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무법도시 (10)
“흐흐흥─.”
검은 머리카락을 섬섬옥수로 가다듬으며, 콧노래를 부르던 소년이 활짝 웃었다.
“이런, 실패했네요. 나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제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 있었나 봐요.”
“곧장 사람을 더 보내서….”
“그럴 필요 없어요. 그대로 둬요.”
묘령의 여인이 허리를 숙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음, 그래도 조금은 아쉽네. 하하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년은 다시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앞에 놓인 것이 요동치는 걸 느끼곤 쓰게 웃었다.
“너무 재촉하지 말아요. 이미 넘쳐나도록 먹어치웠잖아요……. 네? 부족하다고요? 식탐이 엄청 나시네요. 당신 같은 존재들도 뭘 먹어야만 하는 건가요? 아, 자기가 특별한 거라고요? 으음.”
소년은 난처하단 듯,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봐요. 당신이 전부 먹어치운 탓에, 더 이상 남은 사람이라곤 저와 제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뿐인걸.”
소년이 의자에 앉은 채 고개만 돌렸다.
마치, 네가 만든 참상을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세요. 시체가 산을 이뤘는 걸……?”
그건, 표현 그대로 시체의 산이었다.
수백, 어쩌면 천 단위에 달하는 시체가 한구석에 수북히 쌓인 채 방치되고 있었다. 기이한 점은, 모든 시체들의 일부가 무언가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훼손당한 상태라는 것.
차라리 먹을 거라면 깔끔하게 좀 드시지. 편식하는 아이를 훈계하듯 타이른 소년이 흥- 하고 볼멘소리를 냈다.
“나도 몰라요. 나는 약속한 만큼의 밥을 전부 제공해드렸는 걸요?”
그 말이 통한 걸까.
소년은 얌전해진 그것을 칭찬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하. 착하네요. 물론, 계속 참으라 할 생각은 없어요. 이제는 나도 준비가 끝났으니까…….”
쾅───!!
“서둘러서 준비하길 잘했네요. 그쵸?”
소년은 마지막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살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그 말과 함께 순진무구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소년이, 등을 돌리며 다시 만난 영웅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또 만났네요.”
“…….”
“어째,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시네요. 슬프게도.”
“골 때리는군.”
낮게 깔린 음성의 주인공, 칸이 왈칵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아우굴라베스.”
*
*
*
중앙 구역에서 들어서자마자, 그를 반기듯 느껴진 강렬한 존재감을 따라 칸이 도착한 곳은 중앙 구역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칸을 기다리고 있는 건, 무언가가 파먹은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시체들의 산과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나는 제단의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셰이….
“아우굴라베스.”
아니, 셰이의 육체를 잡아먹은 악마였다.
“이 새끼. 아에카리스가 시켰냐? 자기 권능 찾아오라고 일러바쳤어?”
아우굴라베스.
대악마의 적자인 아에카리스의 군단에서 두 번째 기수를 차지하는 놈이다. 먼 훗날 아에카리스가 대륙에 강림하는 날, 가장 선두에서 대륙의 인간들을 집어삼키는 첨병이기도 했다.
“하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는 셰이…….”
“이 씹새가. 구라도 상대를 봐가면서 쳐야지.”
순진무구하게 웃는 얼굴은 영락없는 셰이의 그것이나, 칸은 알 수 있었다.
“영혼이면 충분한 주제에, 구태여 인간을 처먹는 것도 모자라서 씹다가 뱉는 건. 네놈의 기벽이잖냐?”
그 말을 듣고서 셰이의 몸을 차지한 아우굴라베스가 연기를 멈추고,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 악마 특유의 악의가 자리한다.
“설마.”
[단번에 정체를 꿰뚫어볼 줄이야. 정의의 신. 그 비루먹을 탕녀가 귀띔이라도 해준 것이냐?]
*
*
*
어쩌면 악마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인즉.
쿵. 쿵. 쿵. 쿵.
지금도 세차게 박동하며 제 존재감을 알려오는 탐욕의 그릇 때문이었다.
대악마의 적자, 아에카리스. 놈의 권능은 다른 악마들에게 더없이 큰 보물일 테니까. 기회가 된다면 바로 노려올 것이라 생각은 했다.
‘그중에서도, 아우굴라베스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인선.
다른 악마의 손에 제 주인의 권능 조각이 넘어가기 전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권능을 회수하려는 것이다.
물론, 훗날에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본신을 미들랜드에 강림시킨 건 아니었다.
‘계약자의 육신에 제 의식을 집어넣어 간접적으로 강림한 건가.’
셰이가 어떻게 악마와 계약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악마들은 본인의 계약자를 아무렇게나 고르지 않는다. 그들의 취향을 충족하는 악마 추종자나, 필멸자를 타락시켜 계약을 맺으니까.
그러나 분명한 건, 자신이 원인일 거라는 것이다.
자신을 구원한 상대를 본인의 손으로 죽이게 만든다. 악마들의 악취미에 더없이 부합하는 시나리오 아닌가.
‘하여간, 엿 같은 새끼들…….’
[분노하느냐? 네놈이 구한 가엾은 아해가, 나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에? 그래, 그 추악한 위선자가 선택한 녀석이니, 도저히 참을 수 없겠지!]
분명 셰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전에 해금에서 마주쳤던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질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한갓 필멸자가 초월자의 의식을 이겨낼 수는 없는 법이니.
[크흐흐. 하지만 아직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위신의 주구야. 네놈이 가지고 있는 주군의 권능 조각. 그것을 넘겨라. 그리 한다면… 이 아해의 영혼을 해방시켜 줄 수도 있음이라.]
녀석은 제 수작이 반드시 통할 거라 여기는 듯 자신만만했다.
