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97화 (97/132)

#097화. 새로운 북부 (2)

칸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혔다.

‘이 새끼들이 감히…. 누구 물건을 탐내?’

이래서 귀 길쭉한 짐승과 귀족, 주문쟁이를 조심해야 하는 거다. 이런 날강도 새끼들. 마경에서 대체 무슨 개고생을 했는지 알고…. 마음 같아서는 친히 서릿골의 방식으로 훈계를 시작하고 싶었으나, 어쨌거나 귀족은 귀족이다.

저놈들이 모조리 뒈져버리면 안 그래도 혼란한 북부가 정말 혼돈의 구렁텅이에 빠질 터.

‘이런 시발 것들….’

무엇보다 저들에게 자세한 내막을 밝히지 않은 것 또한 칸의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저놈들이 과욕을 부린 셈이니. 칸은 현대인의 자비로운 심성을 발휘해 한 번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 안건이 뭐였지?”

“…무례하군요.”

“무례?”

“예, 무례. 그대가 칼엘손 총지부장과 흑익공의 대전사와 함께 마경을 토벌했다는 야만전사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이 자리에서 보인 그 무례한 언행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군요.”

뺀질거리는 놈의 입심이 제법이었다. 나이도 어린 자식이 옥좌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 걸 보면, 생각보다 지위도 높은 놈 같고. 하지만 놈은 실책을 저질렀다.

“어쩌라고.”

“예?”

“야만인이 무례하게 구는 거 처음 보나?”

지금의 칸은, 어쭙잖은 신분제 놀이에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무례는 너희가 먼저 저질렀지. 내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 개같이 굴러서 얻어낸 전리품을, 편하게 앉아서 구경이나 하던 놈들이 도적질하는 꼴을 본 내 기분이 어떨 것 같나?”

“그게 무슨….”

“너. 뺀질거리는 놈. 마경이 침식을 일으킨 날에 너는 뭘 하고 있었지?”

칸의 물음에 랑테 백작의 입이 다물어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날에 랑테 백작은 제 도시에 틀어박혀서, 제 기사들을 보초로 세워둔 채 침실에 든 상태였으니까. 대공성에서 무슨 난장판이 벌어졌는지 꿈에도 모르고….

“대답을 못 하는군.”

“저는 북부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은 유일한 도시의 주인으로서…….”

“아무것도 안 했다는 소리군.”

상대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지만, 칸의 질문은 뜻밖에도 랑테 백작의 의표를 찌른 셈이었다. 대공의 휘하에 들지 않았다는 명분조차, 직접 마경을 토벌한 영웅 앞에서는 내세울 것이 못 됐다.

“나는 직접 대공성에 침입했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재앙을 미연에 방지했다. 만약, 내 손에 의해 마경이 소멸하지 않았다면. 침식은 대공성에서 그치지 않고 로-엘펠란을 집어삼켰겠지. 어쩌면 그 이상도. 내가 그걸 막았다. 직접 피를 흘려가며. 목숨을 걸고.”

“어차피. 용병조합의 검호와 흑익공의 대전사가 다 한 것 아닌가?”

그때 끼어든 것은, 군벌들의 우두머리인 페루였다.

“흑익공의 대전사처럼 명성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야인이라…. 뭐, 야만전사들이 잘 싸우는 건 익히 들은 소문이지만. 그래봤자지. 설마 제국에서 온 검호보다 강하진 않을 텐데?”

페루는 그렇게 말하고서 의자를 박차고, 칸이 차지한 옥좌로 다가갔다.

과연 수많은 군벌들의 꼭대기를 차지한 사내다운 배짱이었다. 게다가 칸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덩치와 흉악한 외견은, 그가 서릿골의 야만전사를 상대로도 충분히 싸워봄 직한 전사라는 걸 증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볼 텐가? 네놈이 검호와 흑익공의 대전사보다 강하단 사실을……!”

쾅! 콰직!

“뭣도 아닌 게….”

뒈질라고, 설치기는 왜 설쳐.

옥좌에 앉은 자세 그대로, 무릎 아래로만 움직여 페루를 천장까지 처박아버린 칸이 지긋지긋하단 눈빛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옥좌가 자리한 단상이 원탁보다 높았기에, 자연스레 원탁의 귀족들을 깔보는 시선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무런 항변도 뱉지 못했다. 애초에 그럴 정신이 없다고 해야겠지.

‘저 장한을…. 저렇게 쉽게 날려버렸다고?’

