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무법도시 (1)
“흐음……. 이거, 다시 쓰기는 영 글렀는데.”
“어떻게 안 되겠나?”
“내가 드워프도 아니고, 칼질하는 놈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니요?”
“어쩔 수 없잖나.”
한숨을 토해낸 젊은 청년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베이츠까지 가려면, 한 세월이 걸릴 테니…….”
아르곤 왕국 북부의 국경을 넘어, 포츠랄 산맥에 접어든 지가 벌써 일주일째. 산맥의 삼분지 일을 넘은 셈이니,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가자니, 마차의 바퀴가 완전히 빠져버려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짐들은 포기하쇼. 살아서 나가려면, 식량만 챙겨도 빠듯할 테니까.”
“아니…. 그건 나보고 죽으란 소리랑 다를 바가 없네. 저것들이 다 얼마인 줄 알고?”
“목숨보다 값지진 않을 거 아뇨. 포츠랄 산맥이 어디 동네 뒷산도 아니고, 박살 난 마차를 들고서 넘을 만한 곳이 아니요.”
“짐만 어떻게 챙겨서 가면 되지 않겠나?”
젊은 상인 청년의 말에 호위로 고용된 용병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경험이 적어서 그런가, 현실 감각이 아예 바닥이구먼.’
애초에 무슨 수로 상단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의뭉스러운 애송이가 눈앞의 상인, 에토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집안에 돈이 많은가, 하고 말았지만 그런 도련님이 베이츠까지 가서 상행을 성공시키겠다 발악하는 꼴을 보면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구한 목돈으로 크게 한탕이라도 해보려는 걸지도.
‘육시럴. 뭐가 됐든 일단 이만큼 왔으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못 도망가지.’
아르곤 왕국에서 마무리하려던 상행이, 엘펠란 후작의 반란으로 틀어진 뒤. 포츠랄 산맥을 넘어 베이츠에서 물건을 팔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응한 것도 맞으니까. 어쩔 수 있겠는가. 그만큼 돈을 준다는데.
“후우……. 정 그렇다면, 가장 비싼 물건만 골라서 챙기쇼. 당신네 인부들이랑, 나 말고 다른 호위들까지 나눠서 들면 운반 정도는 가능할 테니. 대신에 계약을 새로 써야겠소. 의뢰에 없는 내용이 생겼으니까 당연한 얘기지.”
“그러세. 기존에 주기로 했던 돈의 2배를 주지. 베이츠에 무사히 갈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을 줘도 아깝지 않아.”
“그렇다면야.”
“고맙네, 정말. 자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상행을 계속할 수도 없었을 거야.”
“낯간지러운 소리를…. 나도 돈 때문에 이러는 거니까 헛소리마쇼. 물린 돈은 챙겨야지.”
용병은 엉성한 솜씨로 자른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며, 호위로 고용된 다른 용병들에게 향했다.
“이거…. 슬슬 재껴야 하는 거 아닌가…….”
“재끼고 나면, 포츠랄 산맥은 어떻게 벗어나려고…….”
도저히 그냥 듣고 넘기기 힘든 흉흉한 말소리가 귀에 꽂혔지만, 그는 애써 못 들은 척을 하며 웃었다.
“어이, 들어보라고! 내가 의뢰비의 세 배를 당겼다니까?”
사실은 두 배지만.
저 흉흉한 대화를 듣고 어떻게 두 배를 그대로 제시한단 말인가. 이런 염병할 것들, 틈만 나면 배신부터 하려고 보지….
“세 배? 그거 정말이야?”
“그럼 내가 거짓말을 쳤겠어?”
“그럴 돈이나 있대? 나중에 딴소리하면…….”
“베이츠에서 물건들만 다 팔아넘겨도 충분하지. 그리고….”
털어먹으려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아. 그가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린 말에 다른 용병들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얼굴만 봐도 대충 생각이 읽혔다.
‘멍청한 것들.’
아직 수중에 들어오지도 않은 돈 가지고 무얼 할까 고민하는 거겠지.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알고. 일단은 짐부터 나눠 들지. 저것들이 다 우리 돈이라 생각하고, 조심히 다뤄야 해. 알았지?”
“그야 당연한 소리를!”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짐을 정리하는 인부들에게 다가가는 용병들을 보자니 속이 답답했다.
다른 호위 용병들을 설득한 용병, 파벨은 현재 은패 승격을 앞두고 있었다. 본디 용병조합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승격이지만, 그동안의 실적과 임무 성공률을 토대로 자신의 승격이 머지않았단 사실을 조합의 지인이 귀띔해줬더랬다.
다시 말해. 이번 임무만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동패를 벗어던지고 당당히 은패 용병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시발. 이건 무조건 해야지.’