[어떠냐. 이 제안이.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정당한 계약을 맺어줄 수도 있다….]
그렇게 속삭이는 아우굴라베스의 음성은, 그 어떤 인간이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유혹이었다. 악마의 음성에 깃든 마성이, 필멸자의 의식을 자연스레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지랄하네.”
[뭐라?]
“이미 셰이의 영혼을 집어삼켜서 소화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그리고 악마랑 협상하는 병신이 어딨어? 칸이 이죽이며 땅을 박찼다.
[도약]
엄청난 속도로 공간을 격한 칸의 검격에 반응하지 못한 셰이의 육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셰이는 죽지 않았다.
인간의 형상은 껍데기에 불과했으니까.
[이런 미친 것이!]
위쪽에서 울려퍼진 목소리에 칸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 도끼를 쳐올렸다.
쩌엉──!!
순간 손이 저릿할 정도의 충격이 양날 도끼를 통해 전해졌다. 마경을 클리어하면서 이전과 차원이 다르게 강해진 근력이건만, 느껴지는 반탄력이 심상치않았다.
[정의의 신이 선택한 전사가, 이 가엾은 영혼을 버리겠다는 거냐! 위선자의 주구다운 선택이구나!]
분노인지, 비웃음인지, 여하간 아우굴라베스의 음성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전투 예지로 놈의 위치를 특정한 칸이 후방을 향해 몸을 회전시키며 아우굴라베스의 몸을 후려쳤다.
그러나 방금까지 뒤쪽에 있던 놈의 모습이 또 감쪽같이 사라졌고, 곧장 탐색 스킬과 감각을 동원했음에도 위치를 찾아내지 못한 칸이 미간을 좁혔다.
‘더럽게 까다롭네.’
아우굴라베스의 특징은 이미 숙지하고 있는 바.
‘이 공간 자체가, 이미 놈의 영역이다.’
탐색 스킬은 크게 의미가 없다.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아우굴라베스의 경우엔 그 이상이었다.
측면에서 날아든 손날을 도끼로 맞받아치기 무섭게, 상단에서 내려찍는 발끝을 마검으로 받아친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연계 공격이지만, 아우굴라베스의 권능은 그걸 가능케 한다.
‘공간 포식’
일정 영역에 한해서, 무제한으로 공간 전이를 사용하는 특수 패턴. 게다가 영역이 유지되는 동안 다른 스탯에도 상당한 보정이 들어가는 까닭에, 게임에서도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기술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현실이라고 사정이 낫지는 않다는 것.
‘오히려 더 최악이지…!’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최선. 잠깐의 빈틈을 노려 반격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빈틈이 생기려는 순간, 공간 전이로 위치를 바꿔버리는 까닭이다.
이렇게만 보면, 아우굴라베스는 제 영역 안에서 무적이나 다름없어 보이리라.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놈의 속도에 따라붙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칸은 빙의자였다.
‘이미 게임에서 수십 번도 넘게 잡아본 놈이야.’
하물며 그 진신체도 아닌, 의식만을 제 계약자에게 강림시켰다. 놈이 자랑하는 공간 포식도 본신의 절반조차 성능을 내지 못하고 있고, 셰이의 육체가 가진 한계도 녀석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몸으로 행하는 격투에, 놈은 그다지 소질이 없었다.
“그만 촐싹거리고 내려와─라─!”
순간 양손에 쥔 무기를 손에서 놓아버린 칸이 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다리를 붙잡았다. 그에 엄청난 괴력이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근력 : 66] +1
이제는 정말 오우거라도 데려오지 않는 이상, 작정하고 힘을 쓰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리라.
쑤우우욱.
결국, 버티지 못하고 공간의 틈새에 몸을 숨겼던 셰이가 통째로 뽑혀져 나왔다.
녀석은 그 상태에서 또다시 공간 전이를 사용해 도망치려 했지만, 가만히 기다려줄 칸이 아니었다.
쾅───!!!
두 팔로 셰이의 다리를 붙잡아 땅에 내려꽂은 칸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셰이의 모습을 지워내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저 혼자 쪼개고 있을 녀석을 향해-.
“껍데기에 숨어서, 구경만 하지 말고 튀어나와라.”
아우굴라베스.
[감히, 필멸자가 주제도 모르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필멸자들의 비명이, 아우굴라베스가 집어삼킨 영역 전체에서 울려 퍼진다.
그리고 어느새 녀석이 스스로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동양의 용을 닮은 길쭉한 파충류의 머리. 그리고 어떤 갑옷으로도 막지 못할 날카롭고 거대한 뿔. 그에 반해 비늘로 덮인 비대한 상반신과 그에 대비되게 짧은 팔다리는, 갓 태어난 신생아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복부에 자리한 또 하나의 아가리가, 놈이 악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네놈은 나의 자비로운 제안에 응하지 않았던 걸, 평생토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죽어서도 죽지 못할 것이며, 지옥의 겁화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다 나의 자비를 구걸하게 되겠지─!]
놈이 짧은 발로 발을 굴렀다. 그것만으로도 공간 포식으로 유지되는 영역이 크게 요동쳤다. 주인의 분노에 권능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 이름을 걸고서 선언하마…! 너뿐만이 아니라, 너와 연관된 모든 것을 씹어 삼켜주리라고! 지옥의 다섯 주인들 중 하나이자, 세계를 포식하는 악마. 나의 주인이신 아에카리스의 두 번째 기수. 아우굴라베스의 이름으로─!]
초월자의 의지가 곧 저주가 되어 칸을 덮친다. 제아무리 뛰어난 필멸자라도, 영혼이 깎이고 정신이 오염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너희 악마들은 그게 문제야.”
‘자기소개 타임이 너무 길다고.’
잿빛의 신형이 공간을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