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던전 (3)
애석한 일이지만, 마경을 정말 부술 수 있는지 확인할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을 가둬놓았던 복도의 모습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더니, 어떤 방으로 변한 까닭이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칸의 행동을 막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마경의 보스가 따로 존재하는군.’
마경을 정화하기 위해선 반드시 ‘핵’을 찾아야 했다. 핵의 형태는 특정 사물의 모습을 빌릴 때도 있고, 보석의 형태로 존재할 때도 있는데, 이따금 핵 자체가 마경의 보스가 되어 활동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형태의 마경은 대체로 난이도가 상당한 편이다. 준차원 하나를 통째로 유지하는 ‘핵’의 힘으로 만들어진 괴물을 때려잡는 거다. 쉬우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여기는…….”
“중앙홀이군. 평면도 상으로는, 복도를 통과하면 가장 처음 마주치는 장소였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복도 다음에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홀이라. 어떤 자식인지는 몰라도 꽤 고약한 취미야. 주변을 둘러본 칸이 툭 하고 감상을 내뱉었다.
성안에서 파티를 열 때에 연회장을 겸하기도 하는 중앙홀은 무척이나 넓고, 화려했다. 하지만 인기척이 아예 없는 탓에 조금 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녀석의 집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지! 그것보다는 한참 부족하지만 말이야!]
파샨투의 태평한 감상을 뒤로하고, 휑한 공간을 둘러보던 칸이 별안간 눈을 가늘게 떴다. 중앙홀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모두 넷.
좌우로는 하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서번트 홀’과 대공의 직계와 기사들이 사용하는 훈련장과 욕탕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으며, 정면의 계단과 뒤쪽의 성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
하지만 뒤쪽의 통로는 입구가 일렁이는 어둠으로 막혔다. 애초에 그 계단을 벗어나 도착한 곳이 중앙홀이니, 되돌아갈 생각도 없다마는.
“이거, 아무리 봐도 그거 같은데.”
“…뭐가 그거라는 거냐.”
“집주인이 손님을 홀에다가 불렀으면 뭘 하겠나?”
의뭉스러운 투로 중앙홀을 한번 둘러보던 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성대하게 맞이해야지. 물론, 우리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겠지만.
우우우웅……!!
그때 뒤쪽의 통로를 뒤덮은 어둠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보기에 썩 온건해 보이는 현상은 아니었던지라, 일단 물러나서 여차하면 손을 쓸 준비를 마친 일행들이 무기를 든 손을 내렸다.
“이것들은 또 왜…….”
“흠. 죽이면 되나?”
“아니, 잠깐 물어볼 게 있소.”
노골적으로 아쉬운 티를 내는 파샨투의 반응을 무시하고, 떨림이 멎은 통로 앞에 선 칸이 히죽 웃었다. 마치 어둠이 토해낸 것처럼 쏟아낸 일단의 무리들이 퍽 반가운 얼굴들이었던 까닭. 저들에게는 사신이라도 마주한 기분이겠지만.
‘기어코 따라 들어왔군.’
그들의 정체는 성의 바깥에서 칸 일행을 공격한 대공의 병사들이었다.
“대,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 이 악마의 하수인 놈!”
그때 병사들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녀석이 외쳤다. 투구에 이것저것 장식을 달아놓은 걸 보면, 귀족 작위를 가진 지휘관 같았다. 아니면 대공이 총애하는 놈이거나.
“무슨 짓을 벌이긴.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악마의 힘으로 대공성을 해괴하게 변모시킨 것 말이다!”
“악마의 힘이라….”
‘이놈은 아무것도 모르나 본데.’
나름 지위가 있는 놈 같아서 뭐라도 아는 게 있겠거니 생각했건만. 정작 하는 말이라곤, 애초에 마경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는 놈이나 떠들 법한 말 아닌가.
“어서 대공성을 되돌려놓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즉시 처형하겠다!”
