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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89화 (89/132)

#089화. 던전 (5)

“마경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환상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실제로는 이런 느낌이군. 흑마법사들이 애용하는 정신계 주문은 비교도 안 될 정도야.”

쩌엉─!!

짧게 읊조리며 맹수와 같은 돌진으로 인형술사를 덮친 칸의 도끼가 장벽을 두들겼다. 이전에도 놈이 선보였던 바가 있는, 빠른 술식 전개와 비상식적인 내구도를 자랑하던 장벽이 무참하게 박살 났다.

그때와 비교해서 칸이 강해진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 미리 전개해둔 술식을 펼친 것뿐이거나, 그때 사용한 수법을 봉쇄당한 모양이지.’

이미 한 번 싸웠던 상대다. 아니, 게임에서의 경험까지 합치면 수십 번도 더 넘게 싸웠겠지. 그런 놈의 수법을 파악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공격은 적색 주문 위주로, 거리가 좁혀진 상태에선 충격파를 쏜다. 후자는 게임에서 본 적이 없는 패턴이나, 대충 전조는 읽을 수 있었다.

놈이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을 이쪽을 향해 펼치는 순간, 칸이 옆으로 뛰었다. 펑!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충격파가 때렸고, 칸이 재차 도끼로 놈의 목을 노렸다.

쾅─!

그러나 애꿎은 옥좌를 박살 내는 데에 그쳤다.

“볼 때마다 새로운 재주가 튀어나오는군.”

회색 주문인 ‘아룬의 바람 걸음’을 이용해 뒤로 도약하는 인형술사의 움직임은, 도저히 주문쟁이의 그것이라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다. 기사 같은 초인은 아니어도, 잘 단련된 전사에게나 가능할 법한 과격한 회피.

그 말에 인형술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얼굴 위에 조소를 띄웠다.

“그에 반해 네놈은 발전이 없구나. 무식하게 달려드는 것 말고는 말이다. 설마…. 그 무식함 때문에 환상이 깨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마는.”

인형술사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상식적으로 대뜸 벽을 부술 생각은 안 할 텐데. 무지에서 나오는 변수를 상정하지 못한 게 실수였나? 하긴…. 상식이 통하는 놈이라면, 몸뚱어리 하나만 믿고 이곳에 들어오진 않았겠지.”

“주문쟁이 하나 족치는 데, 뭐가 더 필요한가?”

이미 한 번 뒈진 놈 주제에.

칸이 낮게 읊조린 말에 인형술사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안광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아니, 진짜 나오잖아.’

인형술사의 눈두덩이에서 검붉은 귀화가 피어오른다. 설마 그사이에 리치로 전직했을 리는 없고.

“침식에 잡아먹혔군.”

“진정한 진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 외치는 놈에게선 진득한 살의가 묻어나왔다. 이성으로 판단해 분노를 연기하는 게 아닌, 진짜 감정에서 비롯된 살의였다.

“보아라! 이 몸은 호문쿨루스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났으니!”

칸은 저 혼자 떠들어대기 시작한 인형술사를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탐색했다.

마경의 침식에 잡아먹힌 생명체들은 자아를 상실하고, 마경의 의지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놈은 분명한 자아를 갖고서, 칸을 적대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래 보이는군.’

마경에 잡아먹힌 건 확실해 보였다. 저 검붉은 귀화가 그 증명이리라.

확신하건대, 놈의 저 분노나 살의조차 마경에 의해 만들어진 감정일 터.

진짜 인간이 되고자 발악하던 호문쿨루스의 정해진 말로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놈은 감정을 갖게 되었으나, 타의에 의해 조작된 감정에 휘둘리는 인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형술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어렵겠어.’

“흐흐. 네놈들의 수작질에 분노한 대공이 마법진을 제멋대로 운용했을 때는 어쩌나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되었지. 이렇게 나는 비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 대공이란 놈은 어쩌고? 동맹 아니었나?”

“동맹? 그 어설픈 놈과 이 몸이 동맹을 맺었다고? 웃기는 소릴!”

인형술사는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놈은 반쪽짜리다. 마법사로서의 성취도 그렇지만, 지배자로서도 반쪽짜리지. 저가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에 멸망한 국가의 뒤꽁무니나 쫓으면서, 자기가 진짜 왕이라도 되는 줄 알더군! 우스울 뿐이야. 하지만…… 동맹으로서의 예우는 다했다.”

“예우?”