조합의 수뇌부가 직접 발행하는 금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은패 용병만 돼도 주변의 대우가 단숨에 달라지니까. 평균적인 의뢰금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조합에서 알선해주는 알짜 의뢰들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승격에 목을 맬 이유는 충분.
제국 바깥의 용병들은 등급에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머지않아 제국에 가서 활동할 계획을 세운 파벨은 달랐다.
무려 제국이다.
여타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그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는 제국.
‘금패도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곳이 제국이고, 일반적으로 마주치는 용병조차도 은패 수준이라지. 게다가 금패 이상은…….’
물론,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금패의 윗 단계는 말이 용병이지, 실제로는 어디 귀족가에 소속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초인들에게나 허락된 등급이라고 하니까. 개중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강자도 몇 있다고들 하지 않나.
자신의 깜냥으로는 은패가 한계. 정말 운이 좋다면 금패가 겨우이리라.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자고로 사내라면, 큰물에서 놀아야지. 암.’
그렇기에 이번 상행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파벨은 새로이 의지를 다지며, 인부들이 준비해준 가죽 행낭에 상단의 짐들을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파벨. 슬슬 출발해도 되겠나?”
“그러쇼.”
“슬슬 그린스킨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아. 최대한 절반 지점까지는 가고 싶네.”
“해가 질때까지 쉬지 않고 걸으면, 충분할 거요.”
파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토가 상단의 인부와 호위들에게 식량을 배분했다. 포만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당분간의 허기는 달래줄 정도의 식사가 주어지자 이곳저곳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 먹으면 걷는 데 지장이 생길 걸세. 지금은 적당히들 드시게. 가면서 먹을 수 있게, 렌포드 왕국에서 가져온 고기도 배분해줄 테니.”
하지만 이어지는 에토의 말에 불만이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파벨은 어리숙한 평소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능숙한 에토의 대처에 새삼 감탄하며 행낭을 단단히 몸에 고정했다.
‘이럴 때는 확실히, 뭔가 배운 티가 난다고 해야하나.’
“그럼. 가보세나.”
제 몸에도 가죽 행낭을 고정한 에토가 행군의 시작을 알렸다.
터벅- 터벅-
적어도 밤까지 예정된 행군이다. 인부들도, 용병들도, 하물며 파벨조차도 말하는 데 들어갈 체력조차 아끼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하하. 포츠랄 산맥도 제법 경치가 좋지 않나? 내 고향에도 이만한 산이 있었는데 말이야. 제법 향수가 느껴지는구먼. 아, 용병들도 이곳저곳 떠도는 신세이니 가끔 향수를 느끼진 않나……. 아, 그러고 보니 투사의 땅에서 내려오는 그린스킨들이 그토록 흉악하다던데. 칼에 급소가 찔려도 끝까지 싸우는 전사라! 지금은 말고, 나중에라도 한번 보고 싶어.”
그러는 와중에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에토를 모두가 질린 눈으로 흘겼다.
설마 체력이 넘쳐나는 건가? 평생 단련이라고는 안 해봤을 도련님이 어떻게 저리 팔팔한 거지? 저러다 나중에 제일 먼저 퍼지면 어쩌려고-.
상단의 모두가 에토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던 그때. 파벨은 에토의 잡소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귀를 쫑긋거렸다.
‘착각인가…?’
에토의 장황한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며, 주변의 소리에 집중하던 파벨이 미간을 좁혔다.
처음엔 비명소리인가 싶었다. 포츠랄 산맥에는 야생 동물들도 꽤 있으니까. 그것들이 다투다가 다쳐서 낸 소리라면, 딱히 경계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동물의 비명이라기엔 지나치게 굵직한 느낌이었다. 설마 커다란 놈이 주변에…?
“우오오오……!”
“오메, 깜짝이야!”
“뭔 소리래? 어디 곰이라도 나타난 건가?”
“고, 곰이면. 도망가야 하는 거 아녀?”
“호위들이 있잖아. 마물도 아니고, 고작 짐승 가지고 난리야?”
그때 파벨이 희미하게 들었던 소리가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울려 퍼졌다. 놀란 인부들이 무어라 떠들어댔고, 용병들이 뭔가 귀찮은 일이 생기려나 싶어 얼굴을 찡그렸다.
“파벨. 저 소리가 뭔지 알겠나?”
“……쓰읍. 대충은.”
“정말 곰인 건가? 소리만 들어서는 꽤 큰 놈 같은데….”
“설마. 곰이면 다행이지. 인부들한테 마음에 준비나 하라고 일러두쇼.”
결국, 마주치게 되는구먼.
깊은 한숨을 쏟아낸 파벨이 행낭을 에토에게 떠넘기며 말했다.
