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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08화 (108/132)

#108화. 무법도시 (9)

잠시 제자리에 서서 고민하던 에흐람의 곁으로 예의 ‘노괴’가 다가왔다.

“표정이 왜 그러시오? 꼭,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한 사람처럼.”

어찌 마법사란 족속들은 비유를 해도 사람 심경을 건드리는 쪽으로 하는지. 에흐람은 무어라 쏘아붙이려다가,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나?”

“무엇이?”

“요란하게 습격한 것치고, 너무 실속이 없는 습격 아니었냐는 말이다.”

“흠……. 그렇다기엔 사람이 꽤 많이 죽었소만. 게다가 악마 추종자가 경매장을 습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명적이란 말이지. 심지어 그 이유가 주최측이 타락자를 생포한 탓이라니. 소문이 안 나기도 힘들겠소. 당장 당신네도 꽤 곤란한 입장일 텐데?”

노괴의 분석은 정확했다.

지금까지 만신전 교회가 베이츠 암시장을 몰라서 방치한 게 아니니까. 이번 사건으로 불어닥칠 후폭풍은, 어쩌면 전대륙을 휩쓸 정도로 거대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에흐람과 그의 주군도 마냥 무사하지는 못할 테고.

하지만 에흐람의 의구심은, 나중에 닥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당장의 습격에 관한 것이었다.

“알고 있을 텐데? 최근 성기사들이 악마 추종자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말이야. 그리고. 안 그래도 전력이 모자란 것들이, 실패할 게 뻔한 일에 이만한 전력을 투입했다는 얘기다.”

“만신전 교회의 시선을 이쪽에 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놈들에겐 충분히 큰 이득일 거요.”

에흐람의 의혹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노괴의 생각도 충분히 이성적인 추론이었다.

“뭐, 어쨌거나 베이츠를 벗어나는 게 우선 아니겠소? 괜히 엮이기 싫다면 말이오. 이미 늦었지만.”

“…그러지.”

에흐람은 도저히 지우지 못한 의혹과 위화감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그에게 있어서 최우선사항이나 다름없는 주인부터 챙기기로 했다.

“으으. 내가 어째서 이런 꼴이…!”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장 본국으로 돌아갈 테니.”

“뭐?! 하지만……. 아, 알았어! 알았다니까!”

일상과도 같은 치기어린 투정을 받아줄 때가 아니었기에, 엄한 눈빛으로 어린 주군의 반항을 잠재운 에흐람이 사람들을 선도하며 굳게 닫힌 경매장의 입구로 향했다.

서걱!

단칼에 두꺼운 문을 반으로 갈라버린 에흐람이, 문 너머의 풍경에 눈쌀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다?’

안쪽에서 벌어진 소란을 느끼고 지원이 올 법도 하건만. 아니, 하다못해 바깥에서도 외부의 추종자가 난장을 피웠다면 전투의 흔적이라도 남아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시체는커녕 전투의 흔적조차 없었다.

암시장의 파티에 참석한 그 많던 사람들과 하인들, 악사들 모두가 땅으로 꺼지기라도 한 것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광경에 에흐람이 노괴에게로 시선을 보냈지만, 제아무리 마법사라도 상상력을 뛰어넘는 현상에 대한 답을 곧장 내기는 어렵다. 하물며 방금까지 전투를 치르느라 정보조차 없지 않은가.

“일단 나가지.”

결국,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에흐람은 당초의 목적대로 주군을 살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고서, 일행 전체의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베이츠를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면하게 된 위화감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한 이가 있었으니.

찢어진 드레스와 손에 든 장창이 기묘하게 잘 어울리는 여인, 마이아 엘드렛이었다.

“우선, 본인 장비부터 찾아서 챙기는 게 좋겠군. 바깥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때 에흐람의 제안에 일행 대부분이 동의했고, 에토가 의견을 구하든 던진 시선에 고개를 끄덕여 답한 마이아도 본인의 장비를 찾아 어디론가 향했다.

