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93화 (93/132)

#093화. 엘펠란 토벌전 (3)

‘정말이지, 죽겠군.’

이 비루한 몸뚱어리로 대체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사실 진작에 쉬라고 육체가 경고를 보내왔지만, 헤른은 끝없이 다리를 채찍질하며 공도의 곳곳을 누볐다. 적어도 이 혼란이 사그라들기 전에 주요 인물들의 포섭을 끝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외성 구역에 머무르는 귀족들, 본래 도적 떼에 불과했으나 군벌을 이루었고 이후에 대공이 내민 당근을 받아들여 합류한 군벌의 우두머리들, 귀족도 아니며 군벌들처럼 병력도 없음에도 공도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까지.

궁중백으로 일하는 동안, 얼굴 정도는 마주쳤던 이들을 하나씩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한미한 도시의 시장이었다가 우연찮게 대공의 눈에 들어 출세한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대공성을 집어삼킨 현상에 다들 넋이 나간지라 그럭저럭 말을 나눌 수는 있었다. 사실, 설득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그닥 크지 않았지만….

“고맙소. 덕분에 공도 내의 주요 인물들을 무사히 포섭할 수 있었소.”

“제 역할을 했을 뿐인 걸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셔서, 공도의 혼란을 금방 다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겸양은 넣어두어도 괜찮소. 엘레나 수녀.”

흠칫.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마른 천으로 닦아내던 소녀가 고개를 들어 헤른과 눈을 마주쳤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에, 헤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글쎄요. 저보다는 귀하의 입심이 더 대단하게 비치던데요.”

“…크흠. 혼란에 빠진 상대를 설득하는 건 무척 간단한 일이오. 특히, 그대가 곁에서 신의 뜻을 증명해준 덕분에 더욱 쉬웠지. 왕국민들이 만신전의 신앙에 제국민들처럼 열렬하지 않다고는 하나, 만신전의 신들께서 우리를 언제나 굽어살피고 있음은 인지하고 있으니. 게다가… 혼란한 틈을 타 약탈을 시도하려던 군벌들의 제압까지 도와주셨잖소.”

“그건 제가 아니라, 저분들에게 감사를 표하시는 것이?”

어쩐지 날카롭게 들리는 말에 헤른이 답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오.”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헤른은 여전히 기억했다.

그를 여기까지 납치한 멍청한 얼굴의 용병과 북부에선 팔람의 창잡이로 불리우는 여인, 그리고 떠돌이 마법사들과는 격이 다른 주문을 구사하는 청년 마법사. 참수자의 동료라는 그들이 군벌들을 어떻게 몰아붙였으며, 저 작은 체구의 수녀가 철퇴로 때려부순 골통이 몇 개인지를-.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마땅한 보답을 해야겠지. 왕국의 귀족이자, 만신전의 보살핌을 받는 신도로서.”

“바람직한 생각이시네요. 물론, 그 보답이란 게 귀하가 북부의 차기 권력자가 된 이후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

헤른은 조용히 침묵하는 걸 선택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저 어린 수녀의 기분이 최악에 가깝다는 걸 인지한 까닭. 대신, 앞으로의 일에 대한 얘기를 꺼내 화제를 돌렸다.

“어쨌거나. 그대들의 도움으로 포섭할 만한 인물들은 모두 포섭했소. 저렇게 사악한 형상이 대공성을 뒤덮은 것도 그렇고. 만신전 교회의 뜻도 전해 들었으니. 대공은 이제 끝장이라고 봐야겠지. 반대공군의 집결도 얼추 끝났을 시간이니. 슬슬 대공성에 진입하는 게…….”

“아니요. 그건 좀 곤란해요.”

헤른은 자신의 말을 끊은 청년 마법사의 무례를 책망하지 않았다. 참수자의 동료이기 이전에, 상대는 무시무시한 주문을 다루는 마법사였으니까. 달리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라 판단한 것이다.

“왜 그렇소?”

“우리가 들어가도,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테니까요. 오히려 발목만 잡겠죠.”

“…저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로군.”

“제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죠.”

다른 국가의 사람이라면 몰라도, 제국에 사는 사람들에겐 상식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제국 외의 국가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실제로 제국과 그 외의 국가들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들 하지만. 저 젊은 마법사가 그럴 의도로 한 말은 아닐 터.

“고견을 들을 수 있겠소?”

“저건 마경이에요. 대공성과 그 주변의 마나가 완전히 차단된 것처럼 소멸한 걸 보면, 거의 확실하게 말이죠. 이미 침식이 진행되었으니 이미 대공성은 별개의 차원이라 생각하면 돼요.”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나, 요점은 간단했다.

