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86화 (86/132)

#086화. 던전 (2)

‘미들랜드 퀘스트’는 기본적으로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지만, 캐릭터의 성장과 퀘스트 진행도에 따라서 추가적인 모험 지역과 퀘스트가 개방되는 세미 오픈월드 형식의 게임이었다.

당연하지만 미들랜드의 필드를 꼼꼼히 수색하다 보면 숨겨진 서브 퀘스트나, 돌발 이벤트와 조우하는 등의 오픈월드적 요소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메인 퀘스트는 뒷전이고 그런 이벤트만 쫓아다니는 매니아들이 꽤 있을 정도로는 말이다.

물론, 숨겨진 스토리나 이스터에그에는 별 관심이 없던 칸이야. 보상이 후하기로 유명한 서브 퀘스트 정도만 깨고서 주구장창 메인 퀘스트만 밀어대기는 했다.

하지만 던전은 극한의 스킵충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존재였다.

‘경험치도 쏠쏠하고, 운만 좋으면 고등급의 아이템을 떨구기도 하니까.’

하지만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에 와서는 ‘던전’의 존재란 칸의 스탯창처럼 영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게,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거대한 아공간에 끔찍한 괴물들이 득시글한 공간이 실존하는 건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니까.

그런데 미들랜드의 사람들은 던전, 마경의 존재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마녀의 실험으로 저주받은 땅이 그렇게 된 거라는 둥. 고대의 마법사들이 차원을 건드린 여파가 뒤늦게 발현한 거라는 둥. 제대로 아는 놈들은 아무도 없는 듯하지만 말이다.

확실한 건, 마경의 존재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걸 미들랜드의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대륙의 삼분지 일을 집어삼킨 ‘대마경’의 도래였다.

‘나중에는 그곳에서, 대악마가 강림하기도 하지….’

미들랜드에 강림한 대악마를 죽이고, 대마경을 완전히 정화하는 것이 바로 미들랜드 퀘스트의 최종장이었다.

거기서 등장한 대악마가 지껄인 대사를 통해 외차원에 기거하는 ‘옛 신’의 존재를 알게 된 덕택에, 현재 칸이 지구로의 귀환을 마냥 포기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대악마가 마경을 통해 미들랜드에 강림했다는 사실이다.

악마들은 미들랜드의 하위 차원으로 분류되는 ‘지옥’에 머무르는 것이 기본이고, 흑마법사나 악마 추종자를 통해 간접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선호했다. 마치, 만신전의 신들이 ‘천상’에서 신도들을 통해 대륙을 관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본신을 직접 강림하는 것에 따르는 대가가 엄청나기 때문이라나? 하물며 모든 악마들의 어버이라는 대악마는 어떻겠는가.

거기서 칸은 생각했다. 마경의 존재가 차원 이동의 대가를 줄여주거나, 차원 이동 자체를 가능케 하는 힘을 품었을 수도 있노라고.

그래서 한때는 대륙 변경을 쏘다니면서 마경을 클리어했었다.

‘틸리를 만난 것도…. 그때였고.’

이런 곳에서 마주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한 것과 대면한 탓일까. 갑작스럽게 밀어닥치는 상념에 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잠시 멍 때리는 사이에 일점돌파로 따돌렸던 대공의 병력이 바로 근처까지 접근해 있었다.

앞은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마경. 뒤로는 어떻게든 이쪽을 족치려고 작정한 군대가. 어느 쪽을 선택하건 몹시 위험한 상황에 처하리란 건 명정했다. 다만 칸에게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돌아갈 거라면, 시작도 안 했지.’

무엇보다, 인형술사를 비롯한 놈들에게 들어야 할 것이 남았다.

영혼을 다루는 주문의 출처와… 틸리의 존재에 대해서.

“들어간다.”

칸이 결정을 입 밖으로 꺼내고, 거의 동시에 일행이 마경의 입구로 발을 들이밀었다.