‘저게 단순히 힘이 세다고 가능한 수준인가? 마나도 없는 종족이….’

‘설마, 대공이 악마의 하수인으로 지정한 야만인이……!’

그러나 칸은 저 영악한 것들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더 증명하길 원한다면, 앞으로 나서봐라. 입을 지껄이던지.”

그냥 입을 닥치라는 소리다. 자신의 친절한 설득이 제대로 이루어진 듯, 돌아오는 침묵에 칸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진짜 회의를 시작해보자고.”

*

*

*

“알-라스델의 와이번은 나와 내 동료들이 처죽인 것이니. 당연히 그 소유권도 나와 내 동료들에게 있다.”

그 말에 웅성거리는 귀족들. 설마, 마경을 토벌한 야만인이 알-라스델의 와이번을 사냥한 장본인과 동일한 인물일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탓이다.

“증거가 필요하다면, 알-란자스의 시장과 베르타 수녀원장이 직접 증언할 거다. 아마 그걸 노리고 몰려든 것들이 꽤 많은 거로 알고 있는데….”

“…알-라스델의 첨탑 아래에 깔린 와이번 시체라면. 포로들을 동원해서 꺼낼 생각이었소.”

“뭐, 좋네. 나도 직접 파기는 귀찮았거든.”

“그래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요. 섣불리 잔해를 치우다가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데다가, 포로들을 이송하고 통제할 편제를 짜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건 알아서 해. 나는 내 몫만 제대로 챙기면 되니까. 어쨌든, 그걸 대신 파주겠다면 시체를 적당한 값에 양도할 생각은 있다.”

“발굴에 들어가는 비용. 포로들의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적당히 제해서 매입하는 것으로 한다면…….”

“대신, 일부는 무조건 내 몫으로 뺀다. 무기로 만들 생각이니, 많은 양은 아닐 거야.”

“알겠소.”

그야말로 일사천리.

애초부터 칸에게 거스를 생각이 없는 헤른이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나서자, 칸이 원하는 방향으로 회의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물론,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귀족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조금 다르게 내비쳤다.

‘헤른. 저 기회주의자가 저토록 설설 긴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렸다.’

‘그러고 보니, 저자가 습격받아 실종된 장소도 베르타 수녀원장이 있는 알-란자스였다. 모종의 연결고리가……?’

“그리고 대공의 재산에 관해서는….”

“그 부분은 완전히 그대의 것이라 하기 어렵소. 아시다시피, 반란을 획책한 귀족의 재산은 기본적으로 왕가로 귀속되는 것이 왕국의 법이라 그렇소.”

“난 왕국민이 아닌데.”

“하지만 대공은 본디 아르곤 왕국의 귀족이었지. 따라서, 왕가가 딴지를 건다면 상당히 피곤해질 거요. 게다가 왕실의 종친인 흑익공의 대전사도 함께 싸웠으니. 억지로라도 명분은 만들 수 있을 테고.”

“왕가라…….”

그것들이 이쪽에 관심을 둘 상황은 아닐 텐데.

‘뭐…. 전부 삼키는 건 어차피 무리야.’

변방 왕국의 귀족이라고 하지만, 어쨌건 멸망한 국가의 후손이면서 누백년을 고위 귀족으로 지낸 가문이다. 반란을 위해 그 많은 병사들을 무장시킨 걸 보면, 그 재력이 상당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지금도 상당한 양의 금화가 잠들어 있겠지.

그걸 전부 챙기면, 드워프 장인들이 만든 특제 무구로 장비를 싹 갈아엎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하지만 칸에게는 그럴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대공의 재산을 홀라당 집어삼켰다간, 북부는 아주 긴 세월 고통받게 될 테니까.

‘어차피 떠날 입장에서 그딴 게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아닌 건 아닌 거다.

다른 미개한 중세 놈들이라면 모를까. 자신마저 똑같은 수준으로 전락할 수는 없는 노릇. 어차피 그에게 있어 금화의 가치는 그닥 크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종결급’으로 치부하는 아이템들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겠지.’

“대공이 가진 재산에 대해서는, 북부의 민생에 쓴다는 약속하에 건들지 않겠다 약속하지. 그리고 정치적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을 감시자 역할로 내정해라. 인선은 나와 함께 마경을 토벌한 녀석들끼리 논의하겠다.”

그 인선에 대해서는 생각해둔 바가 있다. 정치적으로 완벽히 중립적인 위치면서, 본인 스스로도 귀족들과 얽히기를 꺼려하고, 이 중세에서 보기 드문 인격자가.

