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무법도시 (4)
어느 장소건, 그곳에 사람이 모여 집단을 이룬다면 상하가 나뉘기 마련이다.
‘무법’을 표방하는 베이츠조차 예외는 아니었고, 도시의 최상층부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중앙 구역에 본인의 거처를 두었다. 마치, 외곽의 떨거지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도 아예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대륙에서도 이름을 날린 악인. 교회에서 터부시하는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이룩한 상인. 불법적인 실험에 손을 댄 끝에 얻은 결실로 드높은 경지에 오른 마법사. 본인의 노력으로 이룩한 강함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에 혈안이 된 강자만이. 중앙 구역의 거주민이 될 수 있지.’
외곽 구역에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남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 또한, 그들의 일부고.’
자신이 베이츠의 중앙 구역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더없이 큰 영광이라 여기는 듯,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떨거지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중년인이 당초의 목적지 앞에 섰다.
“흠. 여기서 렌포드 왕국의 고급 향신료를 판매한다던데. 맞나?”
“예, 예…….”
자신의 등장에 얼이 나간 듯, 어버버 말을 더듬는 젊은 상인의 반응에 더욱 흡족함을 느낀 중년인이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다. 이걸 위해, 그토록 개같이 구른 거지.’
베이츠의 바깥에서는 오물 취급이나 받는 자신이, 이곳에서는 두려움의 상징이자 도시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심지어 외부에서 온 상인조차도 그를 보며 경외심을 보이니. 어찌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까?
그간의 고생을 나타내듯, 얼굴에 새겨진 칼집이 중년인의 미소를 따라 흉측하게 구겨진다.
“가격은 다른 이들이 샀던 만큼 주도록 하지. 남은 물건들 전부 주게.”
“죄, 죄송하지만. 거의 다 팔려서 남은 게 별로 없습니다.”
“…….”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던 걸까. 중년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정말 최상품들만 정확히 남았습니다. 그거라도 괜찮으시다면…….”
“흐. 진작부터 그걸 말하지 그랬나?”
최상품! 다른 이들에겐 판매하지 않은 진짜 귀한 물건들을 자신에게 판매하겠다는 거다. 중년인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정도로 찢어졌다. 이런 특별 대우를 받을 때마다, 더없이 큰 행복을 느낀다는 것처럼.
“값을 치러라. 아주 정중히, 후하게 말이야.”
품격이란 여유에서 나온다. 그리고 여유는 금전적 풍요로움으로 드러내는 법. 중년인은 그의 수하를 시켜 상인이 요구한 가격의 배가 되는 금화를 가판대에 떡하니 얹었다. 그에 놀란 상인이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지만, 중년인은 푸근한 미소를 흘리며 받으라 했다.
‘대륙의 귀족들도 나처럼 자비롭지는 않지. 나야말로, 진짜 타고난 지배자라 할 수 있…….’
“살림살이가 요즘 괜찮나? 대머리.”
그때 비웃음섞인 목소리가 중년인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대체 왜 이제야 눈치챘는지 의아할 정도로 거대한 체구의 야만인을 뒤늦게 발견한 그의 시선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맨들거리는 정수리에서는 저절로 식은땀이 흐르고, 느슨하게 풀어졌던 육체가 바짝 긴장했다는 걸 드러내듯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뭐? 이 씹새가 지금 뭐라는……!”
“그만.”
“야만인들이 그렇게 무례하다더니, 제가 오늘 혼쭐을 내주겠.”
퍼억!
“그만하래도!”
허억허억. 제 수하를 후려친 중년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금패 용병조차 가지고 노는 실력자라 알려진 그가, 고작 주먹질 한 번에 지쳤을 리가 없다.
심리적 압박감에 호흡이 망가진 것이다.
‘어, 어째서 저 자식이 여기에……!’
