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엘펠란 토벌전 (5)
‘미친놈.’
칼엘손은 당혹과 경악을 좀처럼 감출 수 없었다.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촉수 괴물을 향해 칸이 혼자 달려들었을 땐, 그나마 쓸 수 있는 왼팔이라도 써서 싸워야겠단 마음에 몸이 저절로 튀어나갔다. 다만, 가장 먼저 뛰쳐나갈 줄 알았던 파샨투가 그를 붙잡은 탓에 그러지 못했다.
서릿골의 야만인은 죽음이 예정된 싸움일지라도 기꺼이 웃으며 받아들인다…. 그 소문은 반쯤 사실이고, 반쯤은 틀린 사실이라는 얘기다.
물론, 서릿골의 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사답지 못한 행동을 그 이상으로 꺼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희생해 몸을 내던진 전사의 각오를 짓밟고, 제 용맹을 증명하기 위해 투쟁을 방해하는 행위는 그들의 기준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전사답지 못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제기랄…!”
파샨투가 그러한 사실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느낄 수 있었기에, 칼엘손도 조용히 칸의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대신 언제라도 나설 수 있게, 뽑아둔 검은 그대로 손에 쥔 채로.
그러나 칼엘손이 기다리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콰과광─! 쿵! 쩌어어억……!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어지간한 저택에 버금가는 촉수 괴물을 상대로 조금도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칼엘손이 본 게 헛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힘에서는 칸이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 피안개. 저번에도 본 적이 있다.’
과거 대공의 제1 기사를 상대하던 때에도 둘렀던 피안개를 꺼낸 이후로, 칸의 일격이 적중할 때마다 촉수 괴물의 몸집이 눈에 띄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대하던 괴물이… 이제는 파샨투보다 조금 큰 수준까지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녀석도 지쳤어.’
촉수 괴물을 몰아붙인 대가로 지불한 것이 결코 작지 않았다.
움직임이 처음과 달리 눈에 띄게 굼떠졌고, 촉수의 공격을 허용한 탓에 뚫린 구멍만 한 손으로 셀 수 없는 숫자였다. 물론, 저 괴물을 저렇게까지 몰아붙인 대가로는 싸다고 봐야겠지. 칼엘손이 경악을 느낀 것은 그 부분이었다.
‘저 괴물 같은 힘이야 이미 알고 있던 거지만….’
마치, 미래를 내다보고 움직이는 듯한 움직임. 육체를 강화해주는 피안개. 괴물이 쏘아낸 불꽃을 막아낸 순백의 방패. 무엇 하나라도 범상치 않은 것이 없었다.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어중이떠중이 용병을, 뛰어난 전사로 만들어 줄 법한 것들이 고작 한 사람의 야만전사에게 집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원류를 알 수 없는 검술까지 다룬다. 그나마 있던 약점이 점점 보강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칼엘손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그 겁쟁이 꼬마가…….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옆에서 파샨투가 무어라 말했지만, 서릿골의 언어인지라 알아듣지 못했던 칼엘손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아귀를 쥐락펴락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면, 저놈에 대한 정보부터 새로 갱신해야겠지.’
그리고 조합의 본부가 그의 의견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조합의 명단에, 또 새로운 이름이 올라가겠군.’
*
*
*
머릿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실제로도 ‘혈화의 술’로 인해 체외가 타들어가는 격통에 휩싸이는 도중이지만,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닌-.
집중력을 너무 끌어올린 나머지, 어떤 한계에 도달하고만 느낌이라고 해야겠지.
‘스킬을 사용한다는 느낌’으로 발동하던 안타레우스의 비전 검술은 어느새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모든 움직임에 특유의 묘리가 자연스레 깃든다고 해야 할까.
서걱. 촤아악─!
도중에 방향을 바꾸어 뒤통수를 찔러온 촉수를 돌아보지도 않고 잘라냈다. 그리고 그대로 회전에 몸을 실어 휘두른 검이 커다란 반원을 그렸고, 촉수를 뭉텅이로 떨어뜨렸다. 그 즉시 도약을 써 사선 방향으로 뛰었다.
───!
닥쳐, 새끼야.
