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새로운 북부 (1)
‘지치는군.’
충혈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거진 열흘이 넘도록 이어진 논의는 제아무리 머리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도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한 중노동이었다. 하물며 그 사안이 사안인지라, 허투루 준비할 수도 없어서 밤잠까지 줄여가며 사전 준비를 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대충 그림은 잡혔다.’
머릿속에서 일련의 사안들을 모조리 정리해둔 뒤, 헤른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곧장 개인 집무실을 나섰다.
허약한 몸뚱어리가 조금이라도 쉬라며 신호를 보내왔지만, 한가롭게 쉴 정도로 여유로운 입장이 아니었다. 그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열심히 몸을 갈아야 할 때였다.
그는 자신이 궁중백이던 시절에 제공받았던 집무실을 벗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군….’
이제는 일말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거닐던 헤른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공성을 집어삼킨 침식은 두 야만전사와 검호의 활약으로 소멸했다. 당시 성 안에 머무르던 모든 인간을 집어삼킨 채로. 그에 반해 대공성은 너무나 멀쩡해서, 이따금 섬뜩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무엇보다, 휑해진 복도를 지날 때면 자연스레 떠올랐다.
만약, 칸이 자신을 납치하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지는 못했겠지.’
이렇게, 새로운 야망을 위해 몸을 불사르지도 못했을 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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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른이 향한 곳은, 대공성 안에서도 그나마 익숙한 장소라 할 수 있는 알현실이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문을 지키고 선 기사도 없었고, 알현실의 문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처럼 활짝 열린 상태였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니, 수십 쌍의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쯧. 눈빛들 하고는….’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은 대개 비슷했다. 시기, 조급함, 경멸, 그리고 경계….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본래 그의 신분은 이 자리에서 가장 바닥이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으나, 우연찮게 대공의 눈에 들어 궁중백이 되고, ‘그날’의 혼란을 틈타 단번에 핵심적인 위치를 잡아채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라 봐야겠지.
헤른은 그를 향해 모여든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알현실의 중심에 놓인 원탁으로 향했다. 오늘의 회의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원탁은 서로 간의 우위가 없다는 의미에서 상석의 구분이 없는 형태였고, 벌써 대부분의 자리가 찬 상태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열이 가려지기 마련이지.’
귀족이란, 본능적으로 서로 간의 고하를 나누는 인종이었으니까. 제아무리 상석의 구분이 없다고 한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상석에 가까운 자리를 본능적으로 구분하고 자기 지위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고서 앉았다.
“오, 왔는가! 헤른!”
그때 에르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귀족으로서의 예법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누군가 헛기침을 뱉었지만, 눈치없는 에르몽 답게 헤실- 웃을 뿐이었다.
헤른은 옅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답해주곤, 본인의 자리를 찾아갔다.
남은 빈자리는 모두 셋.
가장 문쪽에 가까운 자리와 알현실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하나씩.
그리고 알현실의 가장 안쪽, 옥좌의 바로 아래. 이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상석’이라 판단한 자리가 하나-.
‘옥좌를 기준으로 상석을 나누고, 그쪽에서 가까울 수록 영향력이 강한 순이라는 건가.’
‘상석’의 좌우를 차지한 이들의 면면이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상석의 왼쪽, 도저히 귀족이라 생각하기 힘든 장대한 기골과 흉터 가득한 얼굴은 그가 거친 삶을 살아온 인간임을 드러냈다. 아주 당연한 소리지만, 그는 귀족이 아니었다. 귀족은커녕, 이 자리에서도 가장 미천한 신분이 바로 그였다.
대공이 북부의 군벌들을 소집했던 당시 가장 먼저 합류를 택했던 군벌의 수장이자, 현재 로-엘펠란에 집결한 군벌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쯤으로 취급받는 남자가 바로 그였다.
실제로 휘하에 소속된 병사만 육십에 달하는 데다가, 대공의 지원으로 모두가 질좋은 장비로 무장했다. 대공의 병사들이 대부분 억류되거나 사망한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무장 세력으로 부상한 셈.
그에 반해, 상석의 오른쪽 자리를 차지한 젊은 청년은, 진짜배기 귀족이었다.
‘랑테 백작의 장남.’
그는 바로 카루냐 평야에서 대공의 마법에 목이 잘려 죽은 랑테 백작의 장남이었다.
