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엘펠란 토벌전 (4)
육체가 말 그대로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설령 트롤이라도 죽음을 면치 못할 피해. 하물며 주문쟁이라면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조차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일행 중 누구도 여기서 알파가 죽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으로 이어질 상황에 대비하여 조금이라도 호흡을 골랐다.
쿠구구구궁…!
그리고 세상이 붕괴한다.
말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거대한 공동의 천장부터, 벽으로 이어진 균열이 바닥까지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조각난 차원의 파편이 유리 조각처럼 아래로 추락했다. 머지않아 일행은 혼돈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공허.’
그래, 공허다. 이 공간을 설명할 단어로 그만큼 적합한 표현은 없으리라.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생명의 흔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때에는 검었고, 어떤 때에는 붉었으며, 또 어떤 때에는 물감을 마구 뒤섞어 만든 듯한 혼탁함으로 가득하다. 오로지 공허에서 비롯된 혼돈만이 존재하는 공간.
칸은 무의식적으로 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찍어서 확인했다. 아래로 추락하지 않는 걸 보면, 마경이 완전히 붕괴한 건 아닌 듯했다.
‘정말 그랬다면 꽤 곤란했겠지.’
제아무리 초인의 근력을 가졌다고 한들, 하늘을 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바닥이 있어서 다행이지. 상하좌우를 제대로 구분하기 힘든 공간이 바로 공허였다. 길잡이 스킬을 지닌 론조차도 이 안에선 길치처럼 헤맬 것이 분명했다.
“…쓰읍. 퉤!”
“괜찮나?”
“이게 괜찮아 보여? 시발. 이거 고치려면 금화 수십 장은 깨지게 생겼다고.”
그래, 괜찮아 보이지는 않네. 칸이 시정잡배처럼 침을 뱉는 칼엘손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알파가 쏟아낸 주문 포화를 일격에 모조리 벤 것이 놈에게도 상당한 무리였는지, 오른손이 아예 부러졌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전부 피를 줄줄 흘리고 있기까지.
그 정도 대가로 대마법사의 주문을 파훼한 칼엘손이 대단하다 표현해야 할지…. 제자리에 서서 검호를 저 지경까지 몰아붙인 알파가 그만큼 대단하다 해야 할는지.
“살아 있으면 된 거지.”
“물론. 그렇다!”
정수를 이용한 자폭으로 빈틈을 이끌어 냈던 파샨투가 피칠갑을 한 채로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으나, 야만인의 튼튼한 몸뚱어리라면 당장 죽을 일은 없다고 봐야 하리라.
‘물론, 상황이 여기서 끝난다면 말이지.’
제 곁으로 모여든 일행의 모습을 확인한 칸의 시선이 이제는 완전히 공허만이 남게 된 마경을 눈에 담았다.
방금 전까지 이곳이 대공의 비밀 공방이었다는 흔적은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고, 칼엘손에 의해 토막 난 알파의 시체도 공허의 일부가 되어 소멸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마경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행을 바깥으로 뱉어내지 않고 있었다.
“…꼴에 공허를 받아들였다 이거지.”
그때 칸이 중얼거린 혼잣말에 답하듯, 누군가가 웃었다.
목으로 낸 소리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
정신파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초월자들이 행사하는 의지처럼 세계에 간섭하는 수준의 힘은 아니었다. 칸의 의식에 드라우프니르가 말을 거는 것과 동일하게, 사념을 쏘아 보내는 형식의 의사전달법.
꾸물- 꾸물-
그리고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경의 혼돈이 움직였다.
혼돈은 끊임없이 제 색채를 변화시키며, 거대한 구체가 되어 한데 뭉쳤다. 이어서 수백, 수천의 촉수로 변해 서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비위로는 금방 토악질을 해대고 말 광경.
온갖 끔찍한 광경에 익숙한 일행들조차 무심코 얼굴을 찡그릴 정도였다.
─────.
혼돈의 구체가 다시금 정신파를 쏘았다. 사람의 언어로는 그 말을 해석할 수 없으나, 정신파를 받아들인 이들에겐 놈의 의지가 어렴풋이 전해졌다.
놈은 지금 웃고 있었다.
인간의 거죽을 벗고, 진정 혼돈의 일부가 된 것에 하릴없는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존나 역겹게 생겼네.”
물론, 평범한 인간의 감성으로는 거대한 촉수 괴물로 보일 뿐이었다.
그때 혼돈의 구체가 다시금 정신파를 뿌렸고, 수많은 촉수로 엮인 혼돈의 구체 위로 거대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꿈뻑. 꿈뻑.
