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던전 (4)
“대체,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가…!”
병사들에게 이끌려 외성 구역의 어디론가 향하던 리브론이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양팔을 잡아끄는 병사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뭐지? 뭐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는…….’
당장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딱히 없는 형편이다. 애초에 조금만 있으면 그 무식한 놈들이 내성에서 날뛸 테니, 이쪽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질 터. 그런데 병사들의 모습에선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급박함마저 느껴졌다.
다시 말해, 몹시 수상쩍어 보인다는 뜻이다. 리브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약, 그를 호위하는 이들이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그들을 피해 도망쳤으리라.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저희는 바깥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병사들의 인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외성 구역에서도 한미한 자리에 지어진 주택이었다. 사람의 손을 탄 지 상당한 오랜 시간이 흐른 듯,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외관. 그야말로 유령 저택이란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 인간이 자신을 이런 곳에 데려올 이유가 있나?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파고들었지만, 리브론은 의연한 태도를 꾸며낸 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문이 비명을 질렀다. 연이어 펼쳐진 황량한 정원의 풍경이 꼭 마녀의 정원을 연상케 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군, 진심으로. 리브론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저택의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안쪽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났다. 뭐가 그리 급한지,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문밖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리브론은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내리며, 직접 문을 열었다.
“헤, 헤른 자네! 정말 살아있었구먼!”
반응도 못 하고 껴안긴 리브론이 얼굴을 찡그리며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를 껴안아 버린 오랜 지인은,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의 생환을 더 확실하게 하겠다는 듯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답답해 죽겠소.”
“주, 죽으면 안 되지. 자네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데!”
최근에 너무 험한 일들에 엮여서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 변함없이 얼간이스러운 말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격이 떨어져 보인다 생각했던 두툼한 살집이 푸근해 보이는 걸 보면, 정말 자신이 이상해진 걸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뵙소. 에르몽 자작.”
레븐이 말한 협력자의 정체는 바로, 이웃 도시의 시장으로 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귀족. 에르몽 자작이었다.
*
*
*
“크흥. 정말 다행이야. 자네가 알-란자스에서 실종됐단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심지어 전 성기사한테 당했다면서…?
누가 들을까 속닥대는 에르몽 자작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여실했다. 바깥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으려는 통에, 겨우 그를 진정시키고 대화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성기사와 관련한 건 소문일 뿐이라고 성 쪽에서는 말했지만,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귀족들의 심기가 많이 불편한가 보군.”
“당연히 그렇지. 나야 물론 자네가 잘돼서 기분은 좋았지만, 대공이 우리를 홀대한 건 사실이지 않나? 강제로 자기 밑에 집어넣고는, 물자를 대가로 병력을 강제로 갈취해간 셈이니…. 안 그래도 분위기가 흉흉했어. 그런 와중에 괴상한 소문까지….”
“그런 때에 레븐…. 정보 길드가 접촉했겠고. 내 추측이 맞소?”
에르몽 자작이 고개를 주억였다.
“나야 자네가 그쪽이랑 손을 잡았다길래….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싶어서 받아들였지. 덤으로 다른 귀족들에게도 내가 말을 걸어봤네.”
“…귀족들에게 말을 걸어봤다니. 어떻게?”
“안 그래도 다들 불만이 많지 않나? 그중에서도 나처럼 겉도는 양반들 위주로 접촉을 해봤네. 정보 길드에서 알려준 정보들을 귀띔해주면서 적당히 어울리기만 하면 된다니까. 다들 덥석 받더라고.”
“이런.”
혼자였다면 이마를 짚고 탄식했을 소리였다. 그걸 고분고분 받아들인 건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귀족을 어떻게 믿고 그런 얘기를 쉽게 떠벌린단 말인가.
만약, 그들이 대공에게 보고를 올렸다면….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다.’
안 그래도 다분히 서두르는 기색이 강했던 대공이다. 물밑에서 귀족들이 작당 모의를 벌이고 있다는 게 그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어떤 돌발행동을 저지를지….
“접촉했던 귀족들은 어디에 있소.”
“각자 저택에서 몸을 사리고 있을 걸세. 일이 터지면 바깥의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테니, 그 틈을 타서 공도의 민심을 장악하라고….”
“미치겠군.”
“왜, 왜 그러나. 갑자기?”
“본인이 말하고도 모르겠소?”
에르몽 자작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이 바짝 들 만큼 차가운 물이 필요해졌다. 아니, 차라리 독한 술이 낫겠어…. 리브론은 답답한 속을 달래듯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괴물들이라면, 정말 대공을 암살할 수도 있겠지. 설령 실패한다고 한들, 공도의 민심이 대공에게서 돌아설 것은 명정한 바.’
성에 침투한 이들의 면면 때문이다.
