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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07화 (107/132)

#107화. 무법도시 (8)

부르르르륵─!

평범한 인간의 체구에 불과했던 타락자의 육체가 거대한 살덩어리로 변모했다. 단상 위에서 수레를 옮기던 장정들과 경매를 진행하던 진행자를 제 살점에 파묻은 타락자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곧이어 검은색 살점 덩어리 곳곳에 생겨난 입이 무언가를 씹어 삼키듯 오물거렸다.

“도망쳐라──!!”

객석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귀족이거나, 어마어마한 금력을 보유한 부호들, 혹은 마법사였으니. 호위로 참석한 이들 중에는 기사가 상당수였고, 값비싼 마도구로 무장한 전사들조차 수십이 넘었다. 하물며 본신의 마법을 드러낸 마법사들이 순식간에 주문을 완성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부르륵…!

오러와 형형색색의 주문이 살점을 향해 쇄도하고, 꼼짝없이 공격에 노출된 타락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뒤튼다.

그 뒤척거림만으로 단상이 무너져내렸다. 기어코 단상을 벗어나, 제 살덩어리를 퍼뜨리는 타락자에 의해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이 순식간에 잡아먹혔다.

“커, 커진다!”

씹어삼킨 인간을 즉각적으로 소화한 타락자의 몸집이, 공격을 받기 이전보다 더욱 거대해지자 공격을 쏟아내던 이들이 주춤 물러난다. 본능적으로 도망을 쳐야겠단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 거다.

부르르르륵…!

그때 타락자의 살덩어리에 붙은 입들이 동시에 포효를 터뜨렸고, 경매장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이놈이?! 커헉!”

“위대한 분을 위하여!”

“그분을 강림시키기 위한 제물이 되어라─!”

악마 추종자의 등장이다. 대체 무슨 수로 경비를 뚫고 침투한 건지, 경매장 곳곳에서 손님 행세를 하고 있던 추종자들이 기습을 가하면서 혼란이 배가 됐다.

“이 거짓된 세계를 집어삼킬……! 꺽.”

“내 뒤로!”

“흐이이익!”

부우욱. 우악스런 손길로 불편한 드레스 치마를 찢어버린 마이아가 어느새 꺼내든 창으로 악마 추종자 하나를 결딴내고서 외쳤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벙찐 에토와 파벨이 그녀의 말대로 물러났고, 마이아의 창이 뱀처럼 휘어 또 다른 악마 추종자의 목을 꿰뚫었다.

‘정말 습격이…!’

처음부터 악마 추종자의 습격을 상정하고 대비한 덕분에 기습에서 벗어난 마이아였다.

그녀에게 경매장의 일을 부탁한 칸이 습격이 있을 거라며, 그때를 대비한 계획까지 전해두었던 것.

‘역시,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야. 미래를 내다보는 듯한 통찰력. 이것 또한 보고 배워야 할 무기다.’

“얌전히 그분의 양식이 되어라!”

그때 배후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악마 추종자가 파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놀란 파벨이 다급하게 검을 세워 막았지만, 악마 추종자의 괴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친 파벨을 향해, 악마 추종자의 검이 짓쳐들었다.

쩡!

제 죽음을 예견하고 눈을 질끈 감은 파벨은, 아무리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실눈을 떴다.

“이런 병신새끼! 싸우는 도중에 누가 눈을 감아!”

지금까지 보여준 격식있는 말투를, 완전히 벗어던진 마이아가 악마 추종자의 검을 창대로 쳐냈다. 저 여리여리한 몸으로, 괴물같은 악마 추종자의 검격을 튕겨낸 것이다.

‘이게 금패 용병…?!’

그 수준에 감탄하며 파벨이 떨어진 검을 다시 주워드는 사이.

쩌정! 쩡!

마이아의 창과 악마 추종자의 검이 짧은 사이 수 차례 충돌했다. 인간을 벗어난 괴력으로 몰아붙이는 악마 추종자를 상대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공격을 맞받아친 마이아가 눈을 번뜩였다.

‘버틸만 하다!’

그녀의 힘이 강해진 게 아니다.

순수 인간의 육체, 그것도 여인의 몸을 단련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외물의 힘을 빌려 약점을 보완하는 건 가능했다.

얼마 전, 데일론 후작의 창고에서 칸이 직접 골라준 마도구.

아티팩트의 수준에 이르진 못했으나, 적어도 준 아티팩트라 할 정도는 된다 칸이 호언장담한 무기가 바로 그녀의 창이었다.

