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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01화 (101/132)

#101화. 무법도시 (2)

“끄응…! 안 빠지네. 파벨! 이리로 와서 이것 좀 뽑아보게!”

“저, 정말 뒈졌수?!”

“그렇다니까! 와서 이 검이나 뽑아보게!”

에토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끝까지 트롤이 미동조차 하지 않자 뒤늦게 다가온 파벨이 뒤통수에 박힌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끄으윽!”

그러나 목에 핏대가 서라 힘껏 잡아당겼음에도, 트롤의 뒤통수에 꽂힌 검은 조금 들썩거릴 뿐. 나름 야망 있는 용병으로서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온 파벨의 힘으로도 빼낼 수가 없었다. 마치, 트롤의 근육이 꽉 붙들고 놔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설마….’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트롤의 재생력은 관통당한 상태에서도 상처를 재생하는 수준에 이르러서, 검을 제때 빼내지 못하면 완전히 박혀서 빼앗기는 일이 생긴다고.

이상한 건, 심장이 꿰뚫리고 머리에 칼이 박힌 트롤이 재생을 하던 와중에 죽었어야만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거, 희한하네….”

보통 트롤을 죽이는 방법은 머리를 완전히 몸뚱어리와 분리시켜 버리거나, 재생력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단숨에 즉사시키는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평범한 용병들에겐 불가능한 방법. 제국의 기사나, 검호,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고선 고품질의 마도구를 써야만 얼추 흉내라도 낼 수 있었다.

“이건 심장을 먼저 찌르고, 뒤통수에 칼을 박아넣어서 죽인 것 같은데….”

“내가 봐도 그렇군.”

“그게 이상하다는 거요. 이런다고 트롤이 그냥 죽어버리진 않거든. 특히, 투사의 땅 출신들은 더 그래. 어지간한 트롤보다 더 끈질겨서….”

생각할수록 의문이 깊어지는 와중에, 파벨은 문득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실현시킨 인물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처음에 트롤의 포효를 비명소리라 착각했던 것도.

‘트롤이, 이 검의 주인을 피해서 도망쳤다?’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파벨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근처에 검의 주인과 싸운 트롤이, 안 되겠다 싶어서 뒤통수에 칼이 박힌 채 도망쳤다면. 그 주인은 당연히 제 검을 찾기 위해 트롤의 뒤를 쫓지 않았을까-.

우우우웅!

“오메, 시벌!”

그때 트롤의 뒤통수에 박힌 붉은 검이 저 혼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기현상에 놀란 파벨이 발이 뒤엉켜 엉덩방아를 찧고, 에토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던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희는 뭐냐.”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에, 자석처럼 이끌리듯 고개를 든 둘의 시야에.

“남의 검을 함부로 만지다니. 도둑인가?”

트롤보다는 작지만, 어지간한 오크와는 견줘도 될 만한 체구의 야만인이 들어왔다.

“야, 야만인…?!”

소문으로만 들어본 야만인의 등장에 놀란 파벨이 경악했다.

정황상, 눈앞의 야만인이 트롤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야만인이라니. 어찌 보면 그린스킨 만큼이나 위험한 종족들 아닌가…….

“서, 서릿골의 전사. 정말 서릿골에서 온 야만전사이신가?”

“보면 모르나?”

“보, 보면 알지. 하지만 야만전사들은 우리 언어에 서툴다고 들었네. 하지만 그대는 너무나 유창한…….”

“말 잘하는 야만인도 있겠지. 비켜라.”

어이쿠! 에토는 우악스런 야만인의 손길에 떠밀려 파벨이 엉덩방아 찧은 곳까지 물러났다.

야만인들은 문명화가 덜 돼서 함부로 접근하면 위험하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속으로 되새기던 에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검을 뽑을 생각인가? 그런 거라면 사람을 더 붙여주겠네. 아까 해보니까 아무리 해도 안 뽑혀서…….”

쑤욱.

뽀, 뽑혔네? 에토와 파벨의 반응이 짠 것처럼 똑같았다.

그럴 수밖에, 그렇게 힘이 약한 편도 아닌 파벨이 전력을 다해도 꼼짝도 안 하던 게. 야만인이 한 손으로 살짝 잡아당기자 너무나 쉽게 빠져버렸으니.

“냄새난다니. 코도 없는 놈이 뭐라는 거냐.”

우우우웅!

“시끄럽긴…. 주머니에 처넣기 전에 얌전히 있어라.”

우우우웅.

그러나 야만인의 놀라운 행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아니, 그의 시선이 붉은 검을 향한 걸 보면 검이랑 대화를 하는 것같았다. 어느 쪽이건 제정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만.

“고, 고맙네. 하마터면 트롤한테 큰 화를 당할 뻔했는데….”

“감사를 들을 만한 일은 안 했는데.”