대륙의 사분지 일을 집어삼켰다는 대재앙, 대마경과 같은 재액이 대공성에 닥쳤다는 말이다. 헤른은 순간 두려움에 손을 떨었지만,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그, 그럼. 마경 안에 침투하는 게 불가능하단 말이오?”

“들어갈 수는 있죠. 하지만 추천하지는 않아요. 마경에서 제 몸을 지키는 건, 제 스승님조차 확언할 수 없다고 하셨거든요.”

“저 친구의 스승은 마탑의 마구스니까. 우리가 들어가 봐야 죄 개죽음이라는 뜻이오. 귀족 형씨.”

“……!”

저 청년 마법사의 정체가 마구스의 제자였나? 멍청한 얼굴의 용병이 덧붙인 설명에 헤른의 눈썹이 들썩였다. 평소 같으면 대단히 놀랐을 만한 얘기지만, 워낙 놀라운 일들을 연이어 겪은 탓인지 그런가- 하고 납득할 뿐이었다.

‘확실히 마구스의 제자라면 그 놀라운 마법 실력도 납득이 가.’

그리고 일반 병사들을 이끌고 나서봐야, 개죽음이라는 말도 이해가 갔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일반적으로 마경을 공략하려면 어느 정도의 강자가 필요한 거요?”

싸아.

헤른은 순간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엉거주춤 뒷걸음질 쳤다. 순간, 살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눈빛이 자신을 향했던 것이다.

“오, 오해하지 마시오. 참수자가 실패할 거란 말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공도의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걸 알아야 대책을 세울 거 아니요?”

진심으로 억울하단 투였고, 실제로도 헤른은 참수자가 제발 성공하기를 바라는 쪽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도 이미 참수자의 계획에 올라탄 입장일진대.

그 절절한 호소가 통한 걸까. 팔람의 창잡이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진 여인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릴 적 들은 바가 있습니다. 찬탈왕의 집권이 끝날 무렵, 아르곤 변경에 마경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찬탈왕의 업적으로 왕국의 힘이 최고조였던 시점인지라. 제국의 도움을 뿌리치고 왕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로만 조직된 토벌대를 구성했다고 하더군요.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아주 참혹한 실패.”

꿀꺽. 침을 삼킨 헤른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 그래서. 그 토벌대의 인원은 어느 정도였소?”

“스무 명의 기사와 마법사 열. 그리고 백 명의 근위병. 지휘관으로는 당시 왕국의 제1 기사가 나섰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아무도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단 한 명도.”

그 말을 듣고, 헤른은 자기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참수자의 동료인 저들이 내비치는 이유 모를 분노와 암울한 낯빛의 이유를.

‘불가능해.’

참수자는 죽을 것이다. 흑익공이 파견한 대전사는 물론이고, 총지부장인 칼엘손까지 다 함께!

*

*

*

쾅! 콰광! 쩌엉──!!

오우거의 팔뚝만큼이나 거대한 불꽃의 창이 내리꽂히고, 판금 갑옷조차 단숨에 관통하는 잿빛의 칼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쇄도하며, 얼음의 장벽으로 연계를 방해하는 동시에 장벽을 폭발해 날카로운 파편을 흩뿌린다.

‘시발, 개사기네…!’

뱀처럼 바닥을 기어 짓쳐든 화염의 폭풍을 간신히 피해낸 칸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야말로 다수의 마구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대마법사라 칭한 게 과연 허언은 아니었는지, 알파는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자마자 다양한 속성의 주문을 거의 무영창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더욱 최악인 것은, 놈에게 마나량의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이었다.

놈은 주문의 연료로 마나가 아닌, 다른 걸 쓰고 있었다.

“내 마나가 바닥날 거란 생각으로 덤비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걸세. 이미 말해주지 않았나? 영혼을 다루는 비의를 통해 대마법사에 올랐노라고. 애초에, 영혼을 연료로 하는 마도구에 대한 지식이 누구에게서 나왔겠나? 바로 나일세. 게다가 이 공간 안에서는 특히. 소모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드는군.”

애초에 체력적으로 애로사항이 존재하는 칸이었다.

처음부터 소모전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애초에 거리를 좁히는 것부터가 지극히 어려웠기에, 지지부진한 소모전의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끓어오르는 힘을 쓰면, 순간적으로 돌파할 수야 있겠지만…. 그 뒤가 불확실해.’

A등급 스킬은 결전기다.

체력을 코스트로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 칸에게 있어, 끓어오르는 힘으로 길을 뚫는단 선택지는 아예 논외다. 그렇다면, 일행이 분전해서 길을 뚫어주길 바라야겠으나….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카르얀이시여…!]