마경의 경계로 한 발자국 내디디는 순간. 육체의 감각 자체가 고장이 난 것처럼 소리가 사라졌으며, 촉각이 마비된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꼈을 때와 같이 성안의 모습이 흐릿하게 뭉개지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마경을 공략한 경험이 있는 칸이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감각의 교란이 지속된 건 그렇게 길지 않았다. 고작 몇 호흡을 가다듬은 직후에 촉각이 먼저 돌아왔고,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사지의 움직임을 확인할 때쯤에는 냄새와 소리가 정상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뭉개졌던 시야로 또렷한 상이 맺혔다.

매끈하게 다듬은 회색 석재를 깔은 복도. 금과 은으로 만든 공예품 장식들. 척 보기에도 상당한 돈지랄을 했다는 게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내부였다. 다만 벽면에 죽죽 그어진 선들이 복도의 미관을 크게 해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문제는 없나…?’

마경의 모습은 제각기 큰 차이를 보이는데, 마경의 침식으로 삼켜진 공간이 그대로 구현된 경우와 침식으로 인해 크게 변형되는 경우로 나뉘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본래 공간의 몇 배나 되는 크기로 뒤바뀌거나, 심할 때는 생명체나 물체 따위가 흉측한 촉수 괴물처럼 변형되기도 했다.

일단 당장 보이는 건 전자로 추정되지만…. 안쪽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데다가, 제대로 된 판단은 침식에 잡아먹힌 생명체들을 봐야만 가능했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변방 왕국에서 또 오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대마경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었지. 너는.”

“들어갔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겨우 입구 언저리에서 괴물을 때려잡은 정도니까. 하지만… 그것도 대단히 끔찍한 경험이었지.”

여기는 그 정도가 아니길 바라야겠지. 중얼거린 칼엘손이 검을 들고서 앞에 나섰다. 일행 중에서 마경에 대한 경험이 있는 건 자신뿐이라 판단하고, 선두에 서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칸은 굳이 칼엘손의 생각을 고치지 않고, 파샨투를 가장 뒤에 세우고 자신이 중간에 서서 대열을 완성했다.

[이상한 곳이구나. 카르얀께서 내 전투를 지켜보실 수 있을까 걱정이야.]

[이 와중에도 명예롭게 뒈질 생각이나 하는 숙모의 머리가 가장 걱정이오.]

[하하하─! 너는 전사의 시험을 통과하고도 예전처럼 어수룩한 얘기를 하는구나. 필멸자로서 마땅하게 찾아오는 죽음을, 원하는 방식으로 명예롭게 맞이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텐데도!]

‘전사의 시험 때 지겹도록 들었지.’

칸은 빙의 초기에 ‘아버지’라는 작자가 장황하게 떠들어댔던 말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죽으면 끝이지, 거기에서 무슨 명예를 찾겠소. 그것도 이역만리 땅에서 뒈지면 더 그렇지. 결국 아무도 내 죽음을 알아주지 않을 테니까.]

[잊혀지다니. 카르얀께서 우리의 숭고한 죽음을 지켜보신다. 그러니 우리는 전사로서 명예롭게 죽으려 하는 것이고.]

[…글쎄. 나는 잘 모르겠군.]

어쩌면, 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 세계가 허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 이 세계가 현실이라 생각했다면, 나름의 인연을 찾아 어딘가에 정착해 삶을 살아갔을 수도 있으리라. 끝없이 성장하는 야만전사의 육체와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명성을 드높이고 영웅이 되고자 노력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는 누군가와 깊은 인연을 맺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명성 같은 건 쓸데없는 것이라 치부하며 떠돌이 용병의 신세로 만족하며 귀환할 방법을 찾아 대륙을 떠돌았다. 그저 하염없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렇게도 생각해 보거라. 어리석은 조카야.]

[무슨 흰소리를 하려고….]

[훗날 네가 죽었을 때. 너의 친구, 연인, 부모가 너를 위대하고 숭고한 전사라 생각하며 추억할 수 있게 싸운다고 말이다.]

그 말에 대한 반박이 몇 가지나 머릿속을 오갔다. 하지만 칸은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침묵을 선택했다. 그녀의 충고를 들은 순간 떠오른 몇 얼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잡담은 그쯤하고, 이 엿 같은 복도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돌연 걸음을 멈춘 칼엘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파샨투와 칸이 꽤 긴 시간 대화를 나눴음에도, 마경의 침식으로 변이된 괴물은커녕 복도가 끝나지도 않았던 까닭.

