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무법도시 (3)
마도사 모르탈리아.
게임에서도 ‘모르탈리아 시리즈’로 불리는 아이템들이 종종 등장하곤 했는데, 그 모르탈리아 시리즈의 주인 되는 고대의 주문쟁이가 바로 모르탈리아였다.
하나하나가 마법사 직군을 육성하는 유저들에겐 필수로 챙겨야 할 준종결급 아이템이며, 어떤 것은 종결급 아이템으로 취급될 만큼. 미들랜드 퀘스트의 세계관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
게다가 대마법사도 아니고 마도사다.
현시대의 마법 수준으로는 해석조차 불가능한 지식과 물건들을 후세대에 남긴 존재이며, 마법의 영역을 벗어나 온갖 주술에도 능통한 존재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드라우프니르가 사용하는 ‘혈주술’ 같은 것들 말이다.
[그 비의를 만든 존재에 대해선, 많은 걸 얘기해줄 수 없다. 너가 행한 업적은 분명 대단한 일이나, 이를 갈음하기엔 충분치 않다. 하지만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겠지. 그 이름을 토대로 무엇을 알아내건, 그것은 너의 몫이니.]
이전에, 의뢰의 대가로 정의의 신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온 인물의 이름이 바로 모르탈리아였다.
[전사신의 어린 대전사야. 나는 네가 무슨 목적으로 그 존재를 쫓으려 하는지 모른다. 굳이 관여할 생각조차 없지. 다만, 명심하라. 허락되지 않은 지식이란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니. 스스로의 목숨을 귀히 여긴다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거라.]
대답의 말미에 의미심장한 경고가 뒤따랐으나, 칸에게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미들랜드의 바깥에는 공허만이 존재한다는 알파의 말은, 지금껏 칸이 붙잡은 실낱 같은 단서를 통째로 부정했다. 공허를 받아들이며 차원의 바깥을 엿본 대마법사가 직접, 차원의 바깥에는 ‘옛 신’은커녕 공허만이 존재했다고 장담하면서 말이다.
그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생각과 방법을 달리할 필요성은 느꼈다.
‘차근차근, 처음부터.’
그 시작이 바로 ‘영혼을 다루는 비술을 창안한 존재’였고, 그 정체가 바로 모르탈리아였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진정한 정체가 드래곤이 아니냐는 말조차 나오는, 불가사의한 존재….
‘게임에서도 별달리 나온 정보는 없지. 고대의 존재라는 것과 최소한 초월자의 격에 도달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마탑이 사용하는 공간을 다루는 마법이 모르탈리아에게서 나왔다는 것까지.’
그것만으로도 알아볼 가치는 충분하다.
단순히 마법으로 공간에 간섭하는 존재라면 모르겠으나, 영혼을 다루는 비술에도 능통하고 그것을 정립한 초월자라면 자신의 빙의와 관련된 비밀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어쩌면,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지.
‘게임 시스템이라는 불가해한 것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 우선은, 차원 이동과 빙의라는 분명한 현상에만 집중하는 거야.’
그에 대한 첫걸음이 바로 암시장의 유물이다.
에토는 소문에 불과하다며,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 제 말을 곧장 부정했으나 칸은 안다.
경매에 올라가는 건 100% 확실한 정보이고, 그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암시장의 주체들이라고.
일종의 호객행위다.
귀한 물건을 팔 건데, 정말 사러 안 올 생각이야?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실제로도 대륙의 돈많은 호사가들이나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엄청난 경쟁이 붙겠지. 가격은 천정부지로 뛸 거고.’
칸은 제 수중에 있는 돈을 적당히 가늠하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자신도 부자라고 할 수 있겠지. 그동안 의뢰를 통해 벌어들인 돈도 상당한 데다가, 북부를 떠나기 전에 헤른이 왕가의 포상금을 대신 주는 거라며 금화를 주기도 했고, 인형술사와 아쉬스가 남긴 마도구와 연구 서적들을 얀에게 넘기는 대가로 마탑의 이름으로 된 수표까지 받아 챙겼으니.
‘그래도 한참 모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거부들과 경쟁할 정도에는 한참 못미친다. 그나마 경매에 올라오는 유물이 모르탈리아의 것이란 정보를 자신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물의 진가가 알려지지 않은 만큼, 아예 못 비벼볼 정도는 아니겠지. 그러나 어디든 자신의 운을 믿고 돈을 지르는 도박쟁이가 있는 법.