촉수의 한가운데 열린 눈구멍은 혼돈으로 가득 찬 상태였지만, 그것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칸. 자신을-.
─────!
시발, 뭐라는 거야. 놈이 대뜸 격분하며 정신파를 흩뿌리는 사이, 직전에 투척했던 도끼를 ‘아라크네의 은반지’로 회수했다. 그리고는 냅다 달려들었다. 여전히 정신파를 터뜨릴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던 구체의 일부가 뜯겨져 나갔다.
───?
이번에 터진 정신파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고통, 혼란, 의문. 대충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 정도의 의미를 가지리라.
‘물음표는 뭐가 물음표야, 씹새가.’
허공에 뜬 놈을 공격하기 위해 공중으로 도약했던 칸이 몸을 빙글- 회전하며 마검을 쥐었다. 그리고는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재차 뛰어올랐다.
촤아아악!
마검이 놈의 촉수를 부드럽게 관통했다. 혼돈의 구체를 그대로 관통한 칸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그리고 혼돈의 구체의 눈동자가 데구르륵 굴러갔다.
“뭘 꼬라봐.”
도끼를 쥔 팔이 순간 부풀어오르고, 어깨와 손목의 힘만으로 도끼를 투척했다. 공중에서 불안정한 자세라는 조건은 큰 악조건이랄 것도 없었다. 투척 스킬의 힘입어 빠르게 날아든 도끼가 구체의 눈동자를 향해 처박혔다.
콰지직.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촉수로 된 몸뚱어리가 고무줄처럼 주욱- 뒤로 늘어났을 뿐. 도끼에 의해 관통되거나 박살 나는 일은 없었다. 놈의 육체를 이루는 촉수들이 바쁘게 꿈틀거리며, 충격을 상쇄한 것이다.
‘시발.’
이제는 하다하다 촉수 괴물이랑 부대껴야 하는 처지라니.
문득 차오르는 혐오감을 삼켰다. 겉보기만큼이나 칼엘손과 파샨투의 부상이 심각했다. 입으로는 싸울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공허의 괴물을 상대로 부상자는 방해될 뿐. 그러니 별수 있겠는가.
자신이라도 나서서 촉수를 죄 터뜨려버리는 수밖에. 물론, 상대적으로 멀쩡할 뿐. 현재 자신의 상태도 만전이라 할 수 없는 바. 칸이 선택할 유일한 전술이란 결국-.
‘속전속결로 간다.’
꽈드득…! 도끼와 연결된 ‘아라크네의 침묵실’을 당기자 도끼가 바로 손에 날아와 잡혔다. 그때쯤 혼돈의 구체도 촉수를 움직여 본래의 형태를 되찾은 상태였다. 다만 그 크기가 이전보다 아주 미세하게 줄어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콩알만 해질 때까지 족치면 된다는 얘기지.
쿵. 도약으로 거리를 좁히고, 속도를 그대로 실어 일격을 가할 작정으로 칸이 진각을 밟았다. 투명한 바닥의 위로 파문이 번지는 동시에, 그의 육체가 포탄처럼 쏘아지려던 순간이었다.
피슛.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고, 왼쪽 어깨에서 시작된 고통이 전신으로 번졌다. 고통을 참는 데에 익숙한 칸조차 무심코 움찔거릴 정도의 격통이.
투. 쾅─!
그러나 멈칫거림도 잠시.
칸의 육체가 예정된 움직임을 따라 혼돈의 구체를 향해 쇄도했다.
피슛. 피슛.
‘촉수…?!’
이번에야말로 소리의 정체를 포착한 칸이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다. 놈의 육체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쏘아졌던 것. 당연한 소리지만, 촉수 괴물이 촉수를 써서 공격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촉수가 칸의 민첩 스탯으로도 포착하기 힘든 수준으로 빠른 데다가, 그가 장비한 ‘설산백랑의 털가죽’을 단숨에 꿰뚫을 정도의 관통력을 지닌 건 문제가 된다. 만약 전투 예지를 믿고 회피하지 않았다면, 단숨에 심장을 관통당했으리라.
────!
제 공격을 왜 피하냐고 말하는 듯한 정신파.
‘너 같으면 맞아주겠냐?’
순식간에 놈의 바로 앞까지 당도한 칸이 도끼를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피슛-. 도끼의 궤적으로 촉수가 날아들어와 잘렸다.
[전투 예지 (B) - 07%]
─오로지 전투 상황 속에서 발동한다.