“그린스킨이 나타났수.”
*
*
*
에토는 인부들에게 속도를 조금 높이라 경고하면서도, 수시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하필이면…….’
포츠랄 산맥을 다 지나지도 못했는데 마차의 바퀴가 빠져버린 것만으로도 최악인데, 그린스킨이 주변에 나타났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포츠랄 산맥에서 등장하는 그린스킨은 일반적인 그린스킨과 조금 다르다.
투사의 땅.
초록 피부의 투사들이 지배하는 그곳에서 낙오된 그린스킨들이 남하를 하는 과정에서, 몇몇 무리는 포츠랄 산맥에 흘러들어와 무리를 이룬다고들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겨우 낙오된 떨거지들이 뭐가 무섭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투사의 땅에서 쫓겨난 낙오자조차도, 야생의 그린스킨은 혼자서도 서넛을 때려잡는 수준이라고 했었지.’
그 정도면, 하나만 나타나도 재앙이라 할만 했다.
현재 상단의 전력은 동패 용병만 일곱. 인부들도 창칼을 쥐고 싸울 수는 있겠으나, 큰 전력이라 보기는 어렵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도움이 되겠지만, 어설픈 칼질로는 그린스킨의 가죽에 상처조차 내기 힘들었다.
‘어지간하면, 포츠랄 산맥 깊숙한 곳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마주칠 일이 없다고들 했는데….’
이만큼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린 이상, 언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인부들에게 서둘러 거리를 벌리라 일러둔 것이었다.
물론, 마차를 몰던 말들이 살아있으니 작정하면 혼자 살아남는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가진 용돈을 모두 털어서 시작한 상행이 실패로 돌아가면…….
‘이젠 정말, 조금의 기회조차 주시 않으실 거야.’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간다. 에토는 의지를 다지며 고개를 주억였다.
“우오오오오오──!!”
하지만 그 생각은, 바로 아래에서 터진 포효에 꺾이고 말았다.
비명이 난무한다. 인부들은 제 목숨처럼 소중히 하겠다던 짐을 내팽개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호위로 고용한 용병들은 아예 주춤 뒤로 도망갈 것처럼 물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토는 무어라 따지지 못했다.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괴, 괴물……!’
어지간한 사람의 두세 배는 될 법한 덩치에 사람의 몸통만 한 팔다리, 입 밖으로 튀어나온 날카로운 어금니와 안광을 뿜어대는 듯한 우묵한 눈두덩이. 그리고 손에는 거대한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대검이 들려져 있다.
“크르르르!”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등장한 괴물이 가파른 언덕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저 커다란 몸집과 무거운 대검을 들고서 언덕을 거슬러 올랐다는 뜻인데, 육체를 다루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기행이란 건 에토조차 알았다.
‘그린스킨 투사…!’
그랬다. 투사의 땅에서 낙오된 그린스킨의 투사였다.
심지어, 오크가 아닌 트롤이다.
“이런 시발! 도망쳐─!”
가장 먼저 등을 돌린 건 용병들이었다. 트롤 투사의 위험성을 가장 먼저 깨닫고, 반대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뛰는 그들에게 망설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에토는 맞서 싸우라 다그치려다, 이내 소용없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싸우면? 저 괴물을 고작 동패 용병 여럿으로 죽일 수는 있고? 스스로 되물은 결과 불가능하다고 정답을 내렸다.
덥썩!
“정신차려! 저기 말부터 챙기고 튀자고!”
그때 에토의 뒷덜미를 움켜쥔 파벨이 마차를 몰던 말들을 향해 뛰었다.
고용주라도 살려서 데려가야, 심사에 반영될 불이익이 최소화될 것이란 본능적인 계산하에 이루어진 도주였다. 에토는 멍하니 파벨의 인도를 따라 달리다가, 문득 트롤이 나타난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해! 앞만 보고 달려!”
“자, 잠깐!”
파벨이 우악스런 손길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에토는 좀처럼 트롤 투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기…. 머리에 뭔가 솟아나지 않았나?”
“솟아나기는 시부럴…! 대가리에 뿔이라도 달렸다는 소리……. 지, 진짜네!”
놀란 파벨이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트롤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모습을 드러낸 뒤로 딱히 이렇다 할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도망치는 용병과 인부들을 쫓기는커녕, 아예 죽은 것처럼 굳어버렸-.
“크륵….”
쾅.
“뭐야, 시발…….”
파벨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한 가운데, 에토는 반쯤 풀린 파벨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트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이. 뭐 하는 거야! 야!”
그런 그를 말리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에토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앞으로 엎어진 트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간 에토의 시선에 비친 건, 트롤의 뒤통수를 완전히 관통한 붉은색의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