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엘펠란 토벌전 (2)
만신전 교회의 신앙에 따르면, 뭇 신들과 악마는 미들랜드와는 다른 차원인 천상과 지옥에서 미들랜드를 관찰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게임을 수없이 클리어한 빙의자인 칸은, 천상과 지옥조차 미들랜드의 속한 준차원이란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눈앞의 중년인이 미들랜드의 바깥에서 천상과 지옥을 보지 못했단 것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칸이 경악한 것은, 천상과 지옥이 아닌 다른 대목이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미들랜드의 바깥에는 공허만이 오롯하게 존재하고 있다. 무려 공허를 엿 보고, 공허에 존재를 맡긴 대마법사가 뱉은 말이다. 칸을 속이기 위해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을 테니, 적어도 그가 세계의 바깥에서 공허만을 보았단 얘기는 사실이겠지.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최종장에 이르면 외차원에서 대마경을 통해 강림하는 대악마는? 모든 용들을 낳았다는 진룡은? 고대 거인들의 왕이라는 거신은? 외차원에 있어야 할 옛 신들이 외차원에 존재하지 않고, 외차원에는 공허밖에 없다고?’
그럼 배불뚝이 회사원을 야만전사의 몸뚱어리에 빙의시킨 존재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실존하기는 하는 건가?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빙의, 게임 시스템에 근간한 초인적인 힘, 그리고 무한한 성장. 정의의 신이라는 상위 초월자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호한 무언가…. 그 모든 것들이 실재하고 있으니까.
‘나를 이 세계에 빙의시킨 존재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만한 힘을 지닌 존재는 초월자의 격을 뛰어넘은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런 존재들은 많지 않아.’
그래서 그토록 ‘옛 신’들의 흔적을 쫓은 것이다.
“정말 공허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나? 어떤 초월적인 존재…. 신 같은 건?”
함께하자는 의사를 전한 뒤, 칸이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것처럼 침묵하던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차원은? 미들랜드 외에 또 다른 차원조차도 없었다고? 정말, 미들랜드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차원이라고?”
“적어도 내 눈에는.”
다른 차원조차도 없다니. 그럼 지구는 어디에 있다는 거지?
허.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흘린 칸이 마른 세수를 했다. 어느새 덥수룩히 자라난 수염의 선명한 감촉이, 그에게 현실 도피 하지 말라 타이르는 것같았다.
‘아니, 아직 모른다.’
저놈의 말을 전부 믿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놈이 거짓말을 했단 얘기가 아니었다. ‘녀석의 수준으로 공허를 제대로 관측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합당한 의심에서 나온 결론이다.
공허.
원래는 스토리의 최후반부에 이르러서 새로이 드러나는 설정으로. 빙의하기 전에는, 본격적인 대마경의 공략에 들어가기 앞서 게임사가 갑작스러운 파워인플레를 설명하기 위해 집어넣은 설정이라 생각했던 개념이다.
그러나 ‘미들랜드 퀘스트’의 세계관에서 상당히 중요한 설정이라는 것만은, 스킵충인 칸조차 인지하고 있었다.
공허의 하수인이니, 공허에 잡아먹힌 악룡이니. 이름에 ‘공허’가 들어간 괴물들이 정말 끔찍하게 강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따금 대마경에서 마주치는 영웅급 NPC들이, 공허에 집어삼켜지지 않게 조심하라던가, 대마경에 오래 체류하면 공허에 빠진다던가 하는 의미심장한 텍스트를 지겹게도 늘어놓았었지.
‘대마경의 외곽을 벗어나면 나오는 맵 이름도 공허의 요람이고.’
그리고 바로 그 공허의 요람이, 초월자에 한없이 근접했거나 이미 초월자에 이른 NPC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공간이라는 설정이 있었다.
그러니.
초월에 이르지도 못한 대마법사 따위가, 공허의 모든 걸 관측했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도 기억해둘 필요는 있겠어.’
당장 고민해봐야 답이 안 나오는 문제들이다. 애초에 그런 복잡한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도 무리였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모양인데, 그래서 대답은? 나와 함께 세상의 진실을 알아갈 준비가 되었나?”
“그 전에. 왜 하필 나지?”
“음?”
“그런 제안을 굳이 나한테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흠, 그럴 수 있지. 중년인은 당연한 의문이라며 고개를 몇 번 주억였다. 마치, 칸이 당연하게 수락할 거라 생각하는 태도였다.
