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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90화 (90/132)

#090화. 던전 (6)

주문쟁이 특유의 냉철한 이성이 터럭조차 남지 않은 지금의 인형술사는, 마경의 힘에 잡아먹힌 이성체의 말로가 얼마나 끔찍한지 보여주는 표본과도 같았다.

주문쟁이로서의 본질조차 상실한… 오로지 마경에 침입한 외적을 격살한다는 목적만이 남은 괴물.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적어도 놈은 ‘인형술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힘을 뽐내었다.

바로 곁에 생성된 개체를 처리한 칸이 경험치 바를 흘겼다. 꿈쩍도 안 하네.

‘끝내주는군.’

발 디딜 틈조차 애매할 정도로 생성된 작은 거인들 전부가, 인형술사의 일부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무협지에선 의식을 두 개로 나누는 무공더러 초상승의 무공이니, 대 무당파의 양의심공이니 잔뜩 치켜세워주는데 이놈은 무려 세 자릿수에 달하는 분신을 동시에 조종하고 있었다.

‘염병할 판타지.’

마법이니, 신의 기적이니, 아무튼 판타지니까 괜찮다느니….

너무나도 간단하게 개연성을 죄 무시해버리는 세계관이 바로 판타지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인형술사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끔찍한 괴물들이 미들랜드 전역에서 날뛰는 미래가 확정적으로 찾아올 거란 사실이다. 현시대까지 생존한 용의 후예, 고대의 거인, 미들랜드에 하나둘 강림하는 악마와 황제의 죽음과 함께 족쇄를 벗기 시작하는 초월자들….

하나만 나타나도 미들랜드 전역이 파탄 날 정도로 위험한 존재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오는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 지구로 귀환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란 말이다.

‘그때가 되면, 원치 않아도 살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칸에게 있어 이번 북부행은 몹시 중요했다.

아니, 중요해졌다.

다르킨에게 용의 비늘을 넘겨준 존재. 살아있는 존재의 영혼을 추출하는 출처불명의 비술. 의뭉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과거의 인연. 갑자기 발생한 마경의 침식…. 앞으로 나아갈수록 드러나는 새로운 편린들이,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예기치 못한 상황이, 어느샌가 생겨난 모종의 직감이, 칸으로 하여금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소리치는 듯했다.

‘그전에……. 마경을 깨부수는 게 먼저겠지.’

*

*

*

인형술사의 2 페이즈는 칸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성이었다.

놈을 마지막으로 전투가 끝난다면 모를까. 아직까지 진리의 추종자이자 대공의 고문 마법사인 아쉬스도 보이질 않았고, 마법진을 발동하는 것으로 침식을 일으킨 원흉인 대공 본인도 처리하지 못한 까닭이다.

‘무엇보다, 인형술사의 기억에서 본 ‘알파’라는 놈…….’

여전히 그때의 기분이 생생했다.

모든 게 정지된 시간 속에서, 놈과 눈을 마주쳤던 그때.

‘뭔가 있는 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자신을 ‘주시’한 놈이다. 그것만으로도 놈의 이상성은 충분히 증명된 바. 칸은 그 ‘알파’라는 놈에 의해 침식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지대하다고 보았다.

방아쇠를 당긴 건 마법진을 발동한 대공이되, 침식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알파’라는 개체가 지닌 무언가 때문이라고 말이다.

[타죽어라──!!]

이미 몇 번이고 써먹은 패턴의 등장에 칸이 기계적으로 손을 뻗어 대응했다. 목이 잘려서 허물어지던 분신체의 몸이 부글부글 끓는 순간, 거리를 벌리며 ‘수호의 성역’을 작게 펼쳤다.

오른쪽 가슴께에 자리한 ‘심원의 성흔’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 것과 분신체가 자폭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검붉은 화염이 순백의 방패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사이. 파샨투가 뻗은 회색의 주먹이 분신체들을 짓이겼다.

“얼마 안 남았다!”

분신체의 자폭을 참격을 쏟아내 형체조차 남기지 않는 것으로 막은 칼엘손이 외쳤다.

어지간한 운동장과 엇비슷한 크기의 알현실을 가득 채웠던 분신체들의 숫자가 절반도 넘게 줄어든 시점.

[나는 완전하다…! 나는. 불멸이다──!]

그 대사는 아웃인데.

어느새 방패를 거두고 한 번의 검격으로 분신체를 셋이나 갈라버린 칸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심코 농담을 중얼거릴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다는 의미다.

확실히, 잡몹 패턴은 유리대포인 그에게 최악의 상성이 맞았다.

만약 이 자리에서 싸우는 게 칸 혼자거나, 바그너에서부터 함께한 일행들이었다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었다.

‘진짜 초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초인 전력으로 분류하기에는 충분한-.

범인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난 무력의 소유자들.

투쾅──!!

대공이 하사한 아티팩트를 활성화한 파샨투의 파괴력은 칸이라도 섬찟할 정도였으며.

