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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11화 (111/132)

#111화. 무법도시 (11)

[…….]

칸의 물음에 아우굴라베스는 그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대악마의 적자인 아에카리스조차 지옥의 군주로 불리우며, 어지간한 만신전의 신격은 대항조차 불가능한 초월자일진대. 그 적자들을 탄생시킨 대악마는 오죽할까? 어쩌면 만신전의 신격들을 넘어서, 진정한 신위에 도달했으리라 추측하는 존재가 대악마였다.

‘이놈. 뭔가 알고 있는 건가?’

겨우 필멸자 따위가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그 필멸자가 정의의 신이 선택한 전사라면 또 모르겠으나….

‘대악마에 대한 걸 필멸자들에게 떠들었을까? 그 탕녀가? 어림도 없지. 이건 이놈의 독단이다.’

도대체 서릿골의 야만전사가 대악마의 행적을 궁금해 하는 이유가 뭔지, 아우굴라베스로서는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놈이 악마에게 거래를 걸어올 만큼 절실하다는 것.

‘그렇다면. 처음부터 놀아나줄 필요는 없…….’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하여간, 악마 새끼들은.”

그때 아우굴라베스의 상념을 끊으며 칸이 손을 뻗었다.

졸지에 필멸자의 손아귀에 붙잡힌 아우굴라베스의 두 눈동자가 치욕으로 물들었으나, 칸은 비웃음을 흘리며 더욱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냈다.

“내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네 의식체는 영원히 미들랜드에 갇히게 될 거다. 필멸자 따위에게 사육당하는 악마라, 지옥에 있을 그것들이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군.”

[크흐흐! 어쭙잖은 협박이라니. 우습구나!]

“어쭙잖다?”

[그래!]

아우굴라베스가 두 눈에서 흑마력을 내뿜으며 일갈했다.

[내 본신은 그분의 영역에 있으니! 네놈이 내 의식체를 가둬둔다고 해서, 누가 나를 해칠 수 있을까! 하물며, 이건 내 의식의 일부다. 본신의 운신이 제한되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그건 허세가 아니었다.

의식의 일부를 분리한 뒤, 제단을 통해 미들랜드에 강림시킨 것이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을 지는 행동은 맞다. 하지만 본신이 아예 무방비한 상태에 놓일 정도는 아니다. 조금의 격이 깎여나갈 뿐.

하물며 지옥 군주의 영역에 잠든 본신을 그 누가 건든단 말인가?

[네놈이 으스대는 꼴도 잠깐이다. 필멸자의 일생이란, 초월자에겐 일순에 불과한 바! 언제까지고 네놈이 날 억제할 수 있겠느냐!]

무엇보다 초월자의 의식을 강제로 묶어두는 것 자체가 필멸자에겐 불가능에 가까웠다. 적어도 같은 초월자가 나서야 하겠지만, 미들랜드의 초월자들은 공허의 요람에 갇힌 상태 아닌가?

‘굴욕은 잠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제단의 공물이 모두 소진되고, 자연스레 연결이 끊길 터.’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그리 다짐하며 아우굴라베스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보통의 필멸자들은, 아우굴라베스가 예상한 것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지.

그러나 빙의자인 칸은 아니었다.

그는 지옥의 악마들이 서로 끊임없이 적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물며 같은 군주 아래에 있는 놈들도 호시탐탐 서로의 자리를 노렸다.

아우굴라베스의 의식체가 미들랜드에 묶여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놈은 다른 악마들에게 두 번째 기수의 자리를 위협받게 될 터.

그리고 칸에게는, 놈의 의식을 언제까지고 붙들어놓을 수 있는 수단이 존재했다.

우우우웅. 흠칫-.

[너, 설마……!]

“이 안에 집어넣으면, 네놈이라고 별수 있을까.”

허공에 열린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를 본 아우굴라베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공간을 다루는 악마인 그에게, 아에카리스의 권능이란 상위의 포식자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그가 다루는 ‘공간 포식’조차도 아에카리스에게서 비롯된 것이니까.