“자, 잠깐. 우리는 장비를 다 두고…….”

“쉿. 조용히.”

에토와 파벨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으나, 마이아는 구태여 설명하는 대신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방금 벗어났던 경매장의 내부였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짧은 한마디만을 남긴 채 마이아는 죽은 타락자의 시체를 넘어 단상의 뒤로 향했다.

‘아직 경매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그랬다. 그녀가 챙기지도 않은 장비를 찾는다며 경매장에 되돌아온 것은, 칸의 목표인 유물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베이츠를 벗어날 생각에 머리가 한가득이 돼버린 다른 이들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칸이 그녀에게 맡긴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 집중한 마이아였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아르탈리아의 유물을 떠올리고, 그걸 회수할 타이밍을 기다렸다.

‘역시, 있다…!’

이미 낙찰받은 물건들은 주인을 찾아갔지만, 여전히 주인을 찾지 못하고 방치된 진열대가 둘이나 남아 있었다.

하나는 황금색 빛으로 일렁이는 주먹 크기의 보옥이었고, 또 하나는 은으로 만들어진 듯한 브로치였다.

그리고 그 진열대의 앞에. 짙은 흑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가, 물건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머리가 돌아가는 인간이 있었군?”

“……!”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두 번의 찌르기를 쑤셔넣은 마이아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피했다?!

상대는 늙은 몸뚱어리로 어떻게 했는지 마이아의 출수를 완전히 회피해버렸다.

그러나 당황도 잠시,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은 마이아가 상대의 모습을 빠르게 포착했다.

‘위!’

타닥!

가벼운 몸놀림으로 벽을 박차고, 곧장 노괴를 향해 달려든 마이아가 창대로 마법사의 몸을 후려쳤다. 그러나 미리 전개해둔 방어막이 깨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의 주문이 완성됐다.

화르르륵!

코앞에서 나타난 사람 크기의 화염구가 곧장 마이아를 덮쳤고, 충돌과 함께 일어난 폭발로 인해 불어닥친 화염의 폭풍이 단상의 뒷편을 가득히 채웠다.

그 광경에 마이아의 죽음을 확신한 마법사가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으려 했다.

슈화아악!

오로지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화염의 폭풍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마이아가 창을 찔러넣었다. 마법사라는 게 믿기지 않는 기민한 발놀림으로 뒷걸음질 친 노괴가 미소를 띄우며 또 다른 주문을 영창하려 했다.

철커덕. 푸욱─.

마법사의 가면이 바닥을 구른다.

‘그분의 말이 또 들어맞았다…!’

경매장을 습격한 악마 추종자들의 목적은 경매에 올라오기로 내정된 유물이다. 칸의 정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습격을 지휘하는 악마 추종자의 정보와 전투법, 사소하게는 주력기로 사용하는 주문. 더 나아가 싸움이 벌어졌을 때 싸움을 이끌어나가는 방식에 대해서까지 언질을 남겨뒀다.

[주문 차폐의 반지]

─주문 차폐 : 주문의 영향으로부터 소유자를 보호하는 방어막을 펼친다.

이 또한 데일론 후작의 창고에서 칸이 골라준 마도구였다.

한 번 사용하면 상당히 긴 대기시간을 요하고, 마나 요구량도 상당한 편이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발동할 경우 적에게 크나큰 빈틈을 강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력으로 사용하는 주문이 무엇인지 사전에 알고 있다면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정말, 그분이 말한 대로 전투가 흘러갔어…. 어떻게? 정보는 레븐에게 얻어다 치더라도. 이건 저 마법사와 몇 번이고 싸워본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마이아는 전율했다. 대륙을 호령하는 영웅들이라도, 싸워보지 않은 상대의 습관이나 선호하는 전투법을 예측할 수는 없을 터.

그러나 칸은 해냈다. 마이아의 승리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본래 실력으로는 승산을 점치는 게 불가능한 강적을, 너무나 손쉽게 쓰러뜨리면서.