서걱.

검호인 칼엘손은 칸조차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살상력과 압도적인 검술을 시시각각 뽐내었으니, 그의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분신체의 숫자가 뭉텅이로 줄어들었다.

“차라리 하나였을 때가 더 까다로웠다. 이놈은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냐?”

기어코 혼자서 절반 이상의 분신체를 썰어버린 칼엘손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칸의 옆에 섰다.

칼엘손이 말한 대로.

분신체로 나뉜 순간부터는 구태여 칸이 나설 필요가 없어졌다. 그나마 거인일 때는 압도적인 크기와 질량으로 압살하기라도 했지. 인간과 비슷한 크기로 작아진 분신체들은 큰 위협조차 되질 못했으니까.

[흐. 더 만드는 건 못하는 거냐? 이제야 몸이 좀 달아올랐단 말이다!]

콰광! 쿵─!

그 많던 분신체도 이제는 손에 꼽는 숫자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아티팩트의 힘을 마구 발산하는 파샨투에 의해 머지않아 소멸할 터.

[나는….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듯, 입을 열 때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인형술사였다. 전투 패턴조차 단순하기 그지없었던 걸 생각하면, 이제는 ‘인형술사’라는 정체성마저도 상실한 모양.

[완전한…. 인간이 되었…….]

차라리 로-엘펠란 외곽에서 ‘가짜 현자’를 연기하던 때가 더 까다롭고, 위협적이었다.

그때의 인형술사는 스스로가 준비한 전장으로 일행을 유도한 뒤. 압도적인 화력의 적색 주문과 시전 시간이 제로에 가까운 엄청난 강도의 방어 주문, 무형의 충격파까지 다루며 칸을 위기로 몰아넣을 정도였지 않았나.

‘마경의 침식이 되레 놈한테는 독이었던 건가.’

아니, 그토록 바라던 감정을 잠깐이나마 경험해봤으니. 놈도 제 목표를 이루기는 했군. 칸은 검붉은 불꽃이 걷히고 인간 형태의 껍데기가 드러난 인형술사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는. 가짜가 아니야……!”

이제 혼자만 남게 된 인형술사에게선, 열화처럼 타오르던 검붉은 불꽃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 페이즈의 잡몹 패턴으로 가진 힘을 전부 소진한 것이리라.

본래 계획은 놈을 족쳐놓은 뒤에 진중한 대화 과정을 거쳐서 이런저런 정보를 토해내게 할 작정이었건만. 서릿골 방식의 설득이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한들, 상태가 이래서야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

쩌억.

놈이 뭐라 떠들기 전에 칸의 도끼가 이마에 틀어박혔다. 여타 주문쟁이가 그러했듯이.

‘어차피, 정보를 토해낼 입은 남았다.’

무정한 손놀림으로 도끼를 뽑아낸 칸이 경험치 바를 흘겼다.

이전과 달리, 레벨업 직전까지 차올랐다. 인형술사가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증거.

하지만 칸은 기뻐할 수 없었다.

‘중간 보스가 이렇게 약하다는 건….’

마경의 핵이 대부분의 힘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는 의미일 테니까.

*

*

*

잠깐 휴식을 취할까도 싶었지만, 칸은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쉬더라도 바깥에서 해야지. 이딴 곳에선 발 뻗고 휴식도 못 해.”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다행히 칼엘손과 파샨투도 칸의 결정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이유야 조금 다른 듯하지만.

“근데 여기는 어떻게 나가면 되는 거냐?”

“글쎄….”

지금부터 그걸 찾아봐야겠지.

칸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흠집 하나 없는 알현실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레븐이 보여준 평면도는 마경의 침식이 발생하면서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애초에 마경에 진입하자마자 마경이 보여주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벗어난 순간에는 알현실에서 눈을 뜨지 않았던가. 기존에 생각한 성의 구조는 머릿속에서 지우는 게 이로울 것이었다.

“일단, 각자 좀 찾아보자고.”

사람이 셋이나 되니, 찾아보면 뭐라도 나오기는 하겠지. 정 안 나오면 벽이라도 두들겨 보던가…….

쾅! 쿠르르르.

칸의 눈썹이 씰룩- 요동쳤다. 벽을 부숴보겠다 생각한 순간, 진짜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낫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슨 깨달음을 얻어서 무협 고수 마냥 심검을 쓴 게 아니라면, 벽을 부숴보려 시도한 범인이 따로 있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그건-.

“찾았다!!”

파샨투의 우렁찬 목소리가 알현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아이처럼 신난 파샨투가 어서 와서 이걸 보라는 듯 팔을 붕붕 휘두르고 있었다.

“통로다! 내가 가장 먼저 발견했다!”

“뭐 경쟁도 아니고…. 누가 먼저 찾는 게 중요한가?”

투덜거리는 칼엘손과 함께 향한 곳은 처음 인형술사가 앉아 있던 옥좌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옥좌. 처음부터 박살 났었지.’