만약, 그런 미친놈이 유물을 가져간다면….
“그땐 진득하게 일대일로 대화를 나눠봐야겠지.”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이쪽 일 때문에 말한 거요. 그나저나.”
그의 곁에서 나란히 걷는 에토를 흘겨보던 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정말 여기까지 멀쩡히 걸어서 왔군. 짐까지 들고서 말이야.”
“하하…. 상인이라면 싸울 줄은 몰라도, 도망칠 체력은 있어야 한다고 누누이 들어왔던지라.”
“누군지는 몰라도, 현명한 양반이군.”
“그렇지요….”
애매한 투로 긍정하는 에토의 반응이 묘했으나, 칸은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이놈과 연관되는 것조차 꺼려하던 그였으니.
‘이미 여기까지 같이 온 마당에 의미는 없겠지만….’
포츠랄 산맥을 넘어, 베이츠에서 물건을 무사히 팔 수 있도록 호위를 부탁한다. 암시장에 대해 칸이 관심을 보이기 무섭게 에토가 눈을 빛내며 제안한 의뢰를, 칸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제는 포츠랄 산맥을 무사히 지나 베이츠가 머지 않았다.
그토록 엮이지 말자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목적지까지 동행하고 만 것.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경매 때문에 돈이 필요한 입장에서, 거절하기엔 너무 후한 보수였으니까.
무엇보다.
‘만약, 경매에 참가하실 생각이시라면. 제가 어떻게든 손을 써보겠습니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어지간한 신분으로는 입장조차 불가능한, 암시장의 경매에 참가할 권한. 그 자체를 보수로 내건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던 것. 하지만 이 불길한 놈과 엮이는 위험성을 감수하고서 얻을 만큼 값진 보상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생각을 갈무리한 칸의 심유한 눈빛이 저 멀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베이츠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오랜만이군.’
*
*
*
베이츠는 도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경계가 허술했다. 작은 마을이라도 외부의 침입을 경계해 나무로 된 방책을 세우기 마련인데, 베이츠는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성벽은커녕 울타리조차 쳐놓지 않았다.
괜히 무법도시라 불리는 게 아니다.
“신기하군. 대체 어떻게 이런 곳이 생기고, 유지되는 건지….”
“필요하니까.”
“필요?”
“좀도둑부터 해서, 누군가를 겁탈했거나 사람을 죽인 범죄자들. 양지에서 떳떳하게 활동하기 힘든 장사를 하는 상인들, 불법적인 실험의 재료를 간편하게 구하려는 마법사들, 가진 힘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하고 싶은 강자들. 그런 놈들의 필요가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곳이 베이츠란 말이다.”
“역시, 그대는 어지간한 범부들 이상으로 똑똑하군. 야만인에 대한 소문들이 전부 거짓이라 여겨질 정도야.”
칸은 에토의 흰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베이츠 안으로 들어섰다.
성벽조차 없는 도시에 경비병이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아무런 검문도 없이 도시 안에 들어선 칸은, 갑자기 등장한 야만인을 향해 쏟아지는 관심을 평소처럼 받아냈다.
“갑자기 정해진 행선지일 테니, 물건을 팔 사람이 딱히 정해지진 않았겠지. 그럼 이 근처에서 적당히 파는 게 좋을 거다.”
“어째서?”
“깊이 들어갈수록, 돈을 받기 힘들 테니까.”
“음…….”
에토는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돈을 받기 힘들다는 건지, 대충 알아들은 것이리라.
온갖 범죄자가 모인 쓰레기통 같은 이 도시의 중심에서 살아가는, 가장 오래 묵은 쓰레기들이 대체 어떤 놈들일지는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을 테니.
“무슨 급한 일이 생긴게 아니라면, 외곽 구역을 절대 벗어나지 마. 이쪽은 그나마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으니까.”
“규칙?”
“끝장을 볼 게 아니라면, 건들지도 말라는 규칙.”
흠칫 놀란 에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제야 자신이 어디에 발을 들인 건지, 실감을 하는 눈치였다.