“……하여간 미개한 중세 놈들 같으니라고.”
지난 몇 년간의 경험에서 미루었을 때. 중세 놈들은 잘 모르겠거나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눈앞에 두면, 그걸 이해하려는 노력 이전에 마녀나 악마부터 찾는 경향이 있었다.
눈앞의 이놈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막 대공성에 진입한 야만인이 수작을 부렸다는 얘기보단, 성의 주인이 뭔가 개수작을 부리다가 이렇게 됐을 가능성부터 의심하는 게 맞지 않겠나.
게다가 백 명이 넘는 인원으로도 겨우 세 명의 돌파를 막지 못한 놈들이, 무슨 자신감으로 처형 하겠다며 협박하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하겠군.”
이참에 대공과 관련한 정보를 미리 얻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운이 좋다면, 뜬금없이 마경의 침식이 일어난 것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테고….
일단 족치고 정보를 뜯어내자-. 그렇게 마음먹고 주먹을 꽉 쥔 칸이 미간을 좁혔다. 침묵한 채로 상황을 주시하던 칼엘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고, 그저 싸울 생각에 신난 파샨투만이 도끼를 들고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다.
“보아라! 대공께서 엘펠란의 후예들에게 하사하신, 이 위대한 힘을!”
자신만만한 태도의 지휘관이 허리에서 뽑아 든 검에서 예의 검붉은 기운이 피어났다. 이전에 상대했던 대공의 제1 기사나, 모종의 수법으로 양산한 ‘가짜 기사’들처럼. 그러나 눈앞의 얼간이가 뽑아낸 기운은 앞서 본 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위험하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저걸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그 즉시 출수를 강행한 칸의 신형이 쏜살같이 움직여 지휘관의 머리 위를 점했고, 신의 축복이 깃든 도끼가 놈의 머리통과 몸뚱어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너무나 쉽게.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 스르르- 허물어지는 시체를 발로 밀어찬 칸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끝난 병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때마침 놈들이 허리에 찬 무기에서도 검붉은 기운이 발산되는 중이었다. 마치, 공명하는 것처럼 동시에.
“이, 이게 무슨.”
정작 본인들도 당황한 눈치였는데, 칸은 저들에게 상황을 이해하거나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복잡하게 움직임을 계산할 필요조차 없었다. 제대로 반격도 못 하는 병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칸이 도끼와 마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도끼로 찍고, 마검으로 베고, 팔꿈치와 발끝을 창촉처럼 찔러넣어 내장을 짓이겼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다. 순식간에 난입한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진 가운데. 칸이 파샨투와 칼엘손을 향해 소리쳤다.
“전투 준비해!”
혼자서 다 죽여놓고 무슨 전투 준비를 하라고? 그런 질문을 할 만큼 어수룩한 이는 일행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칸이 뭔가가 일어난다면, 정말 그런 것이다. 지금껏 그가 보여준 통찰력과 직감은 대부분 정확했으니까.
실제로 칸의 경고가 옳았음이 머지않아 드러났다.
“우으으으으…….”
예의 지휘관이 뽑아낸 검붉은 기류가 저 혼자 뭉클거리며 어떤 형상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검붉은 구름이 사람의 형상을 띤 것 같은 생김새. 하지만 칸이 보기에는 꼭….
‘램프에서 나온 요정처럼 생겼구만.’
물론, 요정 중에서도 굉장히 악한 종류의 요정이겠지만.
검붉은 인간형 몸체에 이목구비의 구분이 없는 얼굴. 하지만 저 괴물이 진정 끔찍한 것은, 몸체 곳곳에서 이따금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와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는 점이었다. 생김새만 봐도 악의로 똘똘 뭉친 게 느껴진다고 할까.
“……이제야 좀 내가 아는 마경스러운 괴물이 튀어나왔네.”
“유령은 못 죽인다!”
