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새로운 북부 (3)
작별이라.
칸은 묘하게 텁텁해진 입안에 술을 들이부었다.
성외에 마련된 대공의 별채에 있는 술 저장고에서 멋대로 꺼내온 술이었는데, 마이아가 정말 대단한 술이라며 잔뜩 흥분했을 정도로 대단한 명주였다. 과연 향이 굉장히 깊은 데다가 식도를 타고 흐르는 화끈함이 특히 각별했다. 애석하게도, 이 몸뚱어리를 취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만.
“호쾌하게도 마시는구먼.”
“뭐냐, 저기서 질질 짜고 있던 거 아니었나?”
“누, 누가 질질 짰다고. 그냥 조금 울적해진 것뿐이었네.”
머쓱한 얼굴로 변명을 주워섬기는 론을 보곤, 피식 웃은 칸이 손에 쥔 병을 통째로 건넸다.
“고맙네.”
병을 받아든 론이 칸을 흉내 내듯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었다.
“켁켁…! 이리 독한 걸, 어떻게 물처럼 퍼마신 건가?”
“독하기는. 그냥 내놔라.”
설마 이렇게 독한 줄은 몰랐다며, 우는소리를 하는 론에게서 병을 빼앗아든 칸이 반쯤 남은 술을 모조리 비워버렸다. 제법 뜨끈한 열감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꽤 괜찮은 기분을 선사했다. 물론, 그래도 취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체력 : 36] +6
이제는 42가 되어버린 체력 스탯을 원망스런 눈으로 흘긴 칸이, 나른한 투로 물었다.
“의뢰비는 금화로 적당히 쳐서 주마.”
“사양 않겠네. 형씨라면 믿을 만하지.”
사실, 론은 자신이 맡은 의뢰 이상으로 일해주었다. 단순한 길잡이가 아닌, 믿음직한 동료로서 말이다. 그리고 칸은 씀씀이에 인색한 이가 아니었다. 예전에 서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디로 간다 했지. 마탑?”
“정확히는 제국 접경지일세. 그곳에서 마구스 양반이 마중을 보낼 거라고 하더구먼.”
“제법 평안한 여행길이겠군. 제국은 처음이랬나?”
“아예 처음은 아니지. 그래도 접경지역을 넘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긴 하네.”
그 말은, 더 이상 함께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제법…. 아니, 상당히 아쉽기는 하네. 형씨랑 다니는 거. 위험하긴 해도 나름 즐거웠거든.”
“한 번 더 즐거웠다간, 목숨이 남아나질 않겠군.”
“하하…! 다행히 목숨줄은 질긴 편이라서. 애초에 진짜 위험한 건 형씨가 전부 도맡아서 처리하지 않았나?”
칸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고 새로운 병의 마개를 땄다.
“사실. 앞으로도 형씨랑 같이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은 했네. 생각만 했지. 그야 내 실력으로는 짐짝밖에 안 되니까.”
“글쎄. 적어도, 짐짝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먼.”
빈말이 아니었다.
만약, 론이 없었더라면 그 긴 시간을 대공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기도 힘들었을 거다. 혼자서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할 수도 없었을 거고.
하지만 론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묘한 부채감은, 자신이 위로한다 해서 해소될 만한 것이 아니겠지. 아마 가장 위험한 순간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중세 놈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녀석에게는 특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제국행을 선택한 걸지도 모르지…….’
제국은 용병들조차 수준이 다른 강함을 자랑하는 동네니까. 거기서 무언가 얻을 수 있다면, 론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럼, 나는 슬슬 마차를 준비하러 가보겠네. 길잡이답게 말이야.”
“쇠망치라며?”
“쇠망치도 맞고. 길잡이도 맞지.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네.”
그래, 잘 생각했다.
칸은 돌아서는 론을 배웅하듯, 방금 딴 술을 들이켰다.
“전사님, 그동안 많이 배웠어요. 덕분에, 세상이란 게 제 상상 이상으로 험하다는 걸 값싸게 배웠네요.”
“험하긴 하지. 그리고 너는 여전히, 주문쟁이답지 않고.”
“어…. 그런가요?”
“그래. 보통 주문쟁이들은 겸손이라는 걸 모르거든.”
대개 오만하고, 세상의 중심이 자기인 줄 알지. 칸은 그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하지만 너는 주문쟁이지만, 평범한 사람처럼 나름 주변을 살필 줄 알아. 때론 주문쟁이처럼 이성적인 선택을 내릴 줄도 알고. 무엇보다 실력도 꽤 괜찮지.”
