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새로운 북부 (4)
론과 얀, 엘레나를 태운 마차가 로-엘펠란을 벗어났다. 그들은 왕국 동부를 경유한 뒤, 변경백령을 지나 투사의 땅을 우회해 제국으로 가게 될 테지. 아마 지금쯤이면 제1 막도 막을 내렸을 거고, 마탑과 교회에서 마중을 보낸다 하니 크게 위험한 요소는 없으리라.
“너는 어쩔 생각이냐.”
“어쩌기는 지부로 돌아가야지. 팔이 다 붙을 때까지는 서류 업무만 볼 거다.”
“사업장을 확장해야 하니, 꽤 바쁘겠군.”
“더럽게 바쁘겠지. 하지만 좋은 일 아니냐. 덕분에 북부에서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테니까.”
카가각. 쾅!
위에서 그대로 내려찍는 무식한 검격을 빗겨낸 칼엘손이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빙그르- 회전시켰다.
칸의 눈동자가 기회를 포착한 맹수처럼 빛났다.
발이 땅에서 떨어진 칼엘손의 등허리를 향해, 붉은 마검이 일직선의 궤도를 그리며 쇄도. 초인적인 근력과 탄력적인 육체가 합쳐져 이루어낸 극속의 찌르기가 칼엘손의 신형을 그대로 관통했다. 하지만 검호가 괜히 검호라 불리겠는가.
칸의 찌르기는 칼엘손의 겉옷을 관통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눈으로 보지도 않고, 정확히 검의 궤적을 읽어낸 것이다.
‘그럴 줄 알았지.’
이렇게 검을 맞댄 게 벌써 수십 번. 그러는 동안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가 칼엘손이다. 겨우 이 정도로 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당연히 회피 이후를 상정해야만 했다.
우두둑…!
칸의 손목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났다. 실제로도 뼈가 탈구된 것처럼 손목이 꺾였다. 그러나 칸이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멀쩡하게 검을 휘둘렀다.
“이런 미친놈이…!”
육체가 움직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듯한 기괴한 공격에, 칼엘손이 입 밖으로 경악을 흘리며 대응했다. 타고난 몸뚱어리를 이용해 찌르기를 베기로 바꿔버리는 변칙적인 공격조차, 검호에게는 조금 까다로운 반칙에 불과한 바.
베기 공격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검끝으로 마검의 검면을 지그시 눌러 공격을 차단해버렸다. 힘의 작용법과 상대방의 검술을 정확히 예측해야만 가능한 기예.
“대체 그 몸뚱어리는 뭐냐? 어떻게 갈수록 더하냐고!”
그 직후 벌어진 결과는 당연히 칸의 패배였다.
무리한 반격이 실패한 대가로, 칼엘손의 검이 목덜미로 향하는 걸 막지 못한 것이 패인.
“이겼으면 됐지. 뭘 또 난리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서 그런다…!”
그렇게 따지면, 기어코 이긴 네놈이 더 이상하지. 칸은 뒷말을 머릿속에서만 중얼거린 채 피식 웃었다.
오른손을 당분간 못 쓰게 된 칼엘손은 곧장 재활이란 이름의 훈련을 시작했다. 그 내용은 지금 봤다시피 칸과 모의로 대련하는 것이었고, 칸은 적당히 힘을 뺀 상태에서 오로지 검술만으로 칼엘손을 상대했다.
예전 같았으면, 경험치도 안 주는 대련을 왜 해야 하나 싶어 거절했겠지만….
[안타레우스류 비전 검술(B) - 41%]
지난번 전투만으로도 상당한 숙련도를 올린 ‘안타레우스류 비전 검술’의 숙련도가, 검호인 칼엘손과 대련함으로써 엄청난 폭으로 성장했다. 게임 시절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오른 셈이지만….
‘확실히 게임이랑은 달라.’
게임에서처럼 노가다로 올리는 게 아닌, 깨달음에 따라 숙련도가 큰 폭으로 상승하는 구조라 가능한 ‘폭업’이다. 게다가 전사 계열 직군의 캐릭터가 검호에게 수련을 받거나, 싸우면 보너스 상승률이 적용되기도 했었다.
‘아마도, 현실과 게임적 요소들이 전부 더해진 덕분에 지금의 성장세가 나온 것이겠지.’
“어쨌든, 이만하면 됐다. 어디 가서 팔병신이라고 무시받을 일은 없겠어.”
