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엘펠란 토벌전 (1)
인형술사의 기억에서 본 거대한 비밀 공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건너는 동안, 마경의 괴물이 앞을 막아서거나 복도가 통째로 무너지는 함정 따위가 등장해 일행을 막아서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위화감이 들 정도로.
물론, 빈약한 체력 스탯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칸으로서는 잡몹이 등장하지 않는 건 희소식이라 봐야겠으나. 마경의 특성을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마경의 핵’이 지닌 힘의 총량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 말은 즉, 마경이 지닌 힘의 대부분이 보스에게 집중되었단 얘기와 동일했다.
“보인다.”
칼엘손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잠시나마 대마경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칼엘손인 만큼, 지금의 평화가 결코 좋은 뜻이 아니란 걸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잔뜩 경직된 말투가 그를 증명했다.
[유물의 힘은 얼마나 더 쓸 수 있소.]
[아직 여유가 있다! 내가 죽을 때까지는 말이야!]
거, 더럽게 희망적인 말씀이시군. 앞으로 직면하게 될 존재가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내포했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파샨투는 잔뜩 흥분한 기색이 연연했다.
‘아니, 본능적으로 느꼈을 수도 있겠지.’
위험한 전장,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미친 종족이니까. 본인의 죽음을 직감하고서 되레 흥분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리라. 어쨌거나 칸의 입장에선 다행인 일이다. 죽음의 공포 앞에 움직임이 무뎌지거나, 싸움을 포기할 일은 없을 테니. 오히려 무리해서 싸우다 개죽음 당하는 걸 걱정해야 할 판이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앞서 말한 얘기들은 모두 칸에게나 적용되는 얘기였다.
야만전사의 껍데기를 뒤집어 썼을 뿐인, 현대의 단조로운 삶에 찌든 배불뚝이 회사원.
그것이 칸의 본질이자, 진짜 정체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치켜세울 때면 불쾌함을 드러냈었다.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참수자니, 오우거 슬레이어니, 신이 선택한 전사니…. 그런 거창한 이름을 아무리 덧씌워봐야-.
‘시발.’
이제는 완전히 손에 익어버린 도끼와 마검을 양손에 쥔다. 허리는 곧게 세우고, 어깨는 축 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핀다. 그렇게 하면, 초인적인 힘을 지녔으며 어떤 전투건 두려워않는 야만전사의 완성이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전장에 들어선다.
칸은 가장 먼저 전투를 치르게 될 전장의 상태를 확인했다.
인형술사의 기억에서 엿 봤던 공방과 완전히 일치하는 형태다. 벽면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실험 기구들과 용액들이 가득했고, 안쪽에는 커다란 마법진과 예의 ‘알파’라는 개체가 잠들어있던 붉은색 관이 텅 비어버린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네놈은 뭐냐?”
그때 칼엘손이 앞으로 나섰다.
“대공이랑 그놈의 수석 마법사는 어디 가고, 웬 못 보던 놈이….”
칸이 고개를 돌려 칼엘손과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으하하하─!! 전투다!”
“이 새끼가 묻는 말에는 대답 안 하고 뭔 헛소리를…….”
유물의 힘을 전신에 두른 파샨투가 대뜸 칼엘손이 바라보는 쪽으로 돌진했다. 칼엘손은 그 꼴을 보지 못한 양, 누군가와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폭발적인 살기를 내뿜으면서.
칸은 두 일행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고약한 장난을 치는군.”
“고약한 장난이라…. 이게 겨우 장난처럼 느껴지나? 아니, 그럴 만도 한가. 처음부터 자력으로 환상을 깨뜨린 장본인이니. 비록 그 방법이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 쪽이라도, 우습게 여길 능력은 충분하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불현듯 나타난 중년인이 히죽 웃었다. 다만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조금은 놀랐네. 여기까지 올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 그것도 한 명도 죽지 않고서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대의 인간들은 전부 지능이 퇴화한 원숭이 쯤으로 생각했었는데……. 전부 그런 건 아니군?”
“이 시대?”
“오. 궁금한가?”
중년인이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곳에 있어야 할 아해들은 어디에 가고, 엉뚱한 놈이 여기에 있는지.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째서 ‘과거의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것인지…….”
“안 궁금하다. 어차피 과거에서 온 냉동인간 비스무리한 놈이겠지.”
“냉동인간? 재밌는 표현이군. 아니, 정확한 표현이야.”
