인 소수 쪽에서 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파샨투가 입은 상처를 흘깃 살펴본 바. 굳이 말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전부 살갗을 얕게 스친 정도의 상처뿐이야. 그 와중에 전부 흘리거나 피한 거다.’
게다가 의도치 않게 파샨투가 적의 이목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칼엘손의 접근을 잠시나마 놓칠 정도로 말이다.
“흐읍…!”
칼엘손이 날뛰는 파샨투의 등을 밟으며 뛰어올랐다.
갑자기 머리 위에 나타난 검사의 존재를 뒤늦게 발견한 병사들이 창을 찔러넣으며 대응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음이다. 칼엘손이 공중에서 팽그르르- 회전하며 착지했다.
촤좌자자작!
착지 지점을 중심으로 피보라가 몰아쳤다. 사람의 팔이나 머리 따위가 어지럽게 날아다녔고, 한 번의 검격으로 파샨투의 몇 배나 되는 사상자를 낸 칼엘손이 피 묻지 않은 검을 습관처럼 털었다.
“쯧. 영 비효율적인 검술이구만. 이건 버려야겠어.”
이전에 대공의 제1기사가 칸과의 전투에서 사용한 가문의 비전 ‘내려앉는 매’였다. 그걸 멀리서 한 번 지켜본 것만으로 완벽히…. 어쩌면 원래 주인보다 더 효율적으로 개량해 사용한 것이다.
제국의 검주들에게 직접 검호의 면허를 인정받은 존재. 천부적인 재능과 광기에 가까운 집념으로 마나의 신비를 범하는 검귀에겐, 변방의 기사 가문이 몇 대에 걸쳐 개량한 검술 따위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칼엘손조차, 저 괴물 같은 야만인의 앞에서는 연신 경악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잡스러운 벌레들이 득시글하구나. 그렇지 않으냐?]
시끄럽다.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는 드라우프니르의 입을 다물게 하면서, 검붉은 오러를 피워내는 기사의 투구를 주먹으로 짓이겼다. 그 직후 머리가 통째로 짓눌러진 기사의 시체를 꿰뚫고 나타난 검끝을 확인한 칸이 드라우프니르를 사선으로 올려쳤다.
중간에 갑옷과 검붉은 오러의 저항감 탓에 검로가 틀어지려 했지만, 순수한 근력으로 모든 저항을 쳐부쉈다.
그그그그각!
기사 둘의 시체가 똑같은 형태로 반쪽 나는 사이. 이미 칸의 신형은 뒤쪽의 다른 기사를 향해 쇄도한 지 오래였다. 똑같이 검붉은 오러로 칸에게 대항하는 놈의 머리통을 이번엔 도끼로 쪼개버린 칸이 드라우프니르를 들어서 측면을 향해 휘둘렀다.
그렇게, 순식간에 기사 넷이 죽었다.
‘양산이 가능한 대신, 깡통 1호랑 비교하면 가짜 오러가 형편없는 수준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일반적인 보병보다 훨씬 위험한 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대체 어느 정도나 양산이 가능한지도 문제고-.
‘설마…. 성안에 개미 떼처럼 깔린 건 아니겠지.’
그런 불안감을 삼키며,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모조리 치워버리며 전진하던 일행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갑자기 나타난 장애물로 돌파가 불가능해졌다거나, 예상외의 적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는…. 그런 종류의 일이 발생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대공성의 입구는 어서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문제는, 파죽지세로 나아가던 세 명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할 정도의 현상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겠지.
“이건….”
“기분 나쁜 생김새다!”
온갖 색채가 혼합된 듯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빛깔의 기류가 대공성의 대문을 기점으로 둥그렇게 회전한다. 모 게임에서 본 ‘포탈’을 연상케 하는-.
‘시발.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