한 명은 용병조합의 총지부장이고, 또 한 명은 왕의 종친인 흑익공이 총애하는 야만전사다. 그의 반란이 적어도 대륙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정치에 어두운 시민들조차 실감할 수밖에 없는 이름들.
거기에 알-란자스의 베르타 경까지 있다. 그녀가 만신전 교회의 총의를 대변한다 할 수는 없겠으나, 성기사가 대공을 적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심은 크게 동요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공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휘하의 귀족들과 무장 군벌들도 돌아서겠지.’
귀족이란 지배하는 자다. 하지만 그 힘은 결국 피지배자들의 자발적인 협조에서 비롯되는바. 민심이 돌아서면, 공도는 알아서 붕괴하게 될 터.
‘대공이 실각한다면….’
대공은 후작이라 불리던 시절에도 북부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그런 권력자가 사라진다면, 북부는 필연적으로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혼란은 새로운 기회를 낳을 테니. 그 기회는 대공의 실각에 기여한 만큼 주어지게 되겠지.
“움직여야 해.”
“움직인다고? 어디로? 공도를 벗어나잔 말인가?”
“아니, 우리는 공도에 남을 것이오.”
리브론…. 아니, 헤른의 눈이 열망으로 번들거렸다.
‘작은 도시의 시장이, 반란 국가의 수뇌부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몰랐겠지.’
기호지세다.
대공의 눈에 띄어 궁중백이 되고, 참수자에게 납치당해 공도로 잠입한 순간부터. 헤른에게 평범한 삶이란 더는 고를 수 없는 선택지가 돼 버렸다. 가만히 사태가 해결되기를 기다려봤자, 중요 참고인으로서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나 하겠지.
“다른 귀족들이 머무르고 있는 위치들…. 아는 게 있다면 전부 알려주시오.”
어쩌면 자신의 이런 행보조차도 참수자가 의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상할 정도로 간악한 그 야만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하지만 헤른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게, 내가 되어도 상관은 없겠지.’
그렇게 헤른이 새로운 야망에 눈을 뜬 순간.
────────!!!
마치 머릿속에 직접 내지르는 듯한 끔찍한 비명. 기이한 것은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걸 비명이라 인식하고 명백히 들었다고 감각이 느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공도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동시에 그 소리를 들었다.
“흐이이익!”
에르몽 자작이 새된 소리와 함께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헤른은 놀라울 정도의 침착함으로 두 다리를 창가로 이끌었다.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댔다. 하지만 싸늘하게 식은 이성이 어서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라 외쳤다.
덜커덩. 뻐걱!
삐걱대는 창을 힘을 주어 억지로 열었다. 낡은 창틀이 기어코 부서지고 말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민 헤른의 고개가 부러질 듯 꺾여 저 멀리 있는 대공성을 향한다.
“……!”
헤른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대체 무얼 본 건지 눈동자가 경련이라도 하듯 떨렸고, 주먹은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이 하얗게 질렸을 정도였다.
“대, 대체 뭐가……. 흡!”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르몽 자작이 엉거주춤 헤른의 뒤에 섰다. 그리고 헤른과 똑같이 대공성을 보고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우, 움직여야 해. 빨리…!”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대공성을 바라보던 헤른이 발작하듯 외쳤다.
에르몽도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듯, 난생처음으로 눈치를 발휘해 헤른을 다른 귀족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로-엘펠란의 상징과 긍지였던 성을 검붉은 안개가 집어삼키고, 그 위로 떠오른 수천, 수만의 얼굴이 끊임없이 비명을 내지르는 꼴을 본 이상.
‘신이시여.’
에르몽 자작은 일평생 찾아본 적 없는 만신전의 신들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바랐다.
‘부디, 공도의 모두를 구하소서.’
*
*
*
“끝이. 없다!”
영체 하나를 도끼로 흩어버린 파샨투의 호흡이 무척 거칠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끼로 영체의 형태를 일순간 흩어버릴 수는 있어도, 영체를 아예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그 반대는 가능했다. 영체의 손톱은 조금이라도 닿는 순간 살갗을 찢어버릴 만큼 날카로웠고, 이따금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물리력까지 지녔다.
“큭!”
허리에 얕은 자상을 허용한 파샨투가 비틀거렸다. 자세가 무너질 정도의 상처가 아니었음에도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이 그녀를 덮친 탓이었다.
고통을 두려워 않는 야만전사가, 고통에 움직임을 멈출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이를 악물어 금세 정신을 되찾긴 했으나, 그사이를 노린 또 다른 영체가 그녀의 배후에 나타났다.
‘위험…!’
반응은 했다. 하지만 대응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그에 차라리 몸으로 받아내고서 공격에 나서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고통 때문에 겁을 먹은 게 아니었다. 소름 끼치는 검기가 그녀의 주변을 쓸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좀만 버티쇼!”