“어차피 서류 업무만 볼 거라며?”
“그래도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직접 나서는 순간이 오는 법이니까. 게다가 네놈이 이름을 지어준 비대위의 귀족들을 상대하려면, 만전의 상태에 가깝도록 관리를 해야해.”
“더럽게 귀찮겠군.”
“네놈 탓이 크다는 건 알고 하는 소리냐…?”
칸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사실 이것저것 떠넘긴 게 많기는 하지.’
예를 들면 알-라스델의 와이번 시체를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나 감시, 칸의 몫을 정확히 분배하는 일도 칼엘손에게 떠넘긴 지 오래였다. 그가 직접 알-라스델에 가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 ‘하얀 까마귀 길드’의 레븐과 연계해서 이것저것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나, 앞으로 비대위의 투명성을 감시하고 견제할 ‘추천인’을 공도로 데려오는 일까지….
“흠…. 그래도 고생은 네 부하들이 하는 것 아닌가?”
“미친놈. 걔네들은 어디 땅파서 먹고사냐?”
툴툴거리는 말투와 달리, 칼엘손도 내심 진심으로 짜증을 느끼진 않을 터였다.
그러기엔 본인과 용병조합이 얻은 게 너무 많으니까. 마경을 토벌한 영웅들 중 하나가 총지부장으로 버젓이 있는데, 감히 누가 북부에서 조합의 의지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소식이 왕국 전체로 퍼져나가는 순간, 그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질 터였다.
‘조합에서의 위상도, 당연히 더 올라갈 거고.’
“뭐, 잘 부탁한다고.”
“……빌어먹을 자식.”
끝까지 툴툴거리며 떠난 칼엘손은 그 길로 본인의 업무를 보기 위해 떠났다. 파샨투는 진작에 다음 싸움터를 찾아가겠다며 떠난 지 오래였으니, 이제는 완전히 다 떠나버린 셈….
“너는 어디 안 가나?”
“어디를 말입니까.”
“다들 자기 할 일 찾아서 떠났는데, 너는 아직까지 뭐 하냐고 묻는 거다. 뭐, 칼엘손한테 해고라도 당한 거냐?”
“아닙니다.”
“그럼 뭔데.”
아니, 아직까지 칸의 곁에 남은 일행이 딱 하나 남은 상태였다.
첫 만남부터 꽤 충격적인 인상을 주며, 어쩌다 휘말려 여기까지 함께하게 된 여인.
마이아 엘드렛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직접 때려쳤습니다.”
“뭐?”
“제가 직접 때려쳤습니다.”
“아니….”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린 칸이 다시 되물었다.
“백조의 삶이 부러워지기라도 한 거냐? 멀쩡한 직장은 왜 때려쳐?”
“강해지고 싶어서요.”
“그게 뭔 개같은…….”
마이아의 진지한 눈빛에 칸이 하려던 말을 멈추고, 진심 가득한 질문을 던졌다.
“조합을 때려치고, 날 따라다니겠다고…? 도대체 왜.”
“말했잖습니까. 강해지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강해지고 싶다는 놈이 도대체 왜. 용병조합을 때려치고 날 따라다니겠다는 건지가 궁금하다는 거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을 뛰어넘어야, 강해질 수 있으니까. 당신처럼요.”
칸은 그제서야 마이아의 결정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건지 깨달았다.
‘오해하고 있는 거다. 내가 강해진 이유가… 위험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덕분이라고.’
어떻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전투를 거듭할 때마다 쌓이는 경험치로 끊임없이 강해질 수 있으니까. 특히 북부에 들어서면서부턴 매번 사선을 넘지 않았던가. 그만큼 많은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고, 더 많은 스킬을 획득하게 되었으니. 마이아가 저런 착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나처럼 스탯창을 가진 게 아니고서야,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건데.’
“…….”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마이아를 보자 한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하라고.’
게임 시스템과 관련한 걸 얘기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너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결국, 그녀가 저런 결정을 내린 건 자신의 잘못이 컸으니까. 애초에 자신이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위험할 거다. 제대로 된 싸움은커녕,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저번에 마주친 와이번 같은 괴물을 수도없이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고도 전혀 강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도망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환장하겠네.
살기 위해서 강해지려는 칸으로선, 강해지기 위해 죽음까지 무릅쓰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기사의 종자라 생각하시고, 편히 부려주십시오.”
“염병…. 마음대로 해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괜스레 찝찝해진 칸이 뒷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뇌까렸다.