그리고,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대신, 대공이 보유한 물건들 중. 쓸만한 장비가 있다면 내가 가지겠다. 자기들끼리 싸움박질할 게 아니라면, 필요 없는 물건일 테니.”

“엘펠란 대공…. 아니, 후작이 맡은 역할에는 투사의 땅에서 흘러들어온 그린스킨을 막는 일도 포함되어 있소. 그대가 그 전부를 챙겨가 버리면, 그때 문제가 터질 수도 있을 터.”

“어차피 전부 챙겨갈 생각도 없다. 내 눈에 차는 것들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야….”

그쯤에서 칸이 개입할 만한 사안은 끝이었다.

이제 나머지는 이것들끼리 지지고 볶고, 알아서 밥그릇 챙기게 놔두면 될 일. 그렇게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던 칸을, 북부의 젊은 백작이 붙잡았다.

“잠깐.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북부의 혼란을 종결시킨 세 명의 영웅들 중 하나인, 당신에게.”

“뭐냐.”

“북부는 머지않아 권력 다툼을 위한 싸움판으로 변모할 겁니다. 실질적인 지배자가 완전히 실각한 상황에, 그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혀가 길군. 요점만 말해라.”

“새로운 통치 기구를 만들 생각입니다. 물론, 북부의 민생을 위한다는 목적하에. 당신이 요구한 조건에도 부합하는 단체가 될 테죠. 우리는 이전과 다르게 변해야 합니다. 북부의 도시들끼리 긴밀히 연계하고, 교류를 늘려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래요. 북부 외의 지역들처럼 말입니다.”

“정치놀음이 하고 싶으면 알아서들 하라지. 그런 걸 나한테 말할 이유가 있나?”

“예. 있습니다.”

젊은 랑테 백작의 눈동자가 열정과 야심으로 이글거렸다.

“그런 단체를 설립하기 위해선, 우리가 북부를 대표할 인물이라 납득할 만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어쨌거나, 북부의 귀족들은 대공의 반란이라는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하지만…….”

랑테 백작이 한 차례 숨을 들이켠 이후, 말을 덧붙였다.

“북부의 혼란을 종식한 영웅이, 창설에 도움을 준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리고 마침, 여기에는 그 영웅들 중 하나인 당신이 참석했군요.”

“…요점만 말하라고. 못 들었나?”

“단체의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그리 한다면, 우리는 영웅들의 정신을 이어 북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발족했다는 명분을 가지게 될 테고. 당신은 당신대로. 북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될 테니.”

현대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놈이구만.

아마,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금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칸이 권력에 미련이 없는 유형의 인간임을 직감하고, 저런 제안을 건네는 걸 보면 말이다.

“흠…….”

고민은 짧았다.

“그러지, 뭐.”

수락한 데에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가 컸다.

“그럼. 단체의 이름이 정해지면 사람을 시켜 알려…….”

“아니, 마침 적당한 게 생각났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만큼 어울리는 이름이 없겠지.

“북부 비상대책위원회. 줄여서 북부 비대위로 해라.”

*

*

*

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알현실을 벗어났다. 대공의 금고를 여는 날에 소식을 전하라는 말만 남기고서. 더 구체적인 얘기는 나중에 헤른을 통해서 들으면 될 일이다. 이후 북부가 어떻게 될지는, 남은 이들의 몫이고.

‘그 과정에서 쓸데없이 내 존재가 드러나긴 했지만, 어차피 정보는 퍼져나가기 마련. 내가 대공성에 들어간 걸 본 병사들도 꽤 살아있으니까.’

파샨투가 있는 흑익공이나, 칼엘손의 용병 조합, 하얀 까마귀의 레븐. 소문을 묻으려해도 묻을 수가 없는 인선 아닌가.

그전에 최대한 값비싼 시점에 정보를 써먹었다 치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아, 칸 형씨. 볼일은 전부 끝난 건가? 레븐, 그 양반이 형씨한테 소식 좀 전해달라는구먼. 대화 도중에 갑자기 뛰쳐 나가버려서 못 전한 말은 편지로 쓰겠다나?”

“전부 끝냈지.”

“다행이구먼.”

“너는?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을 텐데. 한가롭게 마중이나 나온 걸 보면….”

“준비는 진작 다 했지. 이제 인사만 하면 끝이라네.”

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미련 가득한 말투로 돌아섰다.

“안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네. 그래도, 작별 인사는 다 같이 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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