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112화 (112/132)

#112화. 무법도시 (12)

석판에 적힌 문자는 고대의 언어였다.

정확히는 고대 문명을 지배하던 대제국의 언어로, 석판에 적힌 문자 자체는 읽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다만 내용이 너무 난해해서, 읽는 와중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겠지.

업무 때문에 평생 인연도 없던 분야의 논문을 꾸역꾸역 읽었을 때의 기분으로 문자를 눈에 담던 칸이 무언가를 발견한 건, 석판의 내용이 고대 주문쟁이들의 회의록 비스무리한 것이란 걸 알아차린 시점이었다.

「……초월 인자 실험 경과. 실험체 아르고스의 생체 신호가 폭발적으로 증가. 반면, 인자의 내부 에너지는 급하락. 부분적으로는 인자가 가진 성질에 맞춰 성향이 변화하기도 하는 등…….」

「……실험체 아르고스 폐기. 대신, 교배 실험을 통해 인자를 후세에 물려줄 수 있는지 관찰하기로 결정. 그를 위한 터로 용의 인자를 발견한 지역에 촌락을 구성…….」

「……세계의 법칙에 대하여 논하다. 백아흔아홉 명의 깨달은 자들과 한 명의 외부 인사들이 의회에 모여…….」

「……모든 생명의 시간 또한 죽음으로 귀결되어 끝을 맺게 되니. 죽음이 곧 순행이오. 이 세계의 유일한 법칙이다. 뭇 현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였다. 하지만 마도사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하였다. 현자들은 제아무리 마도사라 한들, 항상 정답을 말하는 건 아니라며 비웃었으나 마도사는…….」

쿠구구궁. 쩌억!

제법 단단히 고정된 석판을 강제로 뜯어버린 뒤, 아에카리스의 주머니에 집어넣은 칸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모르탈리아의 유물과 모르탈리아의 별칭이 적힌 회의록이 한 곳에 있다라.’

과연 이게 우연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으리라.

베이츠란 도시의 연원에 대해 호기심이 마구 샘솟았다. 기존에 있던 폐허로 사람이 모여들어 형성된 곳이라 했으니, 어쩌면 도시 어딘가에 비슷한 물건이 더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록을 찾기 위해선 도시 전체를 집요하게 수색해야 하겠으나, 혼자서는 무리다.

대신, 베이츠를 뒤집어엎고 싶어서 안달 난 놈들을 끌어들이면 되겠지. 본래 같으면 야만전사인 그가 접촉할 만한 놈들은 아니지만….

‘뭐, 꼬우면 정의의 신한테 가서 따지라지.’

내가 그 양반이랑 차 한 잔도 하고, 진득하게 대화도 나누고, 이런저런 거래도 한 사이인데. 제깟 놈들이 뭐 어쩌겠는가?

*

*

*

혼란은 아주 조용히, 또 대륙의 정세를 긴밀히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유물’을 얻기 위해 모여든 대륙의 인사들이 타락자들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아 복귀했고, 그 과정에서 베이츠의 거주민들이 타락자를 붙잡아 경매에 올렸다는 사실이 암암리에 알려지자-.

“이런 제기랄!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버린 사안 아닌가! 어서 관련된 인물들을 잡아들여 문초하고, 꼬리를 끊어야 해!”

“기회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생긴 공백을 빠르게 차지한다면, 계승식 이전에 아측의 세력을 크게…….”

“빨리 가산을 정리해라! 시간이 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싼값에 넘긴다고 해!”

관련된 인물에 대한 즉각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그 자리를 노린 세력들의 준동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이어졌으며, 켕기는 게 있는 자들 중에 별다른 직위가 없는 인물들의 망명이 이루어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륙의 중심인 제국의 바깥. 변방 왕국들 사이에서 벌어진 혼란이지만, 그 여파가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신들께 귀의한 몸이나, 오늘만큼은 그분의 종이 아닌. 만신전 교회의 추기경으로서 이 추악한 만행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야겠습니다. 천상에 계신 당신들께서 우리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천상의 어버이들 아래에서 평등할 권리가 있으메.”

“그에 따라 우리는 결정했습니다. 이 대륙에서 사람을 같은 사람이 물건처럼 다루는 일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 라고. 그리고 엄숙히 선포하였습니다. 만약, 그러한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만신전의 이름으로 마땅한 정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추기경의 권한과 신께 바친 속명에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정화를…….”