죽은 아비의 뒤를 이어 랑테 백작이 된 그는, 대공의 휘하로 합류하지 않고 도시의 문을 걸어잠궈버렸다. 어찌 보면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대공에게 반기를 든 인물인 셈인데, 대공의 반란이 진압된 지금에 이르러서 그 행동이 빛을 발했다.
대공에게 반기를 들고 가장 먼저 참살당한 아비의 뒤를 이어, 대공에게 항전을 천명하고서 끝까지 버틴. 상징적인 인물로 급부상한 것이다.
‘자연스레 명분을 쥐게 된 셈이지. 앞으로 재편될 북부의 세력 구도에서, 중심에 설 수 있는 명분을.’
왕가의 입장에서 향후 북부의 방향타를 줄 인물로, 저 젊은 귀족 만큼 적합한 인사가 없는 까닭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 중, 유일하게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 아닌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대공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로-엘펠란에 들어와 물밑에서 영향력을 키운 능력은. 어찌 보면 군벌들의 수장인 남자보다도 경계해야 할 만한 것이었다.
“늦지 않게 오셨군요, 리브론 궁중백. 너무 안 오시길래 과로로 쓰러지신 줄 알았습니다.”
“그 이름은 진작에 버린 지 오래요. 그리고 내 몸 상태는 내가 알아서 관리하니, 염려는 집어두시오.”
“하하. 그렇습니까? 자, 그럼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회의를 시작해야 하니.”
그래, 제법 견제가 날카롭군.
느닷없이 말을 거는 젊은 랑테 백작에게 웃으며 화답한 헤른이 거침없이 안쪽으로 향했다. 모두의 이목이 그의 발끝에 집중된 가운데.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중간에 위치한 자리를 지나쳤다.
“…….”
“……!”
몇몇 귀족이 그에 헛숨을 삼켰고, 젊은 랑테 백작은 재밌다는 듯 웃었으며, 군벌들의 우두머리는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냈다. 헤른은 그에 묘한 짜릿함을 느끼며, 본인이 생각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소.”
옥좌의 바로 아래, 상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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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은 당장 죽이는 게 맞다. 그것들은 폭탄이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데다가, 터지면 어디까지 불태울지 가늠조차 안 되는 폭탄이지. 그놈들을 대체 살려서 어디에 써먹겠다는 거지?”
“아니 될 말입니다. 페루 경, 그들의 처우는 왕가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옳아요. 어찌 됐건 그들은 아르곤 왕가에 반기를 든 반역자들이고, 결과적으로 그들을 벌하는 것은 왕가여야 그림이 삽니다.”
“왕가라…? 북부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관심조차 안 보인 그 왕가를 말하는 건가?”
“말조심하게─! 아르곤의 신민된 자가 감히 왕가를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다니…!”
회의에 참석한 귀족 중 하나가 언성을 높이자, 다른 귀족들도 한목소리로 군벌들의 우두머리인 페루를 성토했다.
그러나 페루는 코웃음을 치며 되레 귀족들을 비꼬았다.
“대단한 충신들 납셨군. 피차일반, 대공의 휘하에 들어간 주제면서. 아니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무릎을 꿇은 작자들이니. 나보다 못한 건가?”
그 말에 귀족들이 일제히 반발했다. 페루는 귀족들이 하는 양을 비웃으며 지켜보다가, 방금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랑테 백작에게 화살을 돌렸다.
“애초에, 그쪽이 포로와 관련한 처우를 논할 자격이라도 있나? 유유자적 제 도시에 틀어박혀선, 상황이 다 끝난 뒤에 승냥이처럼 기어들어온 주제에.”
“그렇게 말하니 면목이 없습니다만.”
페루의 직설적인 비난에도 젊은 랑테 백작은 부드러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찌 됐건, 논의를 위해 마련한 자리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이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주신 순간부터, 저에게도 발언권이 있는 셈이고요. 전 그런 기대에 부응해, 그나마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뿐입니다.”
“흐. 혀가 제법 매끄러우시군.”
“칭찬으로 듣죠…. 그럼, 아직까지 고견을 듣지 못한 분이 계시니. 그분께 의견을 묻는 건?”
랑테 백작의 말에 얼굴까지 붉혀가며 소리치던 귀족들이 상석에 앉은 헤른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기껏 상석을 차지하며 본인의 위치를 과시했으면서도 헤른은 발언을 아끼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듣자 하니, 그날에 가장 먼저 움직여서 혼란을 바로잡으셨다던데. 그런 공의 지혜를 우리에게 들려주시겠습니까?”