“우리 힘으로는 트롤을 못 잡았을 테니까. 덕분에 산 셈 아니겠나?”

“이놈이 나한테 칼침 맞고 도망가지 않았으면, 애초에 마주칠 일도 없었을 거다.”

“하하. 하기야 그런가? 그래도 도망치느라 마주쳤다면, 주변을 배회하다가 우연히 조우했을 수도 있다는 소리지.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게 해주게.”

“속 편한 놈이군.”

야만인은 심드렁한 투로 에토의 감사인사를 흘려듣고는,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그쪽은 상인인가? 식구가 꽤 많아 보이는데…. 마차는 어디에 바꿔먹었지?”

“아, 그게 말일세…….”

에토는 본인의 상황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본디 렌포드 왕국에서 자원난에 허덕이는 아르곤 왕국 북부에 상행을 갔다가 반란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졌고, 대신 포츠랄 산맥을 넘어 베이츠에서 물건을 팔기로 했다가 마차가 고장 난 본인의 신세를.

“운도 없군.”

“살았으면 된 거지. 어쨌거나, 인부들은 전부 살았으니까 말일세. 물건들도…….”

에토는 허겁지겁 도망치다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멈춰선 인부들을 보며 웃었다.

“바닥에 내팽개치긴 했어도, 잃어버리진 않았고.”

“무슨 물건을 팔지?”

“아, 관심이 있나? 자네만 괜찮다면, 물건을 아주 싼값에 넘겨줄 수도 있네. 이러나저러나 목숨을 구해줬으니.”

“물건부터 보고.”

“어이! 자네들, 그러고 있지 말고 와서 손님께 물건 좀 보여드리게!”

멋쩍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인부들이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곤, 행낭 중 일부를 가져와 야만인의 앞에다 펼쳐 놓았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한 야만인이 깊은 관심을 내비쳤을 땐, 에토가 흐뭇한 얼굴로 설명했다.

“어떤가? 품질은 의심할 여지 없이 상등품. 렌포드 왕국에서도 취급할 수 있는 상단이 몇 안 되는 품목들로만 골랐네.”

마치 주변 사람들에겐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작게 속달거리는 에토의 모습은 퍽 호들갑스러웠으나 실제로도 그럴 만한 물건들이었다.

“향신료?”

“하하! 맞네. 특히 재료의 보존성을 늘려주고, 특유의 향으로 식욕을 돋구는 데에 최고인 것들로만 골랐지. 아르곤 왕국 북부는 고기를 오래 보존해서 먹을 수 있도록 많이 해먹지 않나?”

“베이츠에서도 잘 팔리겠군. 여기저기 쏘다니는 놈들이 많으니까.”

“오? 제법 식견이 괜찮으시군. 내가 베이츠를 차선책으로 고른 이유일세. 게다가 그쪽은 제대로 된 향신료가 귀해. 팔 수만 있다면, 가격이 아르곤 북부의 몇 배는 뛰겠지.”

잔뜩 신나서 떠들던 에토가 아차- 하는 표정이 돼선 웃음을 거두었다.

“이런, 손님을 앞에 두고 너무 잡소리를 길게 했군. 그래서 어떤가? 관심이 좀 생기나?”

“사지.”

“좋아! 그럼 가격은…….”

“대신, 지불은 여기 말고 다른 데서 하지. 돈주머니를 부하한테 넘겼거든. 어차피 베이츠로 가려면 지나가야 하는 길이니, 돌아갈 필요도 없다.”

“좋네! 그럼, 우리도 금방 채비하지.”

*

*

*

‘이 녀석. 정말 상인이 맞나?’

자신을 에토라고 밝힌 젊은 상인을 곁눈질한 칸이 내심 생각했다. 도저히 상인처럼은 안 보인다고 말이다.

트롤 투사를 추살한 야만인 앞에서 귀한 향신료를 떡하니 보여주는 것부터가,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을 짓이었다.

‘약탈당할 걱정부터 하지. 보통은.’

그런데 이놈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마냥 칸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에 반해 파벨이라는 호위 용병은 아직도 이쪽을 향해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데도….

“흠. 그런데 렌포드 왕국어가 제법 익숙한데. 어디서 따로 배운 건가?”

“예전에 잠깐.”

“그렇군. 하긴, 제국을 빼고도 나름 큰 규모니까. 배워서 나쁠 건 없지. 그런데 포츠랄 산맥에는 어쩐 일로…….”

“베이츠로 가던 중이었다.”

“오! 이거, 운명이 느껴지는군. 목숨을 구해준 전사가 마침 방향도 같다니 말이야. 설마, 자네도 나처럼 렌포드에서 출발한 건가?”

이 새끼, 말이 왜 이렇게 많아.

마치 멍청한 얼굴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수다스러움에 칸이 내심 질려 하며 대충 대답했다.