던전의 진행을 위해선 반드시 찾아내 파괴해야 하는, 마경의 불변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오브젝트. 게임에선 ‘트리거’라 부르는 표적이 이번 마경에선 옥좌였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파괴 불가 속성을 지니는 마경 안에서 뭔가가 부숴졌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데….

눈앞의 인형술사에게 집중하느라 완전히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시발.’

현대인의 지성을 갖춘 내가 언제부터 벽을 부수는 걸 당연하게 여긴 거지? 현대인의 지성을 갖춘 자신이, 태생부터 야만인인 파샨투처럼 ‘벽을 부수는 행위’를 당연한 방법처럼 생각했던 것에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게다가 운인지, 뭔지, 칸이 놓쳤던 부분을 곧장 발견한 것도 파샨투였기에 더욱 기분이 묘했다.

“뭐 하냐? 어서 가자고.”

어쨌건, 파샨투의 활약으로 귀찮은 탐색 과정을 스킵한 건 분명하군….

파샨투가 발견한 숨겨진 입구는 몹시 비좁았다. 2m가 넘는 거구가 기본인 야만전사들에겐, 그야말로 바늘구멍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드득. 콰직!

야만전사 중에서도 체구가 작은 편인 칸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몸을 구겨넣어 통과했지만, 그보다 훨씬 큰 파샨투는 그것조차 불가능해서 입구 주변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입구 주변이 아예 ‘트리거’로 설정된 듯 조금만 힘을 주어도 무너졌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인형술사의 기억에서 봤던 통로군.’

물론, 그때와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으리라. 마경의 침식으로 어떻게 변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추측하건대, 이 통로의 끝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건 던전의 보스. 즉, 마경의 핵일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알파 개체라는 놈이 통로 너머에 있는 비밀 공방에 있었으니까. 어쩌면 대공도…….’

물론, 확신은 금물이다.

마탑의 주문쟁이들과 대륙의 석학들조차 반쯤 손을 놓은 것이 바로 마경의 연구다. 현시대의 지식으로는 해명이 불가능한 미지의 현상이라는 게, 마탑과 제국이 공동으로 내린 결론일 정도면 말 다했지.

하지만 칸은 다르다.

주문쟁이도, 고명한 학자도 아니지만, 수없이 많은 마경을 탐색하고 공략한 플레이어였다. 미들랜드의 필멸자와 초월자들을 통틀어도 가장 많은 공략 경험을 보유한 인간일 터.

‘서릿골을 벗어나자마자 한 짓거리가, 마경을 찾아다니는 거였으니.’

그런 칸의 경험과 직감이, 동시에 같은 의견을 주장하고 있었다.

‘입장하는 순간 걸리는 함정. 뭔가 어설픈 중간 보스.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배치된 트리거.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보스방….’

마경의 형태가 제각기 천차만별이라지만, 그래도 공통의 패턴으로 분류하는 건 가능했다. 게이머들이란 그런 존재 아닌가. 기어코 파훼법을 찾아내, 최적의 공략 루트를 발견하는 괴짜.

칸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는 미들랜드의 퀘스트 유저들을 통틀어서 ‘고인물’을 자칭하기에 충분한 공략러였고, 스토리나 세세한 설정을 제외한 부분에선 썩은물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 칸이 생각하기에, 대공성의 마경은…….

‘최악을 가정하는 게 좋겠군.’

언제나 그렇듯.

그가 이 엿 같은 세계에 끌려 들어온 이후 마주한 모든 순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

*

*

“갑자기 하늘은 왜 보시는 겁니까?”

남자는 노인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싱겁기는. 때때로 그럴 때마다 노망이라도 온 게 아닐까 섬뜩하다고요.”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예, 압니다. 당연히 그냥 해 본 소리죠. 노망이 와도 제가 먼저 올 텐데 말입니다.”

노인의 경박스런 말투에 무어라 말을 하려던 남자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저 행동이 공허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란 걸, 남자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그저 혼돈으로 그득한 하늘을,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혼돈의 너머, 이 공간을 잠식한 공허의 흐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 내비치고 있었다.

‘요동치고 있군.’

공허의 바깥, 대륙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대륙의 명운이 뒤틀릴 정도의 사건이라.’

“아무래도, 바깥의 소식을 좀 들어야겠다.”

“예? 뜬금없이 그게 무슨…….”

“네놈이 기르던 제자들 중에, 마침 적당한 아이가 있었지. 그 아이를 시켜, 현재 대륙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들에 조사하라 일러두어라.”

“노구를 거칠게 쓰십니다. 여기서 바깥까지 소식을 전하려면, 무슨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잘 아시는 분께서. 무엇보다 황제도 탐탁지 않아 할 텐데…….”

“그래서. 안 할 것이냐?”

“해야지요. 예.”

노인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남자는 그런 노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공허의 관찰을 계속했다.

‘조만간, 바깥으로 나갈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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