콰직! 어지간한 사람의 머리통만 한 주먹에 적중당한 혼돈의 구체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물 흐르듯 몸을 거꾸로 뒤집어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한 칸의 육체가, 그 위로 착지했다.
몸집이 작아진 만큼 민첩해진 건지, 용케 몸을 빼낸 혼돈의 구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번에도 그 뜻이 명확하게 전달됐지만, 칸은 마검으로 눈동자를 찔러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콰직…!
그러나 생각처럼 드라우프니르가 놈의 눈동자를 파고들지 못하자, 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놈의 신체를 이루는 촉수가 이상할 정도로 딱딱해진 탓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부숴뜨릴 생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때-.
위험. 전투 예지가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댔다. 아주 잠깐이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질 정도로. 하지만 덕분에 늦지 않게 순백의 방패를 전개할 수 있었다.
‘모자라…!’
그러나 모자라다. 숨결을 막으면서 상당량의 기운을 소진한 탓에, 기껏 꺼낸 순백색 방패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희미하게 일렁였다. 일그러진 얼굴로 다른 수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사이. 전투 예지가 예고한 위험이 들이닥쳤다.
피슈슈슈슉!
혼돈의 구체가 경화 상태의 촉수를 그야말로 사방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한 것. 최후의 발악이다. 제 죽음을 직감한 놈이,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위협하는 존재를 모조리 말살하기로 작정한 거다. 그건 즉, 이번 공격을 기점으로 승패가 확실하게 한쪽으로 기울 거란 얘기였다.
투두두두둥…! 챙!
그러나 촉수의 세례를 받아낸 지 몇 초가 지나지 않은 시점에 순백의 방패가 완전히 깨졌다.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검호처럼 기예에 가까운 검술이라도 있었다면야 검으로 빗겨내 볼 시도라도 하겠으나, 지금 칸의 실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이건 솔직히 칼엘손이라도 어쩔 수 없겠다 싶었다.
손가락 굵기의 비수를 기관총으로 발사하고 있다 생각하면 편하리라.
날아드는 촉수를 전부 쳐내서 놈의 발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가. 억지로 뚫고 완전히 끝장을 내던가. 둘 중 하나라도 선택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무엇도 쉬운 선택지는 아니었다.
‘어떻게 했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칼엘손이 보여주었던 놀라운 일검(一劍)이었다. 그를 향해 쇄도하는 주문의 포화를 단번에 끊어버렸던-.
불가. 당연했다. 그의 검술은 검호의 그것과 비교하기가 민망한 수준이었으니.
그럼, 안타레우스의 검으로 튕겨내는 건?
‘불가.’
안타레우스의 비전 검술의 신묘함은 분명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용했다. 스킬의 등급이 더 올라간다면 모를까….
투척 스킬로 공백을 만들고 그 틈으로 파고드는 건? 최대 위력을 내기 위한 차징 시간을 확보할 수 없기에 불가.
끓어오르는 힘. 불가. 여기서 힘이 더 세져도 의미가 없다.
도약으로 벗어나는 건? 놈의 촉수는 방위를 가리지 않고 쏘아지고 있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를 열어서 촉수를 그 안에 집어넣는 건? 그의 육체를 다 가릴 만큼 넓은 통로를 여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다음, 다음, 다음….
‘불가.’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가진 어떤 수를 동원해도, 촉수의 세례를 파훼하거나 피할 방법이 없음을, 칸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대신, 방법은 찾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스스로가 가장 잘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괴물 같은 몸뚱어리에 빙의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특기.
그건 파훼도, 회피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버틴다.’
그리고 나아간다.
어깨에 두른 ‘설산백랑의 털가죽’을 방패처럼 손에 쥔 칸이 촉수의 세례를 향해서 걸음을 내디뎠다.
─투사체막이의 가호 : 투사체에 대해 보통 내성을 지닌다.
그 즉시, 둔중한 충격이 설산백랑의 털가죽을 뚫고 전신을 두들긴다. 애초부터 방패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리라 기대하고 꺼낸 건 아니다. 조금이라도 육체에 전해지는 충격을 감소해주면, 그거로 족하다.