“하하….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 마탑으로 돌아가려는 거고요. 스승님께선 더 붙어있으라고 말할 것 같지만요.”
“뭐…….”
겉으로는 얀이 제롬과의 연락책으로 동행하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제롬이 붙여둔 ‘눈’이라 보는 게 맞았다. 그런데 제자가 멋대로 판단을 내려서 복귀해버리면, 당연히 기분은 좋지 않겠지.
게다가 아직 제롬에게 받아낼 물건이 남아있었다.
다르킨 페레야스가 남긴 연구 일지의 요약본과 마탑의 기술력으로 만든 무기. 양쪽 다 칸에게는 퍽 절실한 것들이었기에, 얀을 붙잡아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배를 째버리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하지만-.
“다음에 만날 일이 있다면, 그때는 마구스가 돼서 만났으면 좋겠군.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어, 음. 그러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본인이 언젠가는 마구스의 경지에 오를 거라는 것과 칸에게 도움을 줄 거란 얘기는 부정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엔 오만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녀석의 재능은 그 말이 겸손으로 느껴질 만큼 대단했다. 지구로 친다면 이제 막 성인이 된 녀석 주제에 어지간한 마탑의 주문쟁이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지닌 데다가, 성장세 또한 상당했다.
“뭐. 이러나저러나 결국, 모든 건 너에게 달렸지.”
“하하. 그러네요.”
얀은 그렇게 웃으며 허리를 꾸벅 숙이곤, 론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똑같이 모습을 감췄다. 참으로 주문쟁이 다운 작별법이라고 해야 할는지. 그 시원스런 모습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술을 마시려던 칸이, 눈을 흘깃 돌렸다.
“아주 날을 잡으셨군.”
“꽤 오랫동안 함께 다녔다면서요? 그만큼, 나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겠지요. 안 그래요? 칸.”
“그렇게 오래도 아니다만.”
그래, 굳이 따지자면 짧지는 않지. 뒷말을 속으로 삼킨 칸이 술병을 흔들었다. 너도 마시겠냐는 의미였다.
“음. 마셔보고 싶기는 한데, 곧 본단으로 가야 하는 몸이잖아요? 그쪽은 금욕, 금주가 기본이라서. 사양할게요.”
“그러냐.”
칸은 허리춤까지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을, 어깨에서 단정히 쳐낸 엘레나의 변화를 보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제법 잘 어울리는군. 한창 나이대에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하고.”
“…그래요? 전 잘 모르겠는데.”
“원래 그 나이대에는, 단발이 기본이다.”
“칸의 고향 얘긴가요?”
“뭐, 그렇지.”
여학생의 헤어스타일은 무조건 똑단발이고, 남학생은 스포츠컷인 시대를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 엘레나의 모습은 광신도라는 단어와 멀어 보였다. 오히려 책가방을 메는 게 더 어울리는 명랑함만이 남은 느낌이라고 할까.
“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수녀? 사제? 아니면, 정의의 신의 사도?”
“음. 개인적으로는 칸이 절 공손하게 불러주는 것도 좋겠지만, 그냥 지금처럼 해주시겠어요? 칸이 제게 귀가 따갑도록 말했던 것처럼요.”
“맹랑하긴.”
“그럴 나이죠.”
어련하시겠어. 엘레나의 말을 장난스레 되받아친 칸이 슬쩍 몸을 일으켰다. 어쨌건, 필요한 인사는 전부 다 나눴으니. 마지막 남은 볼일을 처리할 참이었다. 엘레나도 눈치껏 알아들은 듯, 따라오란 말과 함께 칸을 별채에 마련된 너른 방으로 인도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아마 제 능력이 부족한 탓에 유지 시간이 길지는 못할 거예요.”
“알았다.”
“부디, 원하는 답을 얻으시길……. 여신의 대리자시여.”
엘레나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점차 호흡이 둔해지고, 육체가 완전히 굳어버린 것처럼 미세한 흔들림마저 사라진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흘러, 거대한 존재감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인데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압박감에 칸이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꽤 오랜만에 뵙는 기분이군.”
[나에게는 찰나였단다. 어린 대전사야.]
칸에게 남은 마지막 할 일.
그것은, 정의의 신과의 만남이었다.
*
*
*
[잘 해주었더구나. 희생당한 영혼들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곤 하나, 혼돈의 씨앗이 제대로 발아하기도 전에 제거한 것은. 위업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나의 신명을 걸고, 네가 나의 과업을 완수했음을 인정하마. 더없이 완벽한 형태로. 그러니, 대가는 주어질 것이다.]
