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무법도시 (6)
에런의 사업장, 해금에 자리한 아름다운 외모의 웨이터들은 제 주인의 죽음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칸의 눈에 그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의 반응처럼 비쳤다.
“뭐냐? 너네.”
그 기묘한 태도에 칸이 인상을 찌푸릴 무렵, 웨이터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구불지게 흐르는 검정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 무얼 바른 건지 피처럼 붉은 입술, 짙은 속눈썹.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화장법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다.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SNS스타는 기본으로 했겠는데.’
하지만 그게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칸은 웨이터의 목소리를 듣고서 깨달았다.
“본의 아니게, 저이가 실례를 끼쳤군요. 이렇게 사죄드리겠습니다.”
시발, 남자였어?
중성적인 목소리지만, 분명 남자의 그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옷 아래의 골격이 여성치고는 깨나 넓직하다. 그런데 정작 외모도 그렇고. 입은 복장도 여성용 정복에 가깝지 않은가.
“셰이라고 합니다. 여인들이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일을 소개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중앙 구역에서요.”
“포주라 이 말이군.”
“그저 살아갈 방법을 제시하는 것뿐이에요.”
“그딴 궤변에는 관심 없다.”
갑자기 나타난 여장남자의 헛소리를 더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기왕 이렇게 손을 쓴 거, 중앙 구역의 지배자가 하나 더 줄어도 상관은 없겠지….
딱 보니 주문쟁이는커녕, 최소한의 단련조차 하지 않은 몸뚱어리 정도는 힘을 쓸 필요도 없이 손가락만 살짝 튕겨도 충분하리라.
그러나 칸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여인의 무섭도록 침착한 태도였다.
“…목적이 뭐냐.”
누가 봐도 칸에게 용무가 있는 태도. 그리고 까딱하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차분함. 게다가 에런의 사업장에 있는 웨이터들이 전부 그녀를 추종하는 꼬락서니 하며. 여장남자라는 특징 이상으로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녀석이다.
“아무것도요. 그저, 에런의 돌발행동에 유감을 표하고.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뿐이랍니다.”
“너, 서열이 몇 번째지?”
“음, 애석하지만. 저는 저기 시체가 된 에런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서요. 딱히 아무런 지위도 없답니다.”
중앙 구역의 거주민이 아니라고?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칸이 얼굴을 찡그렸다.
같은 거주민이 아니고서야. 에런의 사업장에 제 수족을 은밀히 침투시키고, 본인까지 자연스레 숨어드는 게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거짓말이라 판단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칸은 어째선지 저자의 말이 전부 사실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째서?’
“후훗. 혼란스런 표정이시네요. 제 생각보다 더 인간적인 분이시라 안심했답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고 해야 할까요?”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거냐.”
결국, 칸은 두 손을 다 들어버렸다.
저 여인의 정체, 자신을 찾아온 목적, 그녀가 지배자의 눈을 피해 이만큼의 수족을 만들어낸 방법.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여인은 그런 칸의 솔직한 모습이 기꺼웠는지, 교태가 흐르는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저 당신을 다시 보고 싶었답니다.”
“다시…? 날 본 적이 있나?”
“예. 물론, 당신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시겠죠. 그날, 당신은 정말 순수한 분노로 시야가 멀어 있었으니. 게다가 당신이 기억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보았답니다. 그날의 사건으로 베이츠의 악몽이라 불리게 된 당신을.”
“그날에…? 아니, 너 설마….”
칸이 무언가 알아차렸단 반응을 내비치자, 여인이 순수한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에 당신은 거주민들의 노리개로, 인형으로, 노예로 취급받던 저희의 처우에 분노했고. 에런과 켈, 그의 두목이 거느린 사업장과 세력을 모조리 파괴했죠. 그때 저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칸은 진작에 그의 정체를 떠올린 지 오래였다.
에런과 켈을 거느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던 녀석을 처리했던 당시.
‘사, 살려주세요…!’