공허의 괴물이라는 최악의 난적을 상대하며, 최고조에 이른 집중력. 그를 통해 전투 예지를 활용하는 방법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그에 따른 숙련도 상승이 곧장 뒤따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혼돈의 구체가 쏘아낸 촉수들이 도끼와 마검을 향해 저절로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콰드드득!
제 공격이 통하지 않자, 혼돈의 구체가 방법을 바꾸려는 듯. 몸뚱어리를 구성하는 촉수의 일부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하네….’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팔을 혼돈의 구체가 곧장 칸을 향해 내리찍었다. 촉수로 이루어진 근육이 사람의 것처럼 부풀며 몸집을 부풀리자, 그 크기가 칸을 능가할 정도였다.
굳이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기에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릴 거란 사실을-.
‘받아친다.’
정면에서.
왼발은 축이다. 그를 중심으로 육체가 비스듬히 회전하고, 조금 굽혀진 하체가 단단히 받쳐주는 상태에서 마검을 양손으로 쥔 채 올려긋는다. 쯔거거거걱─! 붉은색의 일선이 촉수로 이루어진 팔을 그대로 훑는다. 촉수들이 검격에 저항하듯 끊임없이 꾸물거렸지만, 칸의 일검은 올곧은 선을 그리며 공허로 가득찬 하늘까지 치닿았다.
─안타레우스류 검술(C) 획득.
─태고의 혈통 효과로 안타레우스류 비전 검술(B) 등급 상승.
[안타레우스류 비전 검술(B) - 14%]
─먼 과거, 미들랜드에 강림했던 악마와 그 하수인들을 척살하는 데 앞장섰던 대검호가 창안한 검술. 태생적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덩치와 괴력을 지닌 악마의 심장을, 나약한 인간조차 꿰뚫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 비전을 수련한 이의 검은, 그 어떤 외력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혼돈의 구체가 비명으로 이루어진 정신파를 터뜨렸다. 그토록 거대하던 촉수 괴물이, 이제는 제법 비벼볼 만한 사이즈로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싸움이 할 만해졌느냐?
“후욱.”
그렇지는 않았다. 체력의 안배를 완전히 무시하고 전력을 투사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놈을 몰아붙이는 대가로, 목숨을 배팅한 셈이다.
‘언제는 안 그랬나.’
오른발을 내디뎠다. 코앞까지 닥친 촉수의 그물을 마검으로 단숨에 끊어낸 칸의 몸이 덜컥- 멈췄다. 그물의 틈에 숨겨둔 촉수가 복부를 관통한 것이다.
도끼를 내려쳐 촉수를 잘랐다. 복부를 중심으로 작열통을 연상케 하는 격통이 번졌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왼발을 내디뎠다. 조금 작아진 크기의 녀석이 정신파와 함께 커다란 불꽃을 일으켰다. 공허의 힘이 뒤섞인 불꽃이, 용의 숨결과 닮은 형태로 쏘아졌다.
아니, 용의 숨결이 맞았다. 칸은 알-라스델에서 처리한 ‘와이번’을 떠올리며, 오른 가슴의 성흔에서 기운을 이끌어 냈다. 허공에 나타난 순백의 방패가 숨결을 가로막았다. 푸화하하학!
그때는 순백의 방패가 숨결을 막아냈지만, 이번에는 공허의 힘이 뒤섞인 숨결이었다.
조금씩 밀려나는 순백의 방패 너머로 전해지는 열기 탓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았다.
야만전사의 감각이 숨결과 그걸 쏘아낸 혼돈의 구체의 기척을 포착했다.
다시 오른발, 투척 스킬로 던진 도끼가 용권풍을 일으키며 숨결을 일직선으로 거슬러오른다. 마치 유성우가 떨어지는 장면을 거꾸로 재생한 듯했다. 그렇게 숨결을 완전히 관통하면서 역할을 다한 도끼가 파스스- 흩어졌다.
‘제법 손에 익었는데.’
그런 아쉬움은 뒤로 했다.
정의의 신한테 새로 하나 해달라고 말하면 될 테니. 마탑의 마구스 제롬이 약속한 무기에 신의 축복이 더해지면, 더 쓸만하지 않겠는가.
허전해진 왼손에 ‘네리아의 마법 송곳’을 쥐고서, 칸이 마경에 들어오고서 유독 조용해진 드라우프니르를 향해 말했다.
‘어이, 저번에 그거 다시 해봐.’
[…….]
별다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몸 안에서 일어난 피의 불꽃이 전신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