“글쎄. 자력으로 환상 공간을 깨뜨린 것이 놀라워서? 아니면 제법 쓸만한 무력을 보고서? 아니, 그건 아니겠군. 자네와 함께한 저 칼잡이도 실력은 괜찮았거든. 그럼 대체 뭘까……?”
‘미친놈인가.’
자기가 제안을 해놓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갑자기 노망이 의심되는 중년인의 모습에 칸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중년인은 오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손을 휘휘 저었다.
“오해하지 말게. 내가 갑자기 미쳐버린 건 아니니까. 정말 궁금해서 그래. 자네를 보자마자 함께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아, 이 단어가 적당하겠어. 나는 자네에게 친근함을 느꼈네. 기시감이라 해도 좋겠지.”
“…공허에 잠식당한 주문쟁이랑 내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그런 끔찍한 모욕을 면전에서 하나? 보통?”
“흐흐. 기분 나빠하지 말게.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그래도 정말 그런 느낌이 들었네. 그래서 어쩌겠나? 나와 함께 이 세계의 진실을 확인하겠나?”
세계의 진실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하기는 했다. 아니,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해왔다.
지금도 그걸 알아내기 위해 개고생을 하다가 마경에 들어오지 않았나. 이미 진실의 일부를 엿보았다는 먼 과거의 대마법사가 돕는다면, 혼자 정처없이 대륙을 떠돈 몇 년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될 테고. 정말 진실에 닿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허에 집어삼켜지는 건, 싫은데.”
“…자네가 공허에 대해 무얼 아는지는 몰라도. 공허만이 모든 것이 가짜인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실일세.”
“그딴 건 잘 모르겠고.”
사실, 놈의 제안을 거절한 가장 명확한 이유는 따로 있다.
“세상에 믿을만한 주문쟁이는 없다, 라는 게 내 신조거든.”
제 영달을 위해 무고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갈아넣고, 그것도 모자라서 공허에 잡아먹힌 주문쟁이라면 더욱더.
척-
그렇게 뒷붙이며 시원스레 중지를 들어올린 칸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네놈은 여기서 끝이야. 뒈질 테니까.”
“…어쩔 수 없군. 힘으로 포기하게 만드는 수밖에는.”
쾅──!!
전투의 시작을 알리듯, 거칠게 진각을 밟으며 칸이 외쳤다.
[워크라이]
“닥치─고 덤벼─라─!”
*
*
*
파샨투와 칼엘손을 사로잡은 환상이 외부의 간섭으로 깨진다는 알파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빈 허공을 향해 주먹질과 상대 없는 대화를 이어가던 둘은 고막에 직접 충격파를 때려박는 듯한 함성이 울려 퍼지자 정신을 차렸다.
“염병…. 설마 또……!”
“응? 죽인 건가!”
“이제 시작이다! 저놈부터 죽여!”
칸의 우렁찬 고함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야만전사와 검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알파를 향해 뛰어올랐다. 우연찮게도, 알파를 중심으로 삼각형을 그리며 포위한 형태로.
“죽일 놈이 남았군!”
파샨투가 ‘하늘을 떠받치는 자의 정수’를 이용해 내지른 잿빛의 주먹이 가장 먼저 알파에게 쇄도했다. 오우거처럼 거대해졌던 인형술사의 무릎을 단번에 꺾어버린 위력이 실린 일격. 그에 알파는 여유로운 태도로 손을 뻗었다.
쩡!
알파의 손을 중심으로 펼쳐진 무형의 장막과 잿빛의 주먹이 충돌했고, 소멸한 것은 후자였다. 그에 반해 알파가 펼친 장막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주문을 영창하는 전조조차 없이 전개한 장막이라 생각하기 힘든 내구도였다. 마치, 가짜 현자 행세하던 시절의 인형술사가 사용한 그것처럼!
“이놈만 처리하면 끝이란 말이지…!”
“그게 가능하겠나?”
알파가 파샨투의 공격에 의식을 돌린 사이. 마치 암살자처럼 기척도 없이 후방을 점한 칼엘손이 발검과 함께 다섯 갈래의 참격을 발출했다.
검날이 닿는 거리라면, 아룡의 단단한 비늘조차 깔끔하게 절삭하는 검호의 참격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방호성을 지닌 장막이라도 무사할 수는 없을 터. 그러나 알파의 대응은 같았다. 참격이 오는 방향으로 장막을 전개했다.
카가가가각!
하나도 아닌, 다섯 개의 장막이 동시에 전개되어 참격의 방향을 뒤튼다.
