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무법도시 (5)
결론부터 말하자면, 칸은 베이츠를 당장 떠나지 않았다.
대머리의 경고를 무시한 건 아니었다.
그저, 뜻밖의 소식에 계획을 변경했을 뿐.
‘그날 다 뒈졌을 줄 알았는데.’
과거, 칸이 베이츠에 머물렀던 건 아주 잠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르곤 왕국으로 향하던 와중에 잠깐 거쳐간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도시에 입성한 칸을 반긴 건, 자신을 노예로 팔겠다니 뭐니 하면서 덤벼드는 미친놈들이었다.
‘분명, 그때 다 처리했을 텐데.’
그날 칸의 손에 죽은 거주민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중에는 대머리가 간부로 있던 세력의 주인도 있었다. 당연히 덤벼드는 부하들도 싸그리 쓸어버렸었는데….
“죽은 척을 할 때 유용한 마도구를 써서 살아남았다라…. 기가 차는군.”
정작 거주민의 휘하에서 간부 노릇을 하던 대머리가, 마도구를 써서 목숨을 건졌단다. 게다가 제 두목의 재산을 토대로 중앙 구역에 들어갈 단초까지 마련했다고 하니, 놈의 입장에선 칸이 대단한 은인인 셈이다.
그런데, 대머리가 말하길.
“그때 안 뒈진 놈이 또 있다고?”
“네가 팔을 다 썰어버린 간부 기억나? 그놈, 안 죽었다. 심지어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고, 두목보다 큰 세력을 이루고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어. 나는 그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라고…….”
기억에 있었다.
상대방의 신체를 뜯어내는 것에 가학심을 느끼는 미친놈. 그래서 칸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란 의미에서 친히 양팔을 잘라버렸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출혈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뒈졌을 텐데?”
“두, 두목이 숨겨뒀던 포션이 있었어. 그걸 자기한테 쓴 거지. 입을 써서 말이야. 게다가 어디 드워프 장인한테 은혜라도 입혔는지, 정교한 의수를 달고 왔더라고. 그래서 무쇠팔의 에런이라 불려. 요새는.”
“무쇠팔이라….”
그것도 마저 뽑아줘야겠군.
‘하지만, 본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돼.’
어디까지나 그의 목표는 경매에 오르게 될 ‘모르탈리아의 유물’이었다. 과거의 인연이야, 겸사겸사 처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수입을 좀 얻는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경매는 언제냐.”
“오늘 밤이야.”
“잘됐군.”
“뭐, 뭐가….”
“너는 처음 약속한 대로, 경매장에 가서 유물을 낙찰받아라. 그리고 물건을 내 앞으로 가져와. 그럼, 그만한 보수를 주마.”
“너, 너는 어쩌려고.”
“아는 사람이 크게 출세했다는데, 가서 축하라도 해줘야지.”
칸이 농담처럼 던진 말의 의미를 깨달은 대머리의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튀어나왔다.
“알았으면, 당장 움직여라.”
*
*
*
오랜만에 들어선 중앙 구역의 모습은, 여전히 난장판에 가까웠다.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곤 사람의 시체를 옮겨다 나르는 수거꾼들과 거주민들의 노예, 혹은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하며 추악한 콩고물이나 받아먹는 떨거지들뿐. 그야말로 절망이란 단어를 억지로 한 곳에 욱여넣은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과거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건물을 마구잡이로 증축하고, 철거한 탓에 난잡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어.’
지상으로의 증축은 대부분 4층 정도의 높이로 제한하는 대신에 지하로의 증축에 치중한 눈치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탐색 스킬이 발아래의 생명 반응을 전하는 걸 보면, 개미굴처럼 엄청나게 확장을 한 게 아닐는지.
‘바글바글하네.’
그렇게 잡히는 반응이 얼추 숫자로 세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으니. 만약, 도시의 거주민들이 작정하고 칸을 적대할 경우 일개군단 규모의 적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칸은 확신하고 있었다.
‘전에도 그랬지.’