억지로 기워 입힌 여인의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한 채. 전신에 선명히 남은 채찍질의 흔적을 애써 손으로 가리던 소년이 있었다. 제 두목의 괴이한 취향을 충족시키고자, 놈의 부하들이 대령했다던-.
“아하. 설마 그 표정은, 죄책감을 느끼시나요?”
“…….”
“그래요. 당신은 그 남자와 그의 수하를 모조리 처리했지만, 그에게 희생당하던 나와 내 친구들은 그대로 방치해두고서 베이츠를 벗어났죠. 하지만 에런은 양팔이 뽑힌 채로도 살아남았고, 켈은 죽은 척을 하고서 제 두목의 유산을 집어삼켰고요….”
“…….”
“하지만 괴로워하지 말아요. 지금의 내 처지는,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리고 적어도 나와. 이 친구들에겐…….”
그때의 소년이 웃으며 손짓하자, 아름다운 용모의 웨이터들이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
“당신은 악몽이 아닌, 희망이었으니까. 이 도시를 차지한 저들조차,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영웅.”
“음…?”
갑자기 시작된 찬양에 칸이 떨떠름한 투로 물었다.
“정말 그딴 헛소리나 하려고 여기에 온 거냐?”
“네, 맞아요.”
그때의 소년은 여전히 화사한 웃음을 지은 채, 선선히 긍정했다.
“에런은 당신의 등장을 거주민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생각처럼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어요. 모두, 경매장 쪽에 신경이 곤두서 있거든요.”
“유물 말이냐?”
“알고 계셨군요. 네, 그 보물을 얻기 위해 각지에서 찾아온 귀족과 명망 있는 인사들이 암시장에 모여들었죠. 지금도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을 테고요. 제 욕망에 솔직한 그들에게, 지금 같은 기회가 또 있을까요? 그들은 본인의 사업을 더 확장할 기회라 여기고, 몸소 암시장으로 향했답니다. 어리석게도.”
칸은 화사하게 웃는 셰이를 보며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분이 뭔가 뻑적지근하다고 할까.
게다가-.
‘존나 수상한데…?’
딱 봐도 ‘나 뭔가 사연이 있고, 꿍꿍이속도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언행 아닌가.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그냥 덤비는 놈들을 죄 족쳤을 뿐인데, 자신을 일생의 구원자로 여기는 저 눈빛이나 말투가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뭐. 감사인사는 대충 받을 테니까. 이제 서로 갈 길이나 가자고. 내가 좀 바빠서.”
엮이기 전에 튀자.
칸은 그렇게 결론 내리고서 건물 어딘가에 있을 돈통을 찾으려 했다.
“이걸 찾으시나요?”
퉁. 그때 셰이의 수하로 보이는 녀석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웬 금고를 들고 나타났다. 정황상 누가 봐도 에런의 것으로 추정되는….
“뭐. 나한테 그거 가지고 부탁이라도 할 생각….”
“가져가세요.”
금고를 품에 챙긴 칸이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내가 큰 오해를 했네.’
이렇게 착한 녀석이 수상하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암.
*
*
*
“크흠,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괜찮지 않으면, 도망이라도 칠 생각입니까?”
“서, 설마. 약속은 지켜야지. 하하….”
에토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을 칸의 종자라 밝힌 여인을 곁눈질했다.
분명 영락없는 용병의 행색이었던 그녀는 지금, 귀족가의 여식 못지 않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서 화려한 무도회장을 밝히고 있었다.
‘정말, 감쪽같은 변장이다….’
트롤의 피로 전신을 칠한 상태의 첫인상이 강렬해서 그렇지. 마이아의 외모는 귀족의 영애라 해도 믿을 만큼 출중했다. 게다가 일평생의 단련으로 만들어진 육체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
게다가 그녀의 몸가짐이나, 걸음걸이처럼 사소한 요소만 봐도 에토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귀족의 예법에도 상당히 밝다는 걸.
‘그런데 종자라니….’