“그래. 녀석은 북부를 오로지 엘펠란의 후예들을 위한 땅으로 삼으려 했다. 그 외에 인간들은 쓸모가 없다 여겼지. 그래서 공도의 인간을 모두 영혼 없는 껍데기로 만들 생각을 품었고, 그러기 위한 마법진을 발동했지.”

하지만 마법진이 공도의 인간들을 집어삼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됐다면, 굳이 쥐새끼처럼 공도에 숨어들 필요조차 없었을 터.

마법진이 발동되는 순간에, 이변이 발생한 거다.

‘마경……!’

“그 마법진의 영향으로 침식이 벌어진 거냐?”

“글쎄….”

인형술사가 말끝을 흐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이죽이는 말투와 입매에, 칸이 내심 혀를 찼다. 더 뜯어낼 수 있었는데.

“분명한 건, 우리의 대공께서도 이 땅을 오로지 엘펠란인이 살아가는 땅으로 만들겠다는 본인의 목표를 이뤘다는 거지. 아니, 이뤄가는 도중이라 해야 하려나……. 뭐, 잡담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네놈의 동료들도 정신을 차린 듯하니.”

“크으윽…….”

[다 죽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칼엘손과 대체 무슨 환상을 본 건지 살벌한 소리를 지껄이며 벌떡 몸을 일으키는 파샨투를 비웃음 섞인 얼굴로 흘긴 인형술사가 검붉은 귀화를 더욱 키우며 말했다.

“솔직히, 네놈에게는 매번 놀라고 있다. 불에 타오르는 와중에도 싸우는 집념이나, 기어코 대공의 계획을 방해한 것이나, 차원 자체가 보여주는 환영을 자력으로 깨뜨린 것이나…. 고작 셋으로 날 어찌 해보려 하는 점이나─!”

점차 고조되는 말투에 호응하듯 안광의 귀화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고, 이내 놈의 육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리고 검붉은 불꽃에 휘감긴 놈의 몸뚱어리가 높은 천장을 뚫어버릴 기세로 커졌다. 어찌나 거대한지 한 눈에 담기 힘들 지경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 이건.”

“어떻게 돌아가기는.”

칸과 마찬가지로 환상에 잡아먹혔다가 깨어난 칼엘손이 대뜸 등장한 불의 거인을 보고선 중얼거린 말에 칸이 답했다.

“중간 보스전이다.”

그 말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면서, 대충 뉘앙스만은 어찌 알아들은 파샨투가 콧김을 내뿜으며 도끼를 쥐었다. 아니, 그냥 싸우고 싶을 뿐인 건가.

“카르얀이시여─!”

이쪽에 관심도 없을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돌진하는 파샨투의 모습은. 고대 거인들을 상대로 목숨을 바쳐 투쟁하던 전사들을 닮아 있었다.

[가. 소. 로. 운!]

불의 거인으로 변하면서 지능이 퇴화한 건지, 어눌한 말투로 포효한 인형술사가 주문이 아니라 주먹을 내리쳤다. 자세도 불안정하고, 여러모로 엉성한 주먹질이지만 오우거를 연상케 하는 크기와 전신에 휘감은 검붉은 불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제아무리 파샨투라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는 말이다.

다행히 환상에서 벗어난 뒤 깨어난 공간은 무척 넓었다. 옥좌 같은 게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이곳이 알현실이겠지.

‘대공은 어쩌고, 놈이 알현실에 박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한가하게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인형술사의 주먹이 애꿎은 바닥을 두들기는 사이, 마검과 도끼를 든 야만전사와 제국의 검호가 좌우로 갈라졌다.

도약을 이용한 횡이동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힌 칸의 도끼가, 거인이 내지른 팔에 내리꽂혔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육체는 언뜻 보기엔 영체처럼 물리적 실체가 없어 보였지만, 도끼가 파고들 때의 감촉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저항이 거세고, 화끈할 뿐이지.

콰드드득!

불의 거인이 분노인지, 비명인지 모를 포효를 토했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만큼,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건지. 반대쪽 팔을 발작적으로 휘둘러 칸을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칸은 이미 예상했다는 것처럼 뒤로 잠깐 물러난 지 오래.

[전투 예지 (B) - 01%]

─오로지 전투 상황 속에서 발동한다.

가장 최근에 획득한 스킬, 전투 예지의 덕택이다.

처음 스킬을 각성할 때처럼 수많은 미래를 엿보고, 시뮬레이션 끝에 최적의 선택지를 골라내는 건 불가능했다. 아마 맛보기 보너스 정도로 보여준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 상황에서 몹시 효용성이 높은 스킬임에는 이견이 없었으니.