“아르곤.”

“아르곤이라고…? 설마, 아르곤 북부를 지나서 온 건가?”

“그런데.”

“오, 이런. 그쪽은 지금 난리도 아니라던데! 혹시, 그쪽 소식에 대해서도 아는 게 있나? 반란이 어떻게 되었다든가 하는….”

“반란은 끝났다. 완전히.”

그게 정말인가? 에토가 화들짝 놀라며 이것저것 묻는 와중에, 칸은 귀찮다는 듯 휘휘 손을 저었다. 질문은 나중에 하라는 의미였다.

“도착했다.”

“응? 벌써?”

에토가 의아한 목소리로 답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트롤과 마주친 지점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 칸의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장소에는 사람의 인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포츠랄 산맥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울창한 나무만이 가득했을 뿐…….

“오셨습니까.”

그때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치, 주인을 모시는 하녀처럼 공손한 말투. 그러나 여인의 전신은 피로 목욕했다시피 붉었고, 손에는 어떤 생물의 살점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뭐냐. 꼴이 왜 그래.”

“트롤의 피를 좀…….”

“아, 그렇지. 잘했다.”

“예.”

일련의 대화가 워낙 휙- 휙- 지나간 탓에 반응이 늦었다. 에토는 그들이 마주친 트롤 말고도, 다른 트롤이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트롤을 대체 몇 마리나 죽인 거요?”

“글쎄. 전부 세어보진 않았는데.”

“넷입니다. 도망친 놈까지 하면 다섯이군요.”

“다섯? 설마 둘이서 트롤 투사 다섯을 죽였다고?”

이동하는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파벨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마이아. 돈주머니를 꺼내. 살 게 좀 있다.”

“예.”

정작 당사자인 야만인과 창을 든 여인은 파벨의 의문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소리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처럼.

파벨이 의혹 가득한 시선을 던지건 말건, 에토와 칸은 금화와 향신료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거래를 마쳤다.

베이츠에서 팔면 몇 배나 되는 금화를 받았을 법한 물건을 헐값에 넘기고도, 에토는 전혀 아깝지 않다는 듯 흡족해했다.

‘이거, 완전 호구네.’

칸은 그런 에토의 얼굴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귀족가 도련님이 취미로 장사라도 하는 건가? 그렇다고 치기엔 품목이 너무 고급인데-. 게다가 렌포드 왕국은 메인 퀘스트에 등장할 만큼 나름 중요한 지역 중 하나다. 그곳에 거점을 둔 거대 상단은, 제국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엄청난 자금력을 보유한 까닭에 낙원의 엘프들이 호시탐탐 노릴 정도였지. 그와 관련해서 발생한 분쟁이 메인 퀘스트로 이어지기까지 하고.

‘그러고 보니, 그 상단이 주력으로 삼은 품목 중 하나가 최고급의 향신료…….’

그래. 이놈이 나한테 넘긴 물건처럼.

칸의 시선이 저절로 에토에게서 구매한 향신료로 향했다. 그 상단의 주요 돈줄 중 하나가 향신료이고, 비밀리에 국가가 나서서 무분별한 반출을 통제하고 있음은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정보다. 그런데 이놈은 어떻게….

“왜 그러시나?”

생각을 끊듯, 헤실헤실 웃는 에토의 말소리에 정신을 차린 칸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호구가, 그 상단주랑 관련이 있지는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인물이, 메인 퀘스트와 연관된 세력과 연결점이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차라리 우연히 마주친 엘프가 선량하고 착한 인물이라는 말을 믿지.

‘아니, 그건 좀 아닌가…?’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했다. 그동안 온갖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며 발달한 불행 감지기가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이놈이랑 더 엮이면 큰일 난다.’

어차피 살 건 전부 샀고, 더 이상 볼일도 없다.

“그럼, 이만…….”

“아. 베이츠로 간다니 마침 궁금해졌는데, 그대도 암시장에 올라올 예정이라는 영웅의 유물이 목적인가?”

“유물?”

“그래, 유물. 혹시 모르고 있었나? 무려 공간을 조종하는 힘이 담긴 유물이 경매에 올라올 거란 소문이…….”

“그거라면 알고 있다.”

‘게임에선, 악마 추종자들에 의해 강탈당하고 마는 유물이지.’

그 유물을 훔친 악마 추종자가 훗날 악마와 계약해 네임드가 되어 플레이어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때 놈이 자랑스레 자신의 성공담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덕분에 알게 된 정보.

그게 정확히 지금 시기인지는 몰랐지만, 하얀 까마귀의 레븐을 통해 입수한 경매 정보로 칸은 그 시기가 지금임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악마 추종자들도 움직이고 있겠지.’

그 네임드 놈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칸은 반드시 암시장의 유물을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알파의 영혼비의를 창안한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유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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