“대공성의 복도는 미로처럼 이리저리 꼬인 게 특징이라 했잖냐. 그런데 이건….”

“똑같은 구간을 계속 걷고 있는 것 같군.”

“그래.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야!”

레븐이 보여준 평면도의 축척이 아무리 개판이라 하더라도, 이만큼 걸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건 분명 이상한 징조였다. 지금 일행이 들어선 공간이 마경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이.

칸이 주변의 장식품과 마법진의 일부로 추정되는 하얀 선을 유심히 살피며 계속 걸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걸었을까.

“확실히, 똑같은 공간이 반복되고 있다.”

그제서야 확신을 얻은 칸이 더 이동해도 의미가 없다 판단하고선 걸음을 멈추었다.

“…시발. 어째 마경치고는 얌전하다 싶었는데. 이딴 식으로 엿을 먹이는구만. 차라리 괴물 쪽이 나아. 그것들은 칼로 벨 수라도 있지.”

“흠.”

칼엘손의 짜증스런 중얼거림을 들으며, 복도의 벽을 주먹으로 퉁퉁 두들겨본 칸이 도끼를 꺼내 들었다. 대체 뭘 하려고- 칼엘손이 묻기도 전에 칸이 전력으로 휘두른 도끼가 벽을 후려쳤다.

폭탄이 터진 게 아닐까 싶은 굉음에 칼엘손이 손가락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혀를 찼다. 누가 야만인 아니랄까 봐.

“어이. 마경의 형태는 침식을 완전히 해결하기 전까지 고정된 상태가 유지된다고. 그딴 방법으로는 흠집도 안 날……. 텐데?”

칸의 무식한 돌발 행동을 타박하려던 칼엘손이 어버버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칸의 도끼가 두들긴 벽이 금이 간 유리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기사의 오러와 마법사의 주문을 손쉽게 베어내는 칼엘손조차, 마경의 불변성을 어쩌지는 못했건만. 무식하게 힘만 센 야만인의 도끼가 그 법칙을 깨뜨린 것이다.

“너, 어떻게……?”

“글쎄.”

나도 진짜 모르겠는데. 칸이 헛웃음을 흘렸다.

게임에서 그가 키웠던 캐릭터들 중에는 초월자조차 찜쪄먹는 수준의 괴물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캐릭터도 마경 자체를 힘으로 깨부수는 건 불가능했다. 단순히 게임이라서 맵을 파괴하는 행위가 금지된 걸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지옥의 악마들을 학살하고, 미들랜드의 용과 거인을 모두 잠재운 영웅들과 비교했을 때. 칸의 전력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이 분명한 바.

‘설마…….’

칸의 시선이 손에 쥔 도끼로 향했다.

일찍이 바그너의 드워프가 적당한 솜씨를 발휘해 만든 물건이었지만, 알-란자스에서 정의의 신이 직접 축복을 내리면서 완전히 다른 물건으로 변모해버렸다. 아마 게임의 등급으로 따지면 일반과 마법의 다음인 희귀 등급…. 그중에서도 꽤 윗줄에 속하는 수준일 터.

‘영웅급 캐릭터들은 전부, 전설 등급이랑 신화 등급 아이템을 둘둘 둘렀었지. 하지만….’

만신전의 상위신이 직접 축복한 무구는 모든 플레이 기록을 통틀어서 처음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정의의 신이 남긴 축복의 영향이라는 쪽의 가설이 그나마 그럴싸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 오른쪽 가슴으로 무심코 시선을 가져가던 칸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어쨌든, 자신이 마경의 불변성을 깨뜨릴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칸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걸쳐졌다.

“뭐, 뭐냐 그 불길한 웃음은?”

“뭐긴.”

“내가 생각한 그거라면 관둬라! 대체 어떤 개 같은 상황이 벌어질 줄 알고……!”

‘그거야 해보면 알겠지.’

“야, 야! 이 무식한 새끼야!”

“나도 솔직히 궁금하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칼엘손에게 대꾸한 칸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건물 벽은 종종 때려 부숴도, 마경을 부숴본 적은 처음이거든.”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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