유물의 힘으로 그나마 전력을 보강한 파샨투였지만, 외물의 힘을 빌린 까닭에 그 한계가 명확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유물에 내재된 힘이 바닥나기 시작한 듯, 그 위력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었다. 알파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파샨투를 집중적으로 몰아붙이는 눈치였다.

칼엘손이라고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순수 인간의 한계까지 단련된 검호의 육체는 분명 대단하지만, 결국 순수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뛰어난 기량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움직임을 구현할 수는 있어도, 극단적으로 체력을 갉아먹게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것 또한 칼엘손 본인이었다.

“으아아아!”

서거거거걱!

한 번의 참격으로 수십 개의 주문을 끊어낸 칼엘손이 포효했다. 검의 극한에 도달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는 검귀의 포효. 그 안에 담긴 살기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심장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도 기운이 넘치는군.”

하지만 아주 먼 과거에 대마법사의 영역에 이르러, 공허에 몸을 맡긴 채 부활한 괴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되레 칼엘손을 향해 더욱 집중적인 주문 포화 세례가 쏟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칼엘손의 시야가 형형색색의 주문으로 가득 차기까지는 그야말로 찰나였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마법사가 검호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단 상식을 통째로 깨부수는 광경. 제아무리 검호라도 비처럼 쏟아 내리는 주문들을 모조리 베어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후우.”

숨을 뱉는다. 그리고 다시 숨을 삼킨다.

한 차례 격앙된 포효로 분노를 배출해낸 칼엘손은, 지극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정신을 검 한 자루에 온전히 쏟아부었다. 마치 검과 하나가 되려는 것처럼-.

‘지금!’

그리고 그의 두 눈이 뜨인 순간.

그를 향해 쇄도하던 주문들의 위로, 칼엘손의 검이 하나의 선을 긋기 시작했다.

“허…!”

알파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주문을 구현한 장본인이자, 대마법사의 영역에 도달했던 마법사인 그이기에, 방금 칼엘손이 펼친 일격이 얼마나 고절하고 뛰어난 무예에서 비롯된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대충 그어놓은 선처럼 삐뚤빼뚤해 보이는 저 선은, 주문을 구성하는 중심을 정확히 노리고 벤 흔적이다.

그 결과.

파스스스…….

주문의 폭격이 그대로 산화하여 흩어진다.

“대단하군.”

고작 한 번의 검격으로…. 알파는 솔직한 감상을 드러내며, 다시 한번 주문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한번 막아보라는 듯이, 더 많은 숫자의 주문을.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생긴 빈틈을, 서릿골의 야만전사는 놓치지 않았다.

콰직.

파샨투가 설원의 늑대처럼 알현실의 바닥을 박찼다.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 알파가 손을 휘저어 몇 개의 주문을 쏘아냈지만, 파샨투는 맨몸으로 주문을 받아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버렸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주먹을 감싸고 있던 정수의 힘이 파샨투의 전신을 보호하듯 뒤덮고 있었다.

정수의 폭주였다.

[카르얀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쾅……!

폭주한 정수가 일으킨 폭발은, 소유자인 파샨투는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알파까지 뒤덮었다. 그마저도 장막으로 방어했는지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 아예 피해가 없던 건 아닌 듯 알파가 휘청-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울려 퍼지는 진동.

쿵.

어느새 투척의 차징을 끝마친 칸이 내디딘 진각이었다.

────────.

칸의 손에서 벗어난 도끼가 빛이 되어 쇄도했고, 장막을 펼칠 새조차 없이 알파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놀랍게도, 칸의 도끼가 무언가에 가로막혀 튕겨나갔다.

혹시 모를 변수로 인해 닥칠 위기의 순간에 대비하여 피부 위로 얇게 펼쳐둔 장막. 그게 칸의 투척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 대가로 최후의 방패가 무너지고 말았지만-.

‘상관없다.’

알파가 웃었다.

장막은 다시 생성하면 그만이다. 그의 힘은 무한하다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넘쳐나고, 그에 반해 저들은 혼신의 발악이 가로막힌 셈이니. 가만히 막고만 있어도 알아서 자멸할 터였다.

물론, 얌전히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른 뒤에 하수인으로 만드는 것도 좋겠지. 이 세계를 침식할 때를 위한 첨병으로서…….

서걱.

그때.

시리도록 무정한 절삭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알파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고, 자신의 육체에 어깨부터 반대쪽 허리까지 이어지는 실금이 그어졌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또한, 그것이 검이 훑고 지나간 흔적이라는 것도…….

“후욱. 후욱…. 드디어 잡았다. 이 씹새.”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알파의 시야가 수십 갈래로 나뉘어 조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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