무엇보다 저 권능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미들랜드에 봉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우굴라베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고, 이내 분개했다. 한갓 필멸자 따위를 상대로, 악마인 자신이 이토록 치욕스러운 꼴에 내몰리다니…!

“그래서. 어쩔 셈이냐. 입을 다물 거라면, 영원히 이 안에 집어 처넣어주지. 얌전히 대답하면… 곱게 보내주고.”

아우굴라베스는 고뇌했다.

필멸자 따위가 내미는 굴욕적인 거래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에 대한 고민은 몇 번을 반복해도 같았다.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본신의 격에 손실이 간 상태에서 의식체마저 봉인당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질 터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순응할 수는 없다.

[맹세하라. 네놈의 종족이 섬기는 전사신과 네놈을 선택한 정의의 신, 그리고 너의 이름을 걸고. 내 의식체를 제단을 통해 얌전히 돌려보낼 거라고.]

“흠…….”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칸을 보며 아우굴라베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저 종족이 전사신을 끔찍이도 숭배하고, 거짓말을 혐오한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의의 신이 신성을 내릴 만큼 총애하는 녀석이니.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면, 감히 헛수작을 부리지는 못하리라.

무엇보다 악마의 앞에서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란, 실질적인 효력을 갖는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된단 말이다.

[맹세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도 내 입을 열 수는 없으리라.]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듯, 아예 두 눈을 감아버린 아우굴라베스를 손아귀에서 풀어준 칸이 피식 웃었다.

‘까짓, 맹세. 못 해줄 것도 없지.’

뭐, 대단한 거라고.

“서릿골의 전사신과 정의의 신의 이름을 걸고. 나…. 코르디 칸은 원하는 대답을 얻은 뒤에 널 풀어줄 거라 약속하지.”

[좋다! 만약, 맹세를 어길 시에는 지옥의 겁화가 네놈을 불태워 사로잡을 것이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대답이나 하지. 대악마는 어디에 있지?”

[크흐흐.]

아우굴라베스의 파충류를 닮은 눈동자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모른다. 모든 악마들의 어버이께선, 지옥이 아닌 다른 곳에 계신다는 것 외에는.]

“지옥에 없다는 소리냐?”

[지옥의 지배자는 어버이께서 낳은 적자들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 대악마께서 지옥에 강림하신 적은 없군.]

그렇단 말이지.

역시, 대악마는 지옥이 아니라 다른 곳에 머무르고 있다가 대마경을 통해 강림하는 것이다.

알파가 말했듯, 미들랜드의 외차원도 아니고.

‘진룡이나 거신도 마찬가지인가?’

그만한 존재들이 아무 데서나 머무를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무엇보다 진룡이나 거신은, 그 크기가 어지간한 산맥을 능가한다고 하지 않나.

“그럼. 대악마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 가는 건?”

[글쎄. 신적 존재가 기거할 만한 장소라면, 미들랜드와 수많은 준차원을 통틀어도 후보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걸 너에게 설명해줄 의무가 없군. 우리의 약속은, 이미 첫 질문에 답변함으로써 끝났으니까.]

“쯧….”

그래, 그냥은 안 넘어간다 이거지.

칸은 꼴에 머리를 굴리는 아우굴라베스를 보며 비웃음을 삼켰다. 놈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뻗대는지 훤했다.

영양가 없는 정보를 적당히 던져주고, 자신은 의식체를 고스란히 살려서 돌아가게 되었으니. 칸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맹세를 통해 약조한 걸, 감히 어기지는 못할 거라 여기고-.

“잘 알았다. 씹새야.”

칸이 재차 손을 뻗어 아우굴라베스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그 위협적인 말투와 행동에 놈이 발버둥 치려 했지만, 칸은 녀석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말이다.

“수고했고, 한동안은 보지 말자고.”

[네놈……! 설마 맹세를 어기려는 것이냐! 그럼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다! 설령 대가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들, 신의 이름을 걸었!]

“나는 신 같은 거 안 믿는다.”

빈손으로 놈의 아가리를 후려친 칸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계약서를 잘 읽어보셨어야지.”

‘코르디 칸은 이 몸뚱어리의 이름이지, 내 이름은 아니거든.’