*

*

*

“라고 하는데요. 이거, 저희도 큰일 난 거 아닙니까?”

“어쩌라고. 그럼 안 튀고 뭐 하냐?”

“아이고, 대장. 저희가 대장 없으면 뭐 먹고 산답니까.”

“하여간…. 됐고, 사업 정리나 제대로 해. 조금 아슬아슬한 것들은 싹 다!”

머쓱한 얼굴로 부하를 쫓아낸 켈이 기름기 가득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벅벅 긁으며 시선을 들었다.

“염병. 저 양반은 뒈진 거야, 뭐야. 위에 처박혀서 나오지를 않아…….”

이 와중에, 가장 정신이 없어야 할 작자가 켈의 집 이 층에 틀어박힌 채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게 벌써 사흘째였다.

대체 뭘 하는 건지, 가끔씩 굉음이 울려서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라는 건 기본. 딱딱한 말투의 창잡이가 퀭한 안색으로 내려와 요구하는 엄청난 양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시벌, 설마 둘이 위에서 짝짜꿍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뭐야? 아니지. 야만인이 아무리 대단해도 굉음이 날 정도는 아니……. 아니겠지. 음.’

괜히 떠오르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운 켈의 고개가 입구를 향해 돌아갔다. 뭔가 바깥도 부산스러운데…?

안 그래도 최근 베이츠는 안팎으로 홍역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얌전히 지내라고들 주의를 단단히 줬건만, 이게 대체 무슨 소란….’

“혀, 형님!”

“또 뭐야?! 이 새끼, 너 내가 사업 정리하라고 했는데 또 무슨 난리를……!”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큰일 났습니다!”

방금 쫓아낸 부하가 호들갑을 떨며 들이닥치자, 한바탕 욕을 쏟아부으려던 켈이 멈칫했다.

“아, 아니지? 응?”

절박한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켈의 앞에서,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부하가 작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켈에게는 청천벽력처럼 꽝-! 크게 울렸다.

그리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위쪽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칸이었다.

“우, 우선 침착하고. 어디쯤이냐?”

“예?”

“그것들 어디까지 왔냐고!”

“저한테 얘기해준 녀석 말로는 행렬이 꽤 길어서, 조금 걸릴 것 같다고…….”

“그러면 너네는 다 나가서, 적당히 난장이나 피우다 흩어져서 숨어. 최대한 시간만 끌면 돼. 알았지? 괜히 붙잡힐 정도로 하지는 말고.”

“옙…!”

그 뒤에 켈은 자택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물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악마 추종자의 습격으로 도시 전체가 난리가 난 직후, 머지않아 벌어질 일을 직감한 켈은 자신이 벌이던 사업의 삼분지 일을 정리했다. 그러고도 안심할 수가 없어서 재산의 일부를 풀어서 외곽구역의 주민들을 솎아냈다.

“휴…. 깔끔하네. 사실 진짜 문제는 이미 뒈진 것들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중앙 구역의 거주민들이 떼몰살을 당했다.

심지어 시체들은 짐승한테 잡아먹힌 것처럼 시체가 훼손당한 상태였고, 그 숫자가 기백이 넘었다.

그것들이 싸지른 똥을 치우기엔 인력도 부족하고, 대체 얼마나 많은 똥을 싸서 파묻었는지 정보도 부족했다. 같은 중앙 구역의 거주민인 켈이 수습흘 포기해야 할 정도로.

“…나야 서열로 치면 말단 언저리였으니까. 괜찮겠지.”

지금 베이츠로 들이닥치는 ‘그것’들의 지독함이야 온 대륙에 정평이 났다지만, 자신이 물심양면 협력한다면 마냥 쳐낼 수는 없으리라. 무엇보다 대놓고 불법적인 일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으니….

쾅──!!

“으헉.”

그때 위쪽에서 들려온 굉음에 고개를 든 켈의 얼굴이 황망해졌다.

따사로운 햇빛이 내려와 켈의 얼굴을 밝힌다. 그 빛이 어찌나 밝은지, 저택 전체가 밝아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아니, 햇빛이랑 바람이 왜…?’