이놈들은 그저 본인의 욕망을 위해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같은 거주민이 갑자기 살해당하건 말건,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저 사리사욕을 채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존재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엇보다 그 이기적인 것들에게, 서로의 존재는 베이츠란 하나의 파이를 두고 경쟁하는 경쟁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오늘 밤에 열린다는 암시장에 대부분의 관심이 쏠렸을 터였다. 직접적인 원한이 있는 ‘무쇠팔의 에런’을 제외한 거주민이 칸에게 관심을 보일 리는 없겠지.
그런 계산이 정확했음을 칸이 깨달은 건, 에런의 사업장 중 하나인 ‘해금’이라는 이름의 술집에 도착한 직후였다.
‘놈의 사업은 주로 타국가의 귀족이나, 거상들의 자녀야. 해금은 일종의 웨이팅 룸이라고 보면 돼. 쉽게 말하자면, 고상한 양반들의 추악한 취미를 아낌없이 해금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할까.’
대머리가 설명한 것과 달리, 해금은 윤락업소보단 고풍스러운 외관의 술집처럼 보였다. 겉치레에 환장하는 귀족들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쓴 것이겠지. 저 멀끔한 외관의 숨겨진 추악한 진실은 땅속에 묻어둔 채.
끼익.
칸이 직접 문을 열기도 전이었다.
“들어오십시오.”
마치 그의 입장을 반기듯, 잘 차려입은 웨이터가 문을 열어 칸을 맞이했다. 칸은 아니꼬운 눈총으로 좌우로 깔린 미남, 미녀들을 흘기다 콧바람을 내뿜으며 안쪽으로 향했다.
“귀족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그치들이 부러워진 거냐?”
“글쎄. 딱히 부럽지는 않더군. 오히려 그들이 날 부러워하겠지. 전심전력을 다해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나를. 뭐…. 켈은 귀족을 닮아가고 싶다 생각한 모양이지만.”
“켈이 누군데.”
“…네놈이 마주친 민둥머리말이다.”
“아. 그놈 이름이 켈이었군.”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와 회포를 푸는 것처럼 들리는 대화.
하지만 그 안에 감춰진 노골적인 살의를, 느끼지 못할 두 사람이 아니었다.
“흐. 그래, 네놈에게 우리는 이름을 기억할 가치조차 없다 이거겠지.”
“뒈진 줄 알았던 놈들 이름을 다 기억하려면, 청년 치매가 올 정도라.”
“…하지만 나는 너에게 감사하고 있다.”
철커덕.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는 에런의 팔에서 기계적인 소음이 흘렀다.
무쇠팔의 에런, 녀석을 지금의 자리에 올려다 놓는 데에 큰 역할을 한 드워프제 의수가 낸 소리였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너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 덕분에 우리의 환상이 깨졌으니까.”
“환상?”
“우리가 막강한 힘을 쥐었다고 생각했던 것. 그게 우리의 착각이었지. 도시에서의 영향력? 상단의 주인들 부럽지 않은 금력?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진짜 힘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부욱!
에런이 제 상의를 찢어버리자, 꾸준한 단련의 흔적이 엿보이는 탄탄한 근육이 눈에 띈다. 그리고 과거 칸이 직접 남겨준 양어깨의 절단 흔적과 진짜 팔처럼 자연스레 뿌리내린 의수까지도.
“무력이야. 압도적인 무력만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지배력이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나는 진짜 중앙 구역의 거주민이 될 수 있었지. 그래서다. 고맙다.”
“고마우면, 밥이라도 사던가.”
“그건 힘들겠는데─!”
싸움의 시작은 에런의 기습이었다.
누군가는 비겁하다 말할 수 있겠으나, 칸은 녀석을 오히려 칭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무식하게 달려드는 것이 전부였던 놈이었는데.
‘많이 싸워본 솜씨군.’
칸의 추측은 정확했다.
드워프 장인의 의수로 양팔을 대체한 이후, 에런은 혹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포츠랄 산맥에 올라 마물과 싸우고, 투사의 땅에서 쫓겨난 그린스킨 투사들을 오로지 주먹으로 때려눕혔다.
본래 그의 육체와 실력으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기행을 한 해가 지나도록 반복했다.
그렇게 그는 예전과 다른, 진짜 강자가 되었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끼기긱!