심장을 관통한 창을 회수한 마이아가 마법사의 시체에서 유물과 다른 경매품으로 추정되는 브로치를 챙겼다.

‘성공이다.’

마이아는 그분이 내린 첫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단 사실에 기뻐하며, 에토와 파벨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는 눈에 띄지 않게 에흐람과 합류할 일만 남았다.

‘나머지는….’

마이아는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칸이, 또 어디선가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을까- 라고.

*

*

*

“이런 시발….”

거친 욕설을 토해낸 칸이 마검을 거칠게 좌우로 그었다.

촤아아악!

눅진한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칸은 그걸 닦을 새도 없이 반대쪽 손에 쥔 양날 도끼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렇게 고작 일격에 어지간한 트롤보다 거대한 살덩어리를 폭사시킨 칸이 잠깐의 여유를 틈타 주변을 살폈다.

“꺄아악! 살려줘어…!”

“다 뒈져라. 이것들아!”

“살고 싶으면 닥치는 대로 찔러 죽여! 가까이 오면 다 찌르라고!”

안 그래도 지옥 같았던 베이츠의 거리가, 진정한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경매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악마 추종자들의 습격. 그리고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징그러운 살덩어리들의 등장. 그리고 경매장 방향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의 충돌까지.

‘그놈이 떠벌린 것보다 규모가 더 큰 것같은데?’

물론, 아예 계획이 뒤틀릴 정도는 아니었다. 본래 역사에서 유물을 손에 넣는 악마 추종자 정도야, 어떻게 싸워야 할지 다 알려준 상태니. 마이아의 실력이라면 무리 없이 잡을 수 있을 터.

아니, 애초부터 셰이와 헤어진 직후에 곧장 경매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다만 칸이 발걸음을 멈춘 건, 오른쪽 가슴의 ‘탐욕의 그릇’이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던 까닭이다.

‘이 방향은…….’

중앙 구역!

“나 좀 살려줘어……!”

땅이 울릴 정도의 진각을 밟으며 내달린 칸이 공중에서 회전하며 살덩어리를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쯔거어억- 듣기만 해도 거북한 절삭음이 들리고, 천천히 허물어지는 살덩어리 뒤쪽에 대머리….

켈이 칸의 모습을 보곤 환하게 웃었다.

“자, 잘 왔어! 이거 진짜 엿 됐다고. 빨리 베이츠를 벗어나야……!”

“범죄자 새끼가, 나가면 벌어먹고 살 수는 있고?”

“어쨌든 목숨이 중요하잖아!”

“아니, 이만큼 일을 벌였어. 도망쳐봤자 가장 먼저 표적이 될 뿐이야.”

악마 추종자의 생리란 결국 뻔하다. 이만큼 대대적인 습격을 벌인 만큼, 최대한의 희생자를 내서 저가 추종하는 악마에게 바칠 테지. 악마는 공물에 걸맞은 힘을 내려게 될 테고.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무심코 떠올린 칸이 상념을 지우며, 바닥에 엎어진 켈을 강제로 일으켰다.

“병신처럼 굴지 말고. 사람들 모아서 암시장으로 가라. 그쪽에 나름 쓸만한 전력이 모여있으니까.”

“아, 그렇지…! 참가자들의 호위가 있으니까!”

“알았으면, 뛰기나 해.”

“이따 보자고!”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도망치는 켈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린 칸이 양팔을 늘어뜨렸다.

‘탐욕의 그릇은, 아에카리스로부터 비롯됐다.’

지금이야 ‘심원의 성흔’에 남은 신성과 함께 칸의 것이 되었으나,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

탐욕의 그릇이 반응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아에카리스와 연관된 무언가라는 뜻이다.

‘그래. 어째 편하게 좀 넘어가나 했다.’

역시나, 그런 행운은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쿵. 쿵. 쿵.

탐욕의 그릇이 가리키는 방향, 중앙 구역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칸이 문득 떠올렸다.

‘설마….’

지금 느끼고 있는 감각과 셰이에게서 느꼈던 묘한 감각이,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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