녀석이 알았다면 피를 토하며 절규할 사실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를 열어젖힌 칸이 말했다.

“다음에는 사기꾼 조심하라고. 다음이 있다면 말이야.”

[너────!!]

의식체를 빨아들인 아에카리스의 주머니가 닫히고, 주머니 안쪽에 별개의 감옥을 만들어낸 칸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경험치는 못 얻겠군.’

*

*

*

아우굴라베스와 벌인 전투의 여파로, 중앙 구역의 가장 중심이자 오래된 건물은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그나마 완전히 무너져내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 말할 정도의 전투이기는 했다마는.

그런 개고생을 하고도 경험치를 먹지 못했단 사실에 적잖이 속이 쓰릴 법도 하건만, 칸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확실히, 나아가고 있다.’

지금까지는 ‘옛 신’들의 흔적을 정처 없이 찾아 표류하는 것 같았다면, 아르곤에서의 일들은 그에게 어렴풋하게나마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마경에서 마주친 알파가 남긴 단서들. 모르탈리아, 공허, 그리고 대악마.

마이아가 일을 제대로 처리해주었다면, 모르탈리아의 유물을 통해 무언가를 더 알아낼 수도 있게 되겠지. 물론, 그 역할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그에게 서부 대산맥의 신화에 대한 정보를 해석해주고, 아르곤 왕가의 혈통에 대한 추측을 귀띔해준 장본인. 불가해한 수준의 지혜를 지닌 그녀라면, 모르탈리아의 유물에 담긴 신비도 해석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강해지고 있다.’

한동안 정체기를 겪던 스스로의 성장세 또한, 모종의 사건들을 겪으며 가파르게 우상향하고 있었다.

세 개의 A등급 스킬과 70에 육박한 근력 스탯. 구색을 갖춰가는 장비들.

게임의 스토리상, 시간대로 따지면 제2막에 접어드는 지금. 마음만 먹는다면, 제2막의 메인 퀘스트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셈. 어쩌면 제3막까지도….

‘우선은, 유물부터 확인해야겠군.’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습격자의 정체와 싸움법, 그에 쓸만한 장비들까지 전부 챙겨줬다.

‘이것도 못 떠먹으면 앞으로도 데리고 다니기는 힘들지.’

일단은 경매장 쪽으로 합류할 생각으로 칸이 걸음을 뗐다.

쩌저적…. 쩌적.

그때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심상찮은 소리에 칸이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내렸다.

겨우 버티는가 싶던 건물의 지반이 가뭄이 온 대지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깨질 것처럼…….

“아니 뭔…!”

다급히 도약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오히려 그 마지막 걸음이 종지부를 찍은 셈이 됐다.

쿠콰과과광─!

바닥이 무너지면서 함께 흔들리는 균형감각을, 타고난 감각으로 다잡은 칸이 서둘러 아래를 살폈다. 대체 어디까지 여파가 퍼진 건지, 무너지는 잔해의 무게 탓에 연쇄적인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지기를 십수 초.

부유감에 몸이 적응할 즈음에 칸이 공중에서 몸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잔해 하나를 발판 삼아 도약을 발동했다.

당연히 제대로 발동될 리도 없고, 헛발질이나 한 셈이지만 스킬의 효과는 제대로 발휘되었다.

─D등급 효과, 안전한 착지 :: 낙사 데미지가 대폭 감소한다.

타악.

살짝의 저림이 있었지만, 안정적으로 착지에 성공한 칸이 안도의 한숨을 토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떤 동굴에 들어선 것 같은데, 벽면의 상태가 매끈한 것으로 보아 인위적으로 깎은 공동인 듯했다. 그리고….

“석판?”

공동의 중앙에, 기록용으로 쓰인 듯 무언가가 복잡하게 그려진 석판이 놓여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지하 공동에, 뭔가를 기록한 석판이라.’

딱 봐도 ‘뭔가 있어요.’라고 주장하는 듯한 구색에 칸이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잰걸음으로 달려가 석판의 앞에 섰다.

“어디 보자….”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석판의 서문을 읽어내리던 칸의 얼굴이 어느 한 대목에서 굳었다.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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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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