본능의 경종을 따라 여유롭게 회피한 칸이 제자리에서 한 호흡을 골랐다. 여기서 당장 자신이 달려들 필요가 없다는 걸, 그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으. 으. 윽!]

비명을 지르며 주춤 물러나는 거인의 옆구리에 길쭉한 선이 그어졌다. 아마 인간으로 친다면 폐부에 구멍이 뚫렸을 만큼 깊숙한 상처. 그때 모습을 다시 드러낸 칼엘손의 검이 번쩍- 섬광을 뿜으며 사라졌다.

또다시 거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기존의 상처 위로 선을 덧그리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일격을 출수한 칼엘손이 칸에게 시선을 보냈다.

“파샨투!”

“으하하하…! 피가 끓는구나!”

두 야만인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인을 향해 쇄도했다.

둘 다 오크와 비교해도 될 만큼 커다란 덩치를 가졌지만, 서릿골의 늑대들처럼 표홀하고 가벼운 몸놀림을 자랑했다. 순식간에 거인의 발치까지 당도한 파샨투가 두 자루 도끼를 이용해 참격을 쏟아냈다.

스탯의 힘으로 초인적인 근력을 손에 넣은 칸이나, 검호인 칼엘손처럼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범인을 아득히 능가하는 야만인의 육체와 전투 감각으로 거인을 농락하는 건 가능했다.

거인의 팔과 다리를 기민한 움직임으로 회피하며, 얕은 상처를 누적시키는 파샨투의 전투법은 거인이 된 인형술사에겐 날파리처럼 성가실지언정 대단히 위협적이진 않았다.

그걸 판단할 이성 정도는 남았는지, 거인이 칸을 향해 주먹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다.

[제법 뜨겁지만, 서릿골의 혹한 만큼 고통스럽진 않구나─!]

야만전사는 마나를 다루지 못하지만, 마석을 써서 마도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약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물론, 대다수의 야만전사들은 마도구를 선호하지 않지만….

흑익공의 대전사인 파샨투는 달랐다. 그녀는 흑익공에게 패배하면서, 그의 휘하에 머무르는 조건으로 마도구를 활용한 전투법을 익혔다.

흑익공 또한 본인이 총애하는 대전사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었다. 그녀가 든 도끼부터가 진귀한 서부 대산맥의 철을 사용해 만든 무기였고, 그 외에도 흑익공은 북부로 홀로 떠나는 대전사를 위해 상당한 위력을 지닌 유물을 하사했다.

‘하늘을 떠받치는 자의 정수’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아름다운 보옥 같지만, 실상은 고대의 마법사들이 회색 마법의 정수를 때려박은 아티팩트였다.

제자리에서 거인의 무릎 깨까지 펄쩍 뛰어오른 파샨투가 잿빛 기운에 휘감긴 주먹을 뻗었다.

퉁……!

고대 거인의 일격조차 떠받칠 수 있는 힘이었다. 인형술사가 끔찍한 비명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고, 칸이 오른발로 진각을 밟으며 도끼를 쥔 팔을 뒤로 당겼다.

[투척 (B) - 98.9%]

여신의 신성을 품은 도끼가 거인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그대로 관통해 알현실의 벽에 박혔다. 그리고 본래 거인의 머리를 이루고 있던 검붉은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해 흩어졌다.

쿵…. 쿵!

머리를 잃은 거인이 천천히 허물어진다.

파샨투의 일격으로 꺾인 무릎의 반대쪽 무릎이 땅과 맞닿았고, 머리를 잃은 상반신이 엎어지며 사방으로 용암처럼 끈적한 피를 쏟아냈다.

그리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죽었다고 생각할 법한 꼴이지만,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여긴 마경이고, 마경에선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으니까.

“…….”

칼엘손도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 침묵하며 검자루에 손을 올려놓고 상황을 주시했다.

하지만 주위의 눈치나, 신중함 따위는 태어날 때부터 내던진 종족이 하나 껴있었으니.

“죽였다─!”

그쪽은 그럴 줄 알았지.

파샨투가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는 모습에 칸은 체념 섞인 웃음을 흘렸다.

인형술사의 시체라고 해야 할 검붉은 불꽃과 용암이 꾸물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불의 거인의 축소형 같은 괴물이 되어 넓은 알현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그 숫자가 수십을 넘어 세 자리에 달했을 때. 이미 뒈졌다고 생각한 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완전해졌다──!]

“2페이즈는 잡몹 패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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