차라리 기사의 종자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녀는 본인 스스로를 야만인의 종자라며 소개했다.
“어이, 정신 차리쇼. 지금 멍 때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니까.”
“엇, 크흠. 그렇지.”
에토는 불만스런 얼굴의 파벨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본래 그의 의뢰가 상행의 호위인 걸 고려했을 때, 이곳까지 호위로 따라붙은 파벨의 행동은 상당히 이례적인 결정이라 봐야 했다. 의뢰주인 에토가 멋대로 의뢰에서 벗어나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이민 순간,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해도 정당하기 때문.
하지만 파벨은 그러지 않았다.
“약속 잊었수? 당신이 살아서 나가야, 나도 은패가 될 거 아니요.”
마이아 엘드렛, 스스로를 금패 용병이라 밝힌 그녀가 직접 은패로 승격할 수 있게 손을 써주겠다 보증한 까닭이다.
당연히 용병인 파벨은 처음엔 의심했지만, 금패에 각인된 칼엘손의 날인을 보고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멍청한 티 내고 싶지 않으면, 최대한 앞만 보고 걸으쇼. 어차피 저쪽 아가씨가 시선은 다 끌어주고 있으니까. 눈에 띄는 행동만 자제하면 돼.”
“아, 알았네.”
꿀꺽.
새삼 자신이 어느 곳에 들어왔는지 실감이 온 에토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야말로 돈, 돈, 돈이다.
‘이곳을 꾸미는 데 쓴 금액만 해도, 어지간한 국가의 연간 수익을 가볍게 넘겠군….’
양지에서 대놓고 거래하기 힘든 장물이나, 만신전 교회의 교리로 금지한 노예 거래, 심지어는 악마의 힘이 깃든 사악한 유물들까지도. 돈으로 팔 수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판다는 이곳.
‘베이츠 암시장…. 이 정도 규모였다고?!’
지금까지 소문으로만 접했던 베이츠 암시장은 어떻게 유지 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했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장소를 어째서 만신전 교회가 방치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설마,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에토는 그리 생각하며 마이아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암시장의 안쪽으로 걸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유물뿐. 다른 것에 자금을 낭비해선 안 됩니다.”
“아, 알고 있네. 사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낙찰이 가능할지는, 조금 의문이네만….”
“그때를 대비한 계획도, 그분의 머릿속에 있을 겁니다.”
“그, 그분이라면.”
“…….”
마이아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앞을 보라는 뜻이었다.
“허억.”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레 놀란 에토가 헛숨을 들이켰다. 드워프 건축가의 솜씨라 해도 믿을 법한 그레이트 홀 안에, 수백 석이 넘는 좌석을 빼곡히 채운 가면인들.
저들 모두가 암시장에서 열리는 경매에 참가할 권한을 소유한 대륙의 인사들이란 소리였고, 지금 자신은 그들 사이에 껴서 죽을 각오로 한 물건을 낙찰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게 피부로 직접 와닿았다.
“가요.”
“네, 네엣…!”
갑자기 마이아가 팔짱을 껴오는 와중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에토였으나 이내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에토는 거대 상단의 후계자 중 하나이고, 마이아는 그의 약혼자이며 파벨은 그들의 호위라는 설정에 따라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도 떠올리곤 괜스레 허리를 바짝 세웠다.
“크, 크흠. 잠시 실례하겠소.”
이미 빈자리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어렵사리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지나 빈자리에 앉은 에토가 안도의 한숨을 토하던 그때. 마이아가 그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고서 말했다.
“시작하는군요.”
그녀의 말대로, 경매를 진행하는 단상을 가린 가림막이 양옆으로 걷히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리고 옆에서 들려온 마이아의 목소리에 홀린 듯이 고개를 돌린 에토가, 멍한 얼굴로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위험하니까.”
그때 에토는 눈치챘어야 했다. 그에게 경고하는 마이아의 말투가, 무슨 일이 발생하리라 확신하고 있는 자의 말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