끝장을 볼 게 아니라면, 건들지도 않는단 말은. 한 번 건든 이상 끝장을 보고야 만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니. 베이츠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사고의 결말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말이었다. 혹은,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거나.
“하, 하지만. 암시장에 들어가려면 도시의 중심에 가야하는 것 아닌가?”
“그때는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음…! 확실히, 그대는 트롤 투사를 능가하는 대단한 전사였지. 게다가 이곳의 규칙에 해박한 걸 보니, 이쪽에 와 본 경험이 있는 듯한데……?”
“예전에 잠깐 머물렀었지.”
“그럼, 도시에 아는 사람이 있겠군? 자네 같이 대단한 전사가 아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뛰어난 사람일 테고!”
“있기야 하지. 그런데 소개는 못 해준다.”
“어째서?”
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에토를 바라보다 툭- 하고 내뱉었다.
“시체가 물건을 사주진 못할 테니까.”
“에……?”
그 말의 의미를 제때 받아들이지 못한 에토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고, 칸은 여상한 투로 당연한 사실을 고하듯 재차 말했다.
“죽었다는 말이다. 전부 다.”
*
*
*
누구의 손에? 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에토는 필사의 인내심으로 참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하하…! 애석한 일이군. 그럼, 장사를 하려면 임시로라도 가판을 하나 구해야 하는데…….”
대신 다급히 화제를 돌렸고, 실제로 주변에 주인없이 방치된 가판을 하나 발견했다.
흠칫.
물건을 올려두기 위해 가판을 한 번 닦다가, 아랫쪽에 묻은 혈흔을 발견한 인부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대는 일이 있었다마는.
어쨌거나. 너무나 순조롭게 장사의 준비를 끝마친 에토가 뿌듯한 얼굴로 외쳤다.
“렌포드 왕국에서 들여온 향신료 좀 구경하고 가시오!”
익숙하지 않은 호객 행위가 조금은 어색했지만, 다행히 물건의 이름값 덕택에 순식간에 손님이 몰려들었다. 높은 가격에 침을 뱉으며 물러나거나, 은근슬쩍 훔치려는 무뢰배가 종종 있기는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퍽. 콰직!
주먹질 한 방에 사람을 마차에 치인 것처럼 날려버리는 야만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 곁을 지킨 덕분이었다. 게다가 경매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이들이 종종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금화 몇 장은 가볍게 쾌척할 정도로 여유가 넘쳐나는 이들 말이다.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전무하다시피 한 베이츠의 특성상, 대부분의 자원을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고. 바깥에 비해 몇 배나 되는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렌포드 왕국에서도 엄격히 관리하는 고급 향신료의 경우 두말할 것도 없었다.
“최대한 많이 주시오.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
“아니, 내가 더 비싼 값에 사겠네. 대신 전부 나한테 팔아! 제발!”
“닥쳐! 내가 먼저 산다고 말했잖아!”
“더 많이 내는 사람이 사는 거지. 순서가 어디있어?”
“이런 씹! 끝장을 보자는 거야?”
“이 새끼가…!”
물론, 갑자기 물건을 사겠다며 다투더니 서로를 향해 칼부림을 하는 손님들이 종종 있었지만….
“그냥 기다렸다가, 이기는 놈한테 팔아.”
“저,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결과 자체만 보면, 매우 성공적인 상행임에 틀림없었다.
당초 예상했던 수익의 몇 배. 아니, 십수 배 이상이었다. 파벨과 인부들에게 약속한 추가 보수, 칸에게 약속한 거금의 금화를 전부 제하고도 기존의 수익을 아득히 넘을 정도.
‘푸흐흐. 이만하면, 그분께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행복한 상상에 젖어든 에토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다만, 그 웃음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들 비켜─!”
“이 새끼들아! 길 막으면 전부 칼침 맞는줄 알아!”
갑자기 등장한 한 무리의 칼잡이들이, 인파를 강제로 흩어버렸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흉흉한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인파가 아무런 군말없이 흩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저들이 누구길래?’
저절로 떠오른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도망치듯 멀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
“중앙 구역 거주민이다….”
에토가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토록 두려운 존재가 느닷없이 행차한 것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우, 웃고 있어?’
언제나 똥씹은 표정을 유지하던 야만인이, 중앙 구역의 거주민을 보자마자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 전부 죽인 게 아니었나?”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순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