뭐? 칸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정작 중년인은 신이 난 것처럼 더욱 떠들어댔다.
“그래. 영혼과 육체의 연결을 유지한 채, 완전히 동결시켜 긴 시간 유지해 수백, 수천 년을 버틴 인간이 있다면. 냉동인간이라는 표현도 틀린 건 아니야. 생긴 것과 다르게 제법 재치가 넘치는 친구로군. 얼굴만 봐서는 어디 핏줄인지는 모르겠다만…. 타고난 몸뚱어리도 상당해 보이고. 자네 선조가 누구인가?”
“…….”
“잘 모르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지금 시대의 인간들은 많은 걸 잃은 듯하니. 자기 혈통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모르는 게 이상하진 않아. 내 이해함세.”
칸이 침묵한 채 묘한 시선을 보냈음에도, 중년인은 그저 신나서 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내용은 대부분 지금 시대의 인간들이 얼마나 퇴보했는지, 그에 자신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자네는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쓰레기라 불러야 마땅할 것을 자랑스레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마법사’라 칭하는 것들이 존재할 줄은! 심지어 그놈들은 날 조종해서 대륙의 지배자라도 될 생각이었나본대……. 대단히 어리석은 선택이었지.”
중년인이 코웃음을 쳤다.
“내 육체에 정신을 지배하기 위한 술식을 새겨넣고, 유사시에는 육체를 아예 빼앗아 조종하려 들기까지 하던데. 참으로 우스운 짓거리야! 그딴 너저분한 술식으로 대마법사의 영육을 강탈하려 들다니? 흐흐.”
대마법사.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어의 등장에 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쪽이, 대마법사라고? 그것도 과거의?”
“오. 처음으로 흥미를 보여주는군.”
그런 칸의 반응을 즐기듯, 중년인이 손끝으로 허공에 대고 주먹질 하는 파샨투와 아직도 말다툼 중인 칼엘손을 가리켰다.
“그럼. 지고한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가 아니면, 저토록 자연스러운 환상을 보여줄 수 있겠나? 뭐, 외부의 간섭을 받으면 금새 깨어나겠지만. 잠시 대화할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하지.”
“……나와 대화가 하고 싶었던 건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 게다가, 자네도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어쩌면 자네가 알고싶은 것들을 알아낼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네.”
거구의 야만인이 쏘아보내는 시선에도 중년인은 여유로웠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대치가 이루어지길 한참. 칸은 잠깐의 고민을 거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역시 자네라면 받아들일 줄 알았네. 제법 머리가 똘똘한 친구 같더라니까…….”
“대신, 내 궁금증부터 풀어주시오. 그다음에, 나도 그쪽이 묻는 말에 솔직히 답변해드리지.”
“흠. 그럴까?”
네가 어떻게 나와도 상관없다는, 본인이 압도적인 강자라 생각해야만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그래, 그렇겠지. 무려 자칭 대마법사신데.’
만약 상대가 본인의 궁금증만 풀고서 입을 닫아도, 어떻게든 열게 할 자신이 있다는 반증이다.
“대공과 그놈 곁에 있던 마법사는 죽었소?”
“글쎄. 육체는 죽었으되, 영혼은 살아있네. 이걸 과연 죽었다고 봐야할까? 자네의 해석에 맡기지.”
“그 둘이 당신을 어떤 방법으로 깨웠고, 그 방법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인지하고 있는 거요?”
“그거야 당연히!”
중년인이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열성을 다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전에 영혼과 관련한 비의를 발견했네. 내 추측하건대, 이는 초월의 영역에 이른 위대한 마법사…. 그도 아니면 초월종이 남긴 위대한 지식일세. 당연히 천고의 보물이오, 대륙 역사에 남을 발견이었지. 나는 이를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대마법사의 영역에 올랐다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막혔어…. 왜인지 아는가?”
“글쎄.”
“아무리 발악해도! 초월의 영역에 이를 수가 없더군. 마치 두텁고 단단한 벽이 앞을 가로막은 것처럼……. 나는 그 원인이 ‘영혼’에 있다고 생각했네. 저 위대한 초월자들은 모두 비대한 영혼을 가졌을 테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으니까. 때마침 신의 졸개들이 나를 금지된 지식을 익힌 외도라며 추적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떠올렸네!”
초월을 위한 그릇을 마련하는 동시에, 저 간악한 신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방법을!