‘권능의 조각.’
칸은 정의의 신이 약속한 대가를 떠올렸다. 성기사들 사이에서도 신의 은총을 받는 극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신의 권능을 필멸자의 몸으로 재현케 하는 성유물. 비록 성기사가 아니라 본래의 성능을 이끌어 내기 힘들다 한들, 당장 칸의 전력을 크게 올려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너에게 권능의 조각을 내리는 건 과하겠구나.]
“…그게 무슨 소리요?”
칸의 의구심 가득한 질문에 정의의 신은 기분 나빠 하지 않고 설명했다. 이전에 ‘심원의 방패’에 부여한 신성, 그것이 원인이라고.
[아주 작은 일부라고는 하나, 그 또한 분명 신성이다. 필멸자의 격으로는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그러나 편법에 가까운 방식이어도 너는 신성을 체내에 받아들였다. 더없이 안정적인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현재 악마의 권능과 균형을 이루고 있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소?”
[있지. 아주 큰 문제가.]
엘레나. 아니, 엘레나의 몸을 차지한 정의의 신이 손을 흔들었다.
우우웅.
[너희 육체를 차지한 기운은 둘이다. 하나는 신성의 지극히 작은 일부. 또 하나는 그 더러운 대식가가 흘린 권능의 파편.]
동일한 크기, 동일한 형태를 한 흑백의 기운을 만들어낸 정의의 신이 다시 한번 손을 흔들자, 그 둘이 태극을 이루듯 뒤엉키며 하나가 되었다.
[양쪽 모두. 필멸자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영역의 힘이지만, 지금은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너의 체내에서 공생하고 있다. 전사신이 내린 축복받은 육체 덕분인지, 너의 태생이 남다른 덕분인지는 몰라도. 하지만, 거기에 권능의 조각이 더해진다면.]
균형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태극을 이루던 흑백의 기운들 중, 백색의 기운이 흑색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몸집을 불리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물론, 외물에 부여하는 형태로 권능을 내려줄 수는 있겠지만, 네가 만족할 정도의 권능을 내려주기 위해서는 걸맞은 무구를 준비해야 할 터. 무엇보다 본디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반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건 곤란한데. 여신의 긴 설명을 잠자코 경청하던 칸이 얼굴을 왈칵 구겼다.
그렇다고 당장 쓸만한 무기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염병할 마검에 권능을 쑤셔달라 해도,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우우웅.
“…그럼, 어쩌자는 거요?”
[대안은 둘이다. 네 가슴에 자리한 신성과 악마의 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그럼 권능의 조각을 주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하지만 그걸 네가 받아들이진 않을 듯하고.]
“잘 아시는군.”
[그럼 남은 건 이것밖에 없구나.]
권능의 주인에게서 더 많은 권능을 빼앗거라. 권능의 조각을 받아들여도,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
*
*
침묵은 짧았다.
엘레나가 말했듯, 정의의 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으나, 오히려 잘되었다는 마음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대가를 요구할 수 있게 된, 지금의 상황을 처음부터 원했기에.
“그럼, 권능의 조각은 그냥 받지 않겠소. 대신에 내 질문에 답 해주시오. 당신이 내게 베풀기로 한 대가의 가치만큼.”
[너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마. 하지만 대가를 넘어서는 질문에까지 답해줄 수는 없음이니.]
“그거면 충분하지. 내가 물을 건 별 게 아니오.”
사실 기회만 된다면, 마음속에 품은 의문을 전부 해소하고 싶었다.
당장 마경에서 알파가 떠들어댄 말들만 해도 어떤가.
만신전 교회가 세상에 퍼뜨린 장황한 신화들. 그로부터 기인한 교리들을 모조리 부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건 만신전 교회를 넘어 제국의 근간까지 뒤흔들 터였다. 어쩌면 자신의 빙의와 관련된 진실과도 맞닿아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를 정의의 신에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떤 비밀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목숨을 위협하는 법이니. 당분간은 심중에만 담아둬야 하리라. 적어도, 만신전 교회 전체를 적대해도 살아남을 정도의 강함을 손에 넣기까진.
그러니, 이번 질문은 최대한 칸의 목적을 숨기면서도.
‘내 목적에 다가설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도록.’
“아주 먼 과거에. 영혼을 다루는 비술을 창안했다는 존재에 대해서 알고 싶소. 가능하다면,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단서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