설마 제 검격이 막히리라곤 상상조차 못 한 칼엘손의 동공이 확장되는 가운데. 알파가 칼엘손을 향해 수도(手刀)를 내려치듯 손을 휘저었다.
날붙이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찰나 간 수십 번 이어졌다. 칼엘손의 검을 방해했던 장막이 수십 개의 칼날로 변해 그를 덮쳤고, 그걸 눈으로 보고 전부 반응해낸 칼엘손이 대응하며 난 소리였다.
“이게 무슨 괴물…!”
“칼질이 제법이군. 처음 보는 무류인데, 마법사와 다르게 칼잡이들은 수준이 크게 뒤떨어진 건 아닌 듯해. 애석한 일이야.”
뜻밖의 상황에 칼엘손이 주춤 물러난다.
그리고 칸의 도끼가 번쩍-! 내리찍혔다. 하늘에서 내리친 천둥이 코앞에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은 굉음이 넓은 동공을 뒤흔들고, 여러 겹을 쌓았음에도 산산조각이 난 장막들을 알파가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굉장한 신력이군. 고대 거인들의 혈통이라도 이은 건가?”
“닥─쳐─라─!”
콰광. 쾅. 쿠구구궁──!!
마경이 아니었다면, 주변이 초토화되고도 남았을 힘이 한 명의 마법사에게 집중되어 쏟아졌다. 도끼와 마검이 물 흐르듯 교차하며 알파의 두개골을 쪼개기 위해 날아들었고, 기어이 모든 장막을 쳐낸 칸의 도끼가 알파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흠. 이거,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구먼.”
그렇게 보이도록, 꾸며진 환상을 보았다.
도끼에 스쳐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본 알파가 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자네의 혈통에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한 듯하네. 정신에 직접 때려박는 환상을 자력으로. 그것도 순식간에 풀어내다니? 하마터면 시작부터 치명상을 허용할 뻔했어.”
그렇게 말한 알파가 처음으로 주문을 읊었다. 놈의 주문이 완성되기 전에 오른손의 마검을 찔러넣으려 했으나, 알파의 주문이 불꽃을 토하는 것이 먼저였다.
푸화하하학!
세 방위로 동시에 뿜어져 나간 열기가 순식간에 칸 일행을 덮쳤다. 마치, 와이번의 숨결을 연상케 하는….
아니, 그 이상의 불꽃이었다.
칸은 마검의 검집으로 그걸 되받아칠까 하다가, 포기하고 도약을 써 거리를 벌렸다. 와이번의 숨결을 능가하는 화력이라면, 화상만으로 중상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나머지 일행들도 제각기 방식대로 알파가 뿜어낸 불꽃으로부터 몸을 빼냈다.
파샨투는 정수의 힘을 전방위로 투사해 생겨난 반동으로 뒤로 물러났고, 칼엘손은 불꽃이 완성되기도 전부터 물러난 지 오래였다.
“흠. 생각보다 다들 잘 싸우는구먼.”
알파가 솔직한 감탄을 드러냈다. 완전하게 부활하지 못해 과거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처지라도,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다. ‘진짜 초인’의 영역에 이르러 초월을 바라보는 존재. 단신으로 군단을 갈음하는 마법사란 말이다. 게다가 부족한 힘은 축적한 영혼을 소모해 보충하고 있으니, 단지 잘 싸울 뿐인 전사 셋은 간단히 태워죽여야 정상이었다.
게다가 마경의 힘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싸움이란 뜻인데, 그의 예상보다 이들의 전투력이 상당했다. 특히, 그가 함께하자고 제안했던 전사의 힘은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어이. 이거 X된 거 같다.”
그리고 상대의 힘에 경악한 건 알파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칸 일행이 심적으로 느끼는 당혹감이 더 크리라.
“저 장막. 단순한 방어 주문이 아니야. 절삭할 때마다 느껴지는 반탄력이 검을 밀어낸다고.”
그중에서도 칼엘손이 가장 큰 당황을 느꼈다.
겨우 방어용 주문 따위가 그의 검격을 빗겨냈다. 마탑의 탑주들이 구현한 주문일지라도 모조리 베어낼 수 있다 생각했던, 검호의 자존심이 그야말로 무참히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그래. 최종 보스라 이 말이지.’
얼얼한 손끝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터뜨린 칸이 여유로운 태도의 알파를 눈에 담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최악이군.’
언제나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스스로의 불운을 원망한 칸이 도끼와 마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하는 수밖에 없나…….”
“어디,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보게.”
그렇게.
최악의 보스전이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