“검으로 베서 죽일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칼엘손과 파샨투가 각자 우려를 드러냈다.
물론, 물리적 실체가 없는 영체라도 검호의 칼날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영체의 소멸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단순히 싸움을 잘 할 뿐인 파샨투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으우우우우.”
하지만 칸의 얼굴이 굳어진 건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불쾌한 존재로고.]
동감한다. 드라우프니르의 추임새 같은 감상에 이번만큼은 칸도 진심으로 공감했다.
‘인형술사. 그놈이 공도 바깥으로 인형을 보내서, 현자 노릇을 하던 것도 이런 이유였나.’
놈은 가짜 현자를 추종하는 무리들에게서 영혼을 뽑아내 인형으로 조종했었다. 그 숫자가 족히 백 명은 되었을 테고,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많겠지.
북부의 유력자들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든 건 정말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 그 많은 영혼들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그 진실의 일부가 눈앞에 있었다.
[영혼은, 그 어떤 것보다도 순도 높은 에너지라 할 수 있지.]
드라우프니르가 짐짓 웃음기 섞인 투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칸도 대충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악마들이 거래의 대가로 영혼을 수확한다는 건, 그게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란 뜻 아니겠는가.
[영혼을 연료로 삼아, 힘으로 치환하는 방식이라…. 구시대의 잔재구나. 단순하고, 난폭해. 하지만 효율적이지. 순리에 어긋나는 금술이기도 하고.]
일개 용병대장이 칸에게 잠시나마 대적할 수 있게 하는 마도구를 양산하고, 검붉은 기운을 다루는 ‘가짜 기사’를 찍어내던 것 모두. 희생자들의 영혼을 소모해 만든 것이라는 얘기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엿 같은 일들은 이미 다 꿰뚫고 있다 생각했건만.’
진리의 추종자들이 대륙 각지에서 벌이는 실험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기분이었다.
[분노하고 있구나.]
‘지랄.’
[그리고, 죄책감도…….]
칸은 시끄럽게 떠드는 마검을 아에카리스의 주머니에 처박고선 대신에 네리아의 마법 송곳을 쥐었다.
이 염병할 미들랜드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의와 재앙은 개인이 막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제아무리 오우거와 힘을 겨루고, 와이번을 참살한 전사라 해도 몸은 하나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제국의 황제가 알아서 했겠지.
애당초, 평화로운 세계의 배불뚝이 회사원이었다가 강제로 망겜의 야만전사가 된 처지 아닌가. 평생 불행했던 인간은 자신이 불행한 줄도 모르고 산다. 하지만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던 인간은, 약간의 불행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을 느끼는 법이다.
‘나보다 억울한 인간이 어딨다고.’
평생을 낙원에서 살다가, 지옥에 떨어진 인간…. 칸은 스스로의 처지를 그렇게 여겼다.
그렇게 잠깐의 사색을 거치는 사이.
지휘관의 무구에서 생겨난 가장 거대한 영체를 필두로, 병사들의 것에서 나온 조금 작은 크기의 영체들도 저마다 형체를 갖췄다. 이제는 스물에 달하는 영체가 질러대는 비명이 중앙홀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우우우우!”
그때 가장 거대한 영체가 사람의 울음소리를 연상케 하는 소리를 냈다. 성대는커녕, 입도 없는 놈이 어떻게 그런 소리를 냈는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
“딱 봐도 싸우겠다는 거지? 저거.”
그렇게 묻는 칼엘손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눈구멍도 없는 영체들의 시선이 느껴질 리는 없지만, 칼엘손은 영체들이 이쪽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단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이쪽을 원수로 여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맹목적이고 깊은 적의가 담긴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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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침묵하는 원혼들의 비명에 입장했습니다.]
─플레이어 목표 : 핵을 찾아 회수하라.
─성공 보상 : ???
─실패할 시, 마경의 침식이 가속하며 실체를 가지게 된 ‘핵’이 던전을 벗어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