‘앞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단단하게 굳어진 촉수가 주는 충격이 한 층 심화되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걸음을 늦추면 뒤로 밀려날 것이 분명했기에. 그렇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고통은 심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혈화의 술’이 주는 작열통이 전신을 지배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육체의 부하는 고스란히 누적되는 법이었고, 그때 촉수에 얻어맞은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쿵.
결국, 한쪽 무릎이 꿇려졌다.
[도약]
더 이상 써먹지 못하게 된 다리 대신, 그나마 멀쩡한 오른 다리로 땅을 찍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촉수 세례 탓에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땅에 착지하게 되었다. 그러건 말건, 칸은 오른 다리로 땅을 밀어내듯 박찼다.
그러는 와중에 힘이 풀린 걸까. 아주 조금이라도 충격을 줄여주던 설산백랑의 털가죽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는 정말 맨몸으로 쏟아지는 공격을 받아내게 생겼지만, 어차피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다시 뛰었다.
[도약]
어디를 잘못 맞은 건지,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서 그냥 다시 뛰었다.
[도약]
피를 너무 흘려서 앞이 안 보이게 되었지만, 어차피 놈의 위치는 고정된 상태였기에 개의치 않았다.
─────!
놈이 무어라 정신파를 쏘아댔다. 너무 복잡한 감정이 혼재한 탓에 알아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이해했다.
‘놈이 날 두려워하고 있다.’
[도약]
그리고 다시금 오른발로 뛰어올랐을 때.
[불굴의 의지]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피로 붉어진 시야 사이로, 이제는 난쟁이와 비슷하게 작아진 놈이 보였다.
놈과의 거리도 확인했다. 불과 열 걸음도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진각을 밟았다.
[투척]
마석의 마나를 흡수한 네리아의 마법 송곳이 주문을 휘감은 채 길을 열었다. 물론, 쏟아지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금세 어디론가 튕겨져 나갔지만-.
그것만으로도, 남은 거리를 단숨에 좁힐 정도로는 충분했다.
터억.
“잡았다.”
제 손아귀를 내려다본 칸이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하는 법이지. 대충 몸으로 때울 수 있으면, 복잡하게 머리 굴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아주 미약한 정신파가 머릿속을 울렸다. 칸은 구태여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스킬의 효과가 끝나기 전에, 녀석을 완전히 끝장내야만 했다.
그렇게, 손아귀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아진 녀석을 향해 드라우프니르를 찔러넣으려던 칸의 눈앞으로 반투명한 창이 몇 개씩이나 떠올랐다.
레벨업 메시지와 투척 스킬이 A등급이 되었다는 메시지가.
뭐야, 아직 찌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발악하던 녀석이 갑자기 픽- 죽어버린 것에 칸이 의아함을 느낌과 동시에, 마경이 완전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마경의 핵을 품고 있던 놈이 죽음으로써, 더 이상 차원을 유지할 수 없어 소멸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그 증거로, 알 수 없는 인력이 불굴의 의지가 해제되면서 탈진한 칸의 육체를 잡아당겼고 그건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차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아마 잠깐만 기다리면, 그들이 들어왔던 마경의 입구로 배출되리라.
‘그 녀석들이라면, 지금쯤 충분히 공도를 장악하고도 남았겠지.’
마경을 생각하고 준비한 계획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미리 손을 써둔 덕분에 마경을 클리어하고도 더 싸우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싸우라고 해도 싸울 몸 상태도 아니고.
칸은 그냥 편하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대공성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며…….
그렇게 점차로 아득해지는 의식 사이로, 더 이상 들려서는 안 될 정신파가 스며들었다.
‘뭐……!’
머릿속에 직접 때려박히는 그 명확한 사념에, 칸이 무어라 반응하려 했으나 한계에 달한 육체가 강제로 의식의 전원을 꺼버렸다.
공허의 하수인이 된 알파가 마지막에 던진 사념, 그것은….
‘반가움……?’
*
*
*
[레벨 업!]
[레벨 26 -> 28]
[근력 : 62 -> 66] +1
[민첩 : 34 -> 36] +2
[체력 : 36 -> 38] +6
[지능 : 2]
─투척(B) 등급 상승. 용아포(A) 획득.
[던전, 침묵하는 원혼들의 비명을 클리어했습니다.]
─성공 보상 : 마경의 핵 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