남은 여생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아니, 그렇게 바라왔던 최악의 인물이 나타나자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순수한 의문이 차올랐다. 그딴 미친 짓거리를 저질러놓고, 당당히 베이츠로 돌아와?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애초에 저놈이 제정신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오랜만에 보는데. 인사도 안 받아주는군. 이래서 세월이 무서워. 이거, 예전 생각이 좀 나게 도와줘야…….”
“크흠! 너무 반가운 얼굴이라 놀라서 그랬지. 반갑네! 정말 반가워!”
화들짝 놀란 중년인이 두 팔을 벌려 칸을 껴안으려 했다. 그러다가 칸의 눈썹이 날카롭게 좁혀지자, 움찔거리며 멋쩍게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런데 말이야. 베이츠에는 어쩐 일이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
“이렇게 열린 공간에서 말할 건 아닌데. 어디, 한적한 곳 없나?”
“당연히 있지. 아니, 없어도 만들어야지!”
다급한 목소리로 따라오라 말하는 중년인의 뒷모습을,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에토가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는 시선을 스윽 돌려, 이 상황을 만든 칸을 쳐다봤다.
“잠깐 다녀오지. 아니, 너도 같이 와라. 가판 정리는 사람들한테 맡기고.”
“예? 예…….”
본인도 모르게 공손한 말투로 답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토는 떠나가는 칸과 마이아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이 우연찮게 마주친 야만인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인물이라는 걸.
그리고 떠올렸다.
‘어, 어쩌지?’
그동안 지나치게 스스럼없었던 자신의 행동들이….
*
*
*
‘더럽게 폼 잡기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재회한 기분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자신이 깜빡하고 죽이지 못한 대상이라면 더욱이.
“여, 여기라면. 주위 시선 눈치 안 봐도 돼.”
거물이 된 대머리의 말에 칸이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이츠의 외곽과 중앙의 정확히 중간 지점. 그곳에서도 상당히 음침한 골목에 지어진 건물로 자신을 인도한 대머리의 속내가 뻔히 보인 까닭.
[탐색]
‘대충 이놈까지 합치면, 스무 명 정도. 오면서 마주친 놈들까지 가정하면, 마흔은 우습게 넘겠군.’
놈이 어떤 상황을 가정하고, 자신을 이런 곳으로 끌고 왔는지 뻔히 읽혔다.
나름 꼴을 보아하니 자신이 베이츠를 마지막으로 떠났던 그때와 비교도 안 되게 출세한 모양인데, 이 정도로 자신을 경계하는 모습은 가히 애처로울 지경.
“그래서…? 베이츠에는 대체 무슨 볼일로 왔어? 응?”
“그걸 너한테 말해줄 이유가 있나?”
“하하! 당연히 그럴 필요는 없지. 그래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지.”
“확실히 많이 컸군.”
멈칫-.
아무렇지 않게 흘린 말에 대머리가 크게 동요했다.
“으, 으음. 그때랑 비교하면 신세가 많이 나아지긴 했지…. 하,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짓거리는 안 했다고?! 방금도 봤지? 원래 가격보다 더 후하게 쳐주고 물건을 사는 내 모습을!”
그래, 아주 대견하네.
칸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하는 대머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야. 딱히, 뭘 할 생각도 없다. 찾는 물건만 구하고, 조용히 떠날 생각이거든.”
“물건? 무슨 물건인데? 말만 해! 어떻게 해서든 찾아줄 테니까!”
“오늘 경매에 올라오는 유물.”
“……!”
노골적으로 당혹감을 드러낸 대머리가 아차- 하는 얼굴로 뒤늦게 표정을 수습했지만, 이미 늦었음이다.
“유물이라니. 나는 모르는……. 이런 제기랄.”
“알고 있네.”
칸의 입꼬리에 걸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럴수록, 대머리의 얼굴은 점점 썩어들었다.
당연했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물건이야. 너도 알잖아? 암시장이 누구 손에서 만들어진 작품인지는…!”
“알지.”
“경매에 부쳐진 걸 구하려면 돈으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어. 그것도 아니면, 설마 강제로 뺏으려고? 그건 더 안 돼! 예전에 사건 이후로 경비가 더 강화됐다고!”