“대신, 걸리적거리면 두고 간다.”
“버려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가자.”
상태가 많이 상한 ‘설산백랑의 털가죽’을 외투처럼 걸친 칸이 매무새를 정리하며, 별채의 연무장을 벗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마이아는 목적지가 궁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새 표정을 갈무리하곤 정말 기사의 종자라도 되는 양 얌전히 칸의 곁에 붙었다.
‘기왕 데려가는 거…. 최대한 쓸모 있게 만들어는 놔야겠지.’
*
*
*
엘펠란 가문이 축적한 재산은 한동안 북부 전체에 미곡을 풀어도, 몇 년은 너끈히 버틸 수준이라고 헤른은 설명했다. 사병을 무장시키는 데에 사용하고도 남은 돈이 그 정도라는 말도 함께.
“그 수상쩍은 마법사 집단이 생산한 마도구로 병사들을 무장시킨 덕분이기도 하지.”
끼이이익.
일행의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으며, 이제는 비대위원장이란 직함을 얻게 된 헤른이 낡은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지하 특유의 퀴퀴한 향과 축축한 공기가-.
‘느껴지지는 않는군…. 주문인가?’
“물건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들인 모양이더군. 대대로 엘펠란 가의 주인이 마법사였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금고 때문이라는 얘기까지 있네. 그만큼 대단한 보물이 있단 뜻이겠지.”
“기대 되는군.”
“…하지만 그걸 발견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네. 우리도 이 안의 들어있는 물건이 전부 어떤 건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니까.”
즉, 알아서 가져가란 소리다.
본인의 안목과 운을 믿고, 이 넓은 창고 안에 숨겨진 진짜배기를 찾아내야 한다는 얘긴데….
사실 어지간해서는 마도구의 연원이나 성능을 겉모습만 보고 대번에 유추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칸은 헤른에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지. 필요한 물건이 있나 찾을 때까지, 편안하게 찾아봐도 괜찮으니 여유롭게 둘러보고.”
시간 제한이 없다는 건, 칸의 입장에서 엄청난 호재였다. 어차피 운빨로 찍는 게 아니고서야 제대로 된 물건을 챙겨서 가져갈 리가 없노라 판단하고, 선심 쓰듯 시간 제한을 없앤 모양인데. 분명히 말하자면, 그건 대단히 큰 실수였다.
[요정 마법사의 마법봉]
[드르그 왕의 강철 힘줄]
[근면성실한 드워프의 팔목보호대]
[늙은 트롤의 가죽신]
[…….]
애석하게도, 아이템의 정보가 뜰 만큼 귀중한 물건들은.
그의 눈을 피해갈 수 없으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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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보물고에 잠들어있는 장비의 수준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지금 장착한 장비들 이상으로 쓸만한 것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마는. 그나마 몇 개라도 골라낸 것에 만족해야겠지.
‘일단은, 이 셋으로 만족할까.’
체력을 두 개나 올려주는 데다가, 손재주에 미미한 보정이 들어가는 ‘근면성실한 드워프의 팔목보호대’와 체력이 하나 상승하는 대신에 지능이 하나 깎이는 ‘늙은 트롤의 가죽신’까지 둘.
나머지 하나는 중병기에 속하는 거대한 양날 도끼였다.
도끼의 경우에는 앞서 고른 물건들처럼 스탯이 따로 붙지는 않았지만, 오직 단 하나의 옵션이 칸의 이목을 완벽히 사로잡아버렸다. 순간적으로 무기의 무게를 조절할 수 있다는, 기교보다 압도적인 힘을 이용한 전투법에 능숙한 자신에게 딱 맞는 옵션.
“이렇게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챙겨라. 도로 뺏지도 않을 테니.”
당연히 동행하게 된 마이아의 것도 직접 골라주었다.
처음에는 사양하던 녀석도, 칸이 쥐여주는 장비의 수준을 대충 눈치챈 이후로 넙죽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어깨를 흠칫- 떨더니, 불안함 가득한 시선을 칸을 향해 쏘아 보냈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이렇게 중무장을 시켜주는 거지…?
“이만하면, 거길 넘어도 별 문제없겠군.”
“거기……?”
“무법도시 베이츠.”
아르곤 왕국의 북서쪽에 자리한, 대륙의 온갖 범죄자들이 몰려든다는 그곳이 바로 칸의 다음 목적지였다.
“그곳에서 열리는 암시장에 참석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