드워프 의수가 내는 특유의 소음이 귓가를 간지럽히고, 에런이 전신의 무게를 실어 내뻗은 주먹이 칸의 얼굴 정중앙에 틀어박혔다. 파앙! 맨손으로 에런의 일격을 받아낸 칸이 눈살을 찌푸렸고, 에런이 웃음을 터뜨렸다.
“끝이 아니다…!”
끼기기긱!
의수가 내는 소음이 격해진다. 그리고 칸의 손아귀에 붙잡힌 주먹이 점차 칸을 밀어내고, 연이어 터진 충격파에 칸의 육체가 크게 들썩인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격에 칸의 반응이 늦었다 판단한 에런이 곧장 반대쪽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파앙! 허공을 때린 의수에서 발산된 힘에 의해 천장의 샹들리에가 격하게 요동친다. 기껏 붙잡은 손아귀를 놓아주지 않으려던 칸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먹을 피해 물러난 것이다.
“그때랑은 다르지! 어?!”
바닥을 강하게 박찬 에런이 주먹을 휘두르고, 번번한 반격조차 없이 회피에 집중하는 칸.
쾅! 콰직─!
두 사람의 싸움으로 장인의 손길을 타 만들어진 고급 가구들이 박살 나며, 고풍스러웠던 술집이 난장판이 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자신의 사업장이 엉망진창이 되는 꼴을 보면서도, 에런은 조금의 안타까움조차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 비좁은 투기장의 벽을 전부 허물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 예전처럼 날뛰어 보라고─!”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잠에 들 때면 찾아와 그를 괴롭히곤 했다.
고작 한 명의 야만인 전사에게 중앙 구역의 거주민이었던 두목이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십수 년이 넘도록 쌓아온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궤멸한 그날의 기억이-.
그때의 에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해 내려찍히는 야만인의 도끼날을, 사형대에 오른 죄수의 심정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비참하게 바닥을 기어, 일격에 즉사한 두목의 포션을 입으로 깨물어 삼켰다.
그렇게 그는 살아남았다. 치욕스럽고, 구질구질하게.
“덤비라고 했─다─!!”
키기기기긱!
드워프 의수가 내는 소음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마침내 에런의 주먹이 칸에게 닿았다.
포츠랄 산맥의 트롤조차 산 채로 뭉개버리는 괴력이다. 그의 의수는 평범한 인간 전사가 트롤을 제압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물이었고. 에런은 포츠랄 산맥의 트롤에 칸을 대입하여 끊임없이 싸워왔다. 그렇게 축적된 경험이 말해주었다.
끝났다!
의수에 달린 특수한 기능 중 하나. 의수가 자체적으로 발출하는 힘을 외부로 뿜어내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한 점에 실어 터뜨리는 이 일격은 상대가 누구건 공평한 죽음을 내린다.
에런은 이 수법으로 수많은 중앙 구역의 강자를 고꾸라뜨리고, 집어삼켜왔다.
‘너도 다르지는 않을 거다!’
마침내,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악몽이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짜릿한 쾌락이 등줄기까지 치솟았다.
물론, 당장 죽이지는 않을 거다.
자신이 괴로워했던 만큼, 놈도 똑같이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겠지.
“프흐흐.”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의 사업장에 처박아두는 거다. 고약한 취향을 가진 귀부인들도 종종 그의 가게를 찾아오곤 하니까. 꽤 쏠쏠할 터-.
“뭐 하자는 거냐, 그래서.”
“……?”
“보여주려던 거. 언제 보여주냐고.”
그 심드렁한 말투가,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나른한 여유가, 에런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를 이끌어 냈다. 그의 목숨과도 같아진 의수가 부서질 정도의 출력을 이끌어 낸 에런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콰직.
“어.”
“나랑 장난하나?”
칸이 마주 뻗은 주먹에 닿는 순간, 찌그러진 캔처럼 압착되는 의수.
악몽. 아니, 악몽보다 더욱 끔찍한 광경에 에런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나머지 의수의 중간을 붙잡아 악력으로 부숴버린 칸이 실망스럽단 투로 말했다.
“쯧. 시간 낭비했군.”
가라.
그 말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에런의 마지막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