“…결국 쟁점은 둘인 듯한데. 내 생각에는 어느 쪽도 나쁘지는 않은 선택지요. 하나, 그보다는 더 나은 선택지가 있어 보이는군.”
“하하…. 그렇습니까? 궁금하군요.”
“별거 아니오.”
헤른은 미리 준비해둔 정답을 꺼냈다.
“알-라스델에 묻힌 와이번 시체. 지금도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많은 관심을 두고 계신 그것의 발굴에 포로들을 쓰는 거요. 그렇게 나온 부산물은 원하는 이가 값을 치르고 매입하고. 그 돈은 북부의 재건에 쓰는 방식으로. 그리한다면 민심과 실질적인 이득. 모두를 잡을 수 있겠지.”
회의실이 적막에 잠겼다. 헤른의 말대로 했을 때 따를 손익을 계산해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가장 빠르게 손익 계산을 마친 인물은 역시나 북부의 젊은 백작이었다.
“좋군요. 붙잡은 포로들은 모두 어지간한 장정 두셋의 몫을 하는 정예병들이니. 게다가 포로들을 노역에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우리의 지배력이 여전하다는 걸 각인시킬 수도 있을 터.”
“일단 부려먹은 다음에, 왕가에서 사람을 보내면 그에 따라 처우를 결정하면 된다는 얘긴가?”
“맞소.”
랑테 백작은 퍽 흡족하단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페루의 경우에도 표정엔 불만이 가득해 보이지만, 내심 만족한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이득 때문에 대공의 손을 잡은 이다. 그만한 이권을 약속해주기만 하면, 누구의 손이라도 잡을 사내란 말이다.
“그럼, 이 안건은 이대로 확정하고. 자세한 사안은 추후 더 논의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러시죠. 이다음은… 대공과 그의 가문이 오랜 세월 축적한, 주인 잃은 보화들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차례…….”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첫 안건이 마무리되는가 싶던 그때.
몹시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장내에 난입했다.
“주인이 여기 있는데, 무슨 논의를 한다는 거지.”
“……!”
헤른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다.
다른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난입자의 정체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 헤른처럼 당혹감과 낭패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저들은 ‘그날’에 벌어진 소동을 바로잡은 장본인이, 문명화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한 야만인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고 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들은 아직, 대공의 반란이 누구의 손을 거쳐서 해결됐는지 모른다.’
그저 용병조합의 총지부장과 흑익공의 대전사, 그리고 귀족과 군벌 세력을 규합한 헤른이 주도하여 사건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헤른은 안다.
자신은 저 야만인의 손에 완전히 놀아났으며, 그저 혼란을 수습할 장기말로 쓰였을 뿐이라는 걸. 어쩌면 용병조합의 총지부장과 흑익공의 대전사까지도….
“저자는…….”
“총지부장과 흑익공의 대전사와 함께 마경을 토벌한 야만인이로군요.”
랑테 백작이 예상외의 상황이 퍽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제법 흥미로운 얘기를 하는군요. 설마…. 대공의 재화가 본인의 것이라 주장하는 겁니까?”
“다 들어놓고 뭘 또 묻는 거냐. 뺀질이.”
“빼, 뺀질이…?”
차기 북부의 실권자로 부상할 것이 유력한 자신에게, 그토록 무례한 언사를 내뱉을 줄은 몰랐는지. 랑테 백작이 할 말을 잃고 입을 쩍- 벌렸다.
그러건 말건.
난입자, 칸은 성큼성큼 회의실 안쪽으로 향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전신이 흉기로 이루어진 야만인이 대뜸 난입해 행패를 부리자, 말릴 생각은커녕 누군가 나서주길 기다렸다. 저 사람 머리통만 한 주먹을 보고도, 감히 누가 있어 나서겠는가.
“이런, 그쪽의 주장은 일단 들어줄 테니. 빈자리에 가서 앉는 것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랑테 백작이 용기 있게 나섰지만, 칸의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상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쳐버린 칸이 향한 곳은-.
털썩.
“이제부터 내 재산을 어떻게 쓸지는, 얘기를 들어보고 결정하지. 그러니까….”
대공성의 주인만이 앉을 수 있는 옥좌(玉座)였다.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