“나도 굳이 난장을 칠 생각은 없어.”
그러나 칸의 호언장담에도 대머리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어지는 뒷말을 듣고 난 뒤에는, 아예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저쪽에서 날 먼저 건들면, 그때는 또 모르겠지만.”
“자, 장난해?! 그딴 식으로 개판을 쳐놓고, 녀석들이 가만있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대머리가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내친 김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작정했다. 그것이 칸의 신상에도, 자신에게도 이롭다고 판단한 까닭.
“후우…! 솔직히 말할게. 지금 당장 베이츠를 떠나.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 물건은…. 경매에 쓰기로 생각한 돈을 나한테 넘겨. 나도 최대한 보태서 입찰해 볼 테니까. 장담해. 절대 장난질은 안 칠 거야. 대신, 너와 나 사이에 있던 일은 이거로 끝이야.”
“흠…….”
칸이 고민하듯 수염이 자라난 턱을 어루만졌다.
연신 초조함과 두려움을 드러내던 대머리도, 지금 만큼은 진중한 얼굴로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저, 저기. 뭔가 대화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런데…. 대체 이분이 예전에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건가요?”
둘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채. 내면에서 벌어지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에토가 개미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별일 없었는데. 그냥, 사소한 마찰이 좀 있었지.”
대충 얼버무리는 말. 그러나 에토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과거에 있었노라고.
“그래. 나도 귀찮은 건 싫으니까, 이번엔 널 믿어보지.”
“저, 정말?!”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해.”
약속을 어기면, 그때는 날 다시 보게 될 거야.
*
*
*
베이츠의 중앙 구역.
온갖 범죄자들이 모인 이 도시에서도 최악을 달리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이곳은, ‘거주민’라 불리는 소수의 인물들에게만 허락된 일종의 금역이었다.
“에런 님…! 크, 큰일입니다!”
그런 중앙 구역의 거주민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에런이라 불리는 이 남자는, 한 손에 꼽는 서열의 지배자였다.
무쇠팔의 에런.
드워프 장인이 만들어준 의수로 양팔을 완전히 대체한 그의 완력은, 트롤조차도 능가하는 수준이며 기사의 오러에도 대항할 수 있다고들 한다.
“뭐냐.”
평균에 못 미치는 신장. 그러나 기형적으로 길쭉한 의수를 훤히 드러낸 에런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유물에 대한 소식이 베이츠 주변 국가로 퍼지면서 사람이 모여드는 지금. 에런의 사업은 엄청난 성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누구의 시선조차 신경 쓰지 않고 본성을 해방하게 만들어주는 그의 사업은, 특히 민중의 시선을 어느 정도는 의식할 수밖에 없는 귀족들에게 대성황이었다.
다만 그들의 까다로운 취향에 맞춰주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한 까닭에 며칠을 통 잠도 이루지 못했다.
“요점만 말해라. 곧 사업장에 큰 손님이 오신다니까.”
“그, 그놈입니다! 그놈이 다시 베이츠에…!”
콰직!
의수에 묻은 피를 털어낸 에런이 머리가 짓이겨져 즉사한 수하를 대충 창밖으로 던졌다.
“요점.”
그 짧은 한마디에 함축된 살의에 압도된 다른 수하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베, 베이츠의 악몽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뿌드득. 쾅!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한 듯, 에런이 후려친 벽이 깊게 파였다. 그러나 에런의 얼굴에 맺힌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하하…. 하하하─!”
순수한 기쁨.
아니, 환희에 가까운 감정만이 가득했다.
“드디어. 드디어 놈이 제 발로 지옥에 기어들어 왔구나─!!”
증오와 살의가 정도를 넘어서면 그렇게 되는 걸까.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박찬 에런이 외쳤다.
“너, 지금 이 길로 악몽을 기억하는 놈들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해라. 아니, 이미 그 녀석들도 다 들었겠지…. 그래…….”
그 순간을 기점으로, 에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끝내주는 밤이 되겠어.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