“최소한의 자아를 유지할 영혼을 남긴 채, 영혼과 육체를 가사 상태에 빠지도록 만드는 거야. 그리고 호기심 왕성한 후배들을 믿고서, 부활을 위한 의식을 이런저런 눈속임 지식과 함께 남겨두었지.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영혼만을 추출하는 법과 그 영혼을 연료로 태워 힘으로 치환하는 방법…. 그리고 각자 다른 육체에게서 나온 영혼을 용광로에 녹이듯, 하나로 합치는 방법까지.”
하지만 그건 자신의 실수였노라고. 중년인은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완벽한 계산 착오였네. 후대의 수준이 이토록 뒤떨어질 줄은 상상조차 못했지. 설마 그 간단한 비술조차 제대로 써먹지 못할 줄이야……. 게다가 내가 잠에 든 사이, 아주 천천히 자아가 흐려지더군.”
“그런 것치고는 꽤 멀쩡해 보이는데.”
“겉은 그렇지. 하지만 속은 다르다네. 무엇보다, 그 어리석은 것들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의식을 진행한 탓에 내가 생각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채로 깨어나야만 했지. 문제는 거기서 생긴 거야. 세월의 풍화로 깎여나간 자아, 목표량에 도달하지 못한 영적 질량, 불완전한 상태로 구현된 의식…. 셀 수도 없이 긴 세월을 인고하여 부활하자마자, 소멸을 눈앞에 둔 자의 심정이 어떤지 상상이나 가는가?”
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다시 태어날 생각조차 없었거니와, 눈앞의 미친 주문쟁이에게 공감하고 싶은 마음도 딱히 없었기에.
중년인도 처음부터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샐쭉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했네. 세상의 모든 걸 불태워버리고 싶고, 날 이지경으로 만든 것들을 찢어버린 다음에 그와 관련된 것들까지 전부 영원한 고통에 빠지도록 만들 작정이었지. 그런데……. 빛이 있었네. 아니, 그건 단순한 빛이 아니었어. 저 간악한 신들이 감췄던 세상의 진실이자, 진리였지.”
“공허.”
“…그래, 그런 이름도 있지.”
“공허를 받아들였군.”
대체 어떻게? 속으로 삼킨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중년인의 입에서 곧장 튀어나왔다.
“그래. 나는 공허를 보았고, 그것을 받아들였네. 아니…! 그것이 나를 보았고, 택했으니 나는 그저 참된 진리를 좇는 자로서 마땅한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야─! 그리하여! 흐흐…. 그리하여. 나는 깨달았네. 나를 가로막았던 벽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건 더 이상 지식을 추구하는 마법사의 환희가 아니었다. 그저, 광기에 잡아먹힌 광신도가 내지르는 맹목적인 숭배에 불과했다.
“이 세계였어. 이 거짓된 세계가 진리를 가로막고, 진정한 빛이 도래하지 않도록 거대한 어둠의 장막을 드리운 것이야! 자네는 상상할 수 있겠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미들랜드가 거대한 새장에 불과하다는. 그 역겹고도 참혹한 진실을?!”
거짓된 세계. 도저히 흘러넘길 수 없는 단어의 등장에 칸의 눈썹이 요동쳤다.
이 세계가 게임 속 세계라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리고 충격적인 발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나는 어둠의 장막 너머를 엿보았네. 흐흐……! 이 세계의 바깥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궁금하지 않나?”
“뭐가 있었지?”
칸은 자신의 조급함이 드러나지 않게 담담한 투로 되물었고, 중년인은 광기어린 미소를 완전히 거두며 답했다.
“아무것도 없었네.”
“……!”
상상을 초월하는 해답에 칸의 눈동자가 부릅- 커졌다. 그리고-.
“신들이 머무르는 천상도, 악마들이 기거하는 지옥도 아닌, 오로지 공허만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신도, 악마도, 결국에는 이 거대한 새장에 갇힌 가엾은 존재라는 의미야. 그럼 초월자들은 도대체 뭘까? 초월로 향하는 길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초월에 도달한 존재들이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그 숨막히는 진실 앞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공허의 추종자로서 부활한 대마법사는 음울한 목소리로 뒷붙였다.
“나는 지금부터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움직일 걸세. 이 세계를, 공허로 물들임으로써. 자네는 어떤가?”
이 세계의 진실을, 신들과 초월자들이 숨긴 비밀을-.
“알고 싶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