순수 인간의 속도라고는 믿기 힘든 움직임으로 당도한 칼엘손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또다시 검격을 흩뿌렸다. 찰나 간에 쇄도한 십수 개의 참격이 영체들을 휩쓸었다.
“우오오오오…!”
그때 영체들의 우두머리쯤 되는 거대한 놈이 울음소리를 흘렸고, 흩어졌던 영체들이 다시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파삭!
그 입을 닥치라고 말하는 것처럼 네리아의 마법 송곳이 거대한 영체의 머리통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영체들은 이미 수복을 마친지 오래였고, 거대한 영체 또한 아무렇지 않게 형체를 수복했다.
이러한 상황이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반복됐다.
‘…답이 안 나오는군.’
마법 송곳을 거두며 물러난 칸이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자신 같은 전사에겐 최악의 상성을 자랑하는 것이 영체인데, 마경의 영향인지 일방적으로 물리력까지 행사해댔다. 더 최악인 점은, 네리아의 마법 송곳에 각인된 주문으로도 영체를 죽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주문도, 검호의 참격도, 순수한 물리력도 전부 안 통하면. 대체 뭐로 죽이라고?’
이래서 마경이 최악이다. 안 그래도 까다로운 괴물도 마경의 안에서는 더욱 까다롭게 변모하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이 마경이란 공간은 언뜻 불합리하게 보여도, 확실한 돌파구가 하나쯤은 존재했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지.
생각해라.
거대한 영체의 머리통을 도끼로 쪼개고, 마법 송곳의 주문으로 몸통을 완전히 찢어놓으며. 칸은 스스로의 내면에 침잠했다.
‘죽이지 못하는 적이 등장하는 던전은 종종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정해진 오브젝트를 파괴하거나, 몬스터가 등장하는 구역을 벗어나거나, 핵 자체를 파괴하거나…….’
그중에서 두 번째는 이미 시도해본 지 오래였다.
눈앞의 괴물을 열 번쯤 죽였을 땐가, 계단을 통해 도망치려고 했지만 검붉은 어둠에 막혀 실패.
세 번째는 던전의 보스를 처치해야 하는데, 보스가 이 공간에 없으니 불가능.
그나마 남은 건 첫 번째인데….
‘싸우면서 이것저것 다 부숴봤지만 딱히 반응은 없었다.’
첫 번째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럼 대체 뭐가 정답이지?’
이제는 너무 옛날이라 희미해진 던전의 기억들을 되살린 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아무리 걸어도 똑같은 구간을 반복하는 복도. 그걸 칸이 강제로 부숴서 탈출하려고 하자, 던전의 보스는 일행을 중앙홀에 강제로 전이 시켜버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칸에 의해 마경의 불변성이 무너진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때는 스스로의 특수성 때문에 대충 납득하고 넘어갔지만….
‘설마.’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린 칸이 영체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연히 거대한 영체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뒤따랐지만, 칸은 더 이상 놈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네리아의 마법 송곳을 아에카리스의 주머니에 넣고, 대신 드라우프니르를 꺼냈다. 자신을 왜 집어처넣냐며 떠드는 원념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마검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이! 갑자기 뭐 하는 짓이냐!”
[전사는 등을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때 칼엘손과 파샨투가 다급한 목소리로 칸을 찾았지만, 칸은 그것도 무시했다.
‘싸움밖에 모르는 작자가 어째 멀쩡한 소리를 한다 했더니. 그때부터 의심하지 못한 내 실책이군.’
거대한 영체가 칸을 덮쳤다. 그뿐만 아니라 파샨투와 칼엘손이 맡고 있던 잡스러운 영체들까지 칸의 등에 올라타서는 그를 마구 할퀴었다.
손톱이 닿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머리를 하얗게 마비시켰다. 그러나 칸은 웃었다.
웃으면서, 스킬을 발동했다.
[끓어오르는 힘]
영체들이 물리력을 행사하면서 칸의 움직임을 방해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를 막으려면 옛적에 멸종했다는 거인이라도 나서야 할 터였다.
모든 방해를 힘으로 찢어버린 칸의 검격이 중앙홀 바닥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
쩌저저저정-!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던 영체들과 함께 싸웠던 파샨투와 칼엘손의 모습이 깨진 유리처럼 갈라지고 흩어진다. 그리고 검이 틀어박힌 바닥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균열이 공간 전체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네놈.”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 짐짓 유쾌해진 기분을 침착하게 가라앉힌 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자 낯선 얼굴이지만, 익숙한 눈빛을 한 인형이 화려한 옥좌에 앉아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벗어난…….”
“진부한 대사는 됐고. 이번에야말로 경험치로 바꿔주마.”
이 유사 인간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