“죽어라! 건방진 년─!”

전투 중에 딴 생각에 빠진 걸 알아챈 걸까. 악마 추종자가 분노를 터뜨리며 큰 동작의 일격을 가했다. 본인의 체구와 악마의 도움으로 얻은 괴력으로 찍어누르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평소의 마이아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거리를 벌리거나, 회피 이후의 빈틈을 노렸겠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했다.

정면에서 맞받아친다는 선택지가!

‘지금.’

체구가 작은 마이아가 아래에서 위로 창대를 봉처럼 후려쳤다. 타고난 체격과 힘의 차이를 생각하면, 가히 자살 행위에 가까운 반격. 그러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기를 손에서 놓친 건, 악마 추종자 쪽이었다.

서로의 병장기가 충돌하는 순간,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악마 추종자를 덮친 탓이다.

[요룬의 창]

─충격 상쇄 : 가해지는 힘을 감소시킨다.

─반격 파동 : 감소시킨 충격을 저장하고, 일시에 터뜨린다.

그리고 그 빈틈을 놓칠 마이아가 아니었다.

콰득!

빛살과 같은 찌르기로 심장과 목젖을 거의 동시에 꿰뚫린 악마 추종자가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악마를 섬기는 미치광이의 유언을 들어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시체를 발로 밀어버린 마이아가 바쁘게 고개를 돌리며 전황을 파악했다.

‘당장 크게 밀리지는 않고 있어.’

갑작스러운 타락자의 폭주와 악마 추종자들의 기습으로 숫자가 꽤 줄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희생자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연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는 두 존재가 있었다.

“더러운 놈들이─!!”

마치 오랫동안 꾹꾹 눌러담은 분노를 터뜨리듯, 활화산과도 같은 오러를 사방으로 분출하며 악마 추종자를 학살하는 기사.

혼란한 상황에도 완성해낸 중위계 주문을 타락자를 향해 집중시켜, 살점 덩어리의 전진을 막아내는 마법사.

그 둘의 분전으로, 불리했던 전황은 이제 백중세의 균형을 이루기 직전이었다.

“이, 이거 생각보다 할만 한데…?!”

에토와 딱 붙어서 마이아의 전투를 지켜보던 파벨의 목소리가 밝았다. 손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기사들과 마도구로 무장한 호위들의 위로 마법사들의 화력이 지원되니, 전황이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가 없는 정도였다.

첫 습격에 의한 피해는 결국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인해 발생한 일시적인 피해에 불과했으며, 온갖 귀빈들이 모인 이 경매장은 감히 악마 추종자들이 습격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대로 저들이랑 합류해서, 저 살덩어리가 뒈질 때까지 버티면 될 것 같수!”

파벨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경매에 참가한 이들이 점차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악마 추종자의 숫자가 줄어듦에 따라, 바로 뒤에서 찔릴 위험도가 줄었다 판단해 힘을 합치려는 것이리라. 마이아 또한 저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길을 뚫겠습니다.”

“부, 부탁하네!”

“나한테 떨어지지 마쇼! 상단주 양반!”

*

*

*

“흠, 생각보다 싱겁군. 아니 그렇소? 에흐람 경.”

“……이곳에서 서로의 신분을 입에 담는 건 금기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하하. 이미 다 눈치채고 있잖소? 내 정체에 대해서도. 이 정도는 해줘야 공평하지.”

“빌어먹을 마법사가….”

“칭찬으로 듣겠소이다.”

저 혼자서 악마 추종자의 절반을 넘게 썰어버린 기사, 에흐람이 혀를 찼다.

바깥에서 마주쳤다면, 감히 자신에게 말도 못붙일 천박한 종자가 건방을 떠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공공연히 그의 정체를 입에 담는 것과, 추측으로 남기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으면서 굳이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머리나 굴리다니.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추악한 노괴의 목을 썰어버리고 싶었다. 만약, 주군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내쳤을 터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버러지가 내민 손이라도 잡아야 할 만큼 좋지않은 상황이니까.

쿠구구구궁!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검격이 대리석으로 깐 바닥에 깊은 상흔을 남기며 소멸했다. 용의 발톱과도 같은 오러에 휘말려 사망한 악마 추종자의 숫자가 열 명도 더 넘는 가운데, 에흐람이 불만스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주군의 신분을 숨겨야 하는 까닭에 전부 두고 온 무구들 생각이 절실했다.

갑옷도 갑옷이지만, 특히나 검의 상태가 불만족스럽다. 자신의 최대 출력을 견딜 만큼의 내구도를 가진 검이 아니라면, 전력을 내기가 힘든 까닭이다.

“노괴. 주문은 어디까지 쓸 수 있지?”

“글쎄올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저 살덩어리를 전부 뒤덮을 정도는 충분하오. 다만, 저 괴물이 그때까지 기다려주기나 하겠소?”

“시간은 벌어주지.”

“호, 이거 영광이로군. 알았소이다. 지금부터 준비에 착수하겠소. 다른 마법사들도 같이 화력을 집중하면 딱 되겠구먼.”

순식간에 전략을 조율한 에흐람이 검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오러를 뽑아내며 외쳤다.

“주문이 완성될 때까지, 살덩어리를 막아라─!”

제 수하를 대하듯 지시를 내린 에흐람의 뒤를, 각지에서 모여든 기사와 전사들이 뒤따른다.

지금껏 압도적인 무용으로 그들의 목숨을 살린 에흐람을 믿고서 상황을 타개하려는,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에흐람을 필두로, 오러를 전신에 두른 기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없이 땅을 박찼다.

쿠드득! 콰직! 쾅──!

그 어떤 기마의 돌격도 이만큼 위협적이진 않을 터였다. 악마의 힘으로 강해진 악마 추종자들이 기사들의 돌진을 조금도 막지 못하고, 사방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단 한 번의 돌격으로 타락자의 코앞까지 당도하게 된 기사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압!”

기합을 내지른 에흐람의 검에서 내뿜어진 오러가 타락자의 살덩어리를 마구 헤집는다.

그야말로 초인의 일격이다. 단 한 번의 일격에 비대한 몸집의 삼분지 일을 상실한 타락자가 부르륵-! 비명을 내지르며 에흐람을 향해 살덩어리를 주먹처럼 뻗었다.

“흥!”

에흐람은 굳이 대응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가볍게 손을 털어 살덩어리를 쳐냈다. 다만 생각보다 충격이 무거웠는지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서 더 몸집을 불렸다간,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겠어.’

그때부터 에흐람의 움직임이 좀 더 수비적으로 바뀌었다. 마무리는 후방에서 주문을 영창하는 마법사들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전사자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들 물러나시게!”

마법사들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따로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에흐람이 ‘노괴’라 부른 마법사의 주도로 광범위한 파괴에 특화된 주문만을 골라 시전한 마법사들이었다.

단상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부풀어오른 살덩어리를 향해, 전장의 재앙으로 불리우는 광범위 파괴 마법이 작렬한다. 그 여파만으로도 후방에서 보호를 받던 참가자들과 마법사들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위력.

치이익…….

개중에서도 압권은 노괴의 적색 주문이었다.

“이 지팡이, 손맛이 나쁘지 않구먼. 클클.”

바로 직전에 경매해서 낙찰받은 지팡이를 손에 쥔 그가 쏟아낸 적색 주문은, 살덩어리 전체를 까만 숯검댕이로 만들었음에도 꺼질 줄을 몰랐다.

“끄, 끝난 건가?”

“이 망할 잡놈들! 나가는 대로 도시의 존속에 관해서 다시 논의해봐야 겠구나!”

“아니, 애초에 암시장의 주최측은 무슨 생각으로 타락자를 도시에 들인 거야?!”

그에 모든 상황이 끝났다 판단한 경매의 참가자들이, 이 상황의 원인을 제공한 베이츠의 지배자들을 향한 분노를 터뜨렸다.

물론, 개중에는 살아남았단 사실에 그저 기뻐하는 이도 있었다.

“어, 어서 암시장을 빠져나가세.”

그건 바로 에토였다.

주문의 포화가 끝나고, 어느새 자신의 곁에 모인 마이아와 파벨을 향해 애원에 가까운 투로 나가자 재촉하는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동패 용병에 불과한 파벨의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입가에는 살아남았다는 기쁨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분명히 걸쳐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성공적으로 전투를 지휘한 에흐람의 얼굴은, 도저히 승리한 사람의 것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만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겨우 이 정도 전력으로, 경매장을 습격했다고?’

놈들은 어째서. 실패할 게 뻔한 습격을 자행한 거지……?

‘기회다.’

그리고 습격에 대한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던 유일한 이, 마이아가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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