그의 저택은 다른 거주민들의 염탐을 피하기 위해 폐쇄적인 형태로 지어져, 햇빛이나 산뜻한 바람 따위는 들어올 수가 없는 구조인데?

이어서 정신을 차린 켈이 끼에엑-! 소리를 지르며 천장에 난 구멍 아래로 헐레벌떡 뛰었다.

“내, 내 집이─!”

일층부터 삼층까지 똑같은 크기로 뚫린 구멍은, 켈이 양팔을 활짝 펼친 것과 비슷한 너비였다. 그를 통해 햇빛과 공기가 들어오고 있었으며, 이층에선 황금색으로 빛나는 옥을 손에 든 마이아가 놀란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이, 이 시부럴 것들아! 남의 집에서 대체 무슨 짓을!”

“얻은 게 있으면, 시험해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뭐, 뭐?”

펄쩍.

가벼운 몸놀림으로 구멍을 통해 일층에 착지한 칸이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어차피 남는 게 저택인데 무슨 상관이냐. 대충 빈 저택 하나 골라서 니꺼 해.”

“……어. 그런가?”

“뒈진 놈들이 방 빼라고 지랄할 것도 아니고. 알아서 해라. 베이츠 나가서 새 인생 살 것도 아니라며.”

마, 맞는 소리긴 하네. 저도 모르게 설득된 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뒤늦게 구멍을 낸 원인에 대한 의문이 떠올라 언성을 높였다.

‘주문도 아니고, 대체 뭔 방법으로 위아래로 똑같이 구멍을 낸 거야?’

켈이 그에 대해 조심스레 묻자, 칸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쓴 게 아니라서.”

“그럼?”

“마이아.”

“저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마나를 주입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내는 것같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너무 복잡하여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무리라 이거지.”

“예. 저처럼 가문이나 스승을 두어 마나 운용법을 따로 익힌 게 아니라면, 평범한 전사들은 마나를 주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겁니다.”

보옥을 손에 쥔 마이아가 퀭한 낯빛으로 설명했다.

“주군께선 마나가 없어서 잘 모르시겠지만, 마법사라고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은 주문의 술식에 따라 마나를 인도하는 게 겨우니까요. 적어도 마탑…. 얀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그 설명에 칸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건 적당한 인선이 있으니까 괜찮아.”

얼굴을 마주치기 조금 껄끄럽게 되긴 했지만, 그녀의 성격상 거부하지는 않겠지. 무엇보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보옥의 숨겨진 옵션을 해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모르탈리아의 공절 보옥] (전설)

─마도사, 모르탈리아가 만들어낸 보옥. 공간에 간섭하는 힘이 담겼으나, 현재 많은 기능이 봉인된 상태다.

─??? (봉인됨)

아직 옵션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무려 전설 등급이다. 어떤 비밀이 담겨져 있을지 모르고, 어쩌면 숨겨진 퀘스트의 트리거가 될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

‘다음 행선지는 대충 정해졌군. 그전에….’

귀찮은 일들은 다 처리하고 가야겠지.

*

*

*

성벽 없는 도시, 베이츠의 전경을 바라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저곳이 베이츠로군요. 감히, 그딴 추악한 짓거리를 잘도……!”

“참으시지요. 리노 사제. 그걸 명명백백히 밝히기 위해,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 아닙니까.”

“크흠. 그렇지요.”

만신전 교회의 사제복을 입고, 각각 다른 국가 소속의 병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어색한 연기를 반복하는 그들은 베이츠 주변의 국가에서 대표로 선출된 사제들이 모여 만들어진 일종의 감찰단이었다.

그동안 음지에서 행해진 베이츠의 온갖 악행을 분명히 하고, 책임을 물어 교회의 이름으로 징벌을 가하겠다는-.

‘추기경께서 그 정도로 말씀하셨으니, 이대로는 내 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최대한 빠르게 책임자를 찾아서 신변을 확보한다. 그게 아니라면, 적당한 놈을 내세워서라도…….’

사실상, 베이츠의 악행을 보고도 모른 체했던 당사자들이 모여서 본인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타락자를 끌어들여 이 사단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대부분 죽었다고 하던데. 그 외에, 수상한 인물이 또…….”

“아, 들었습니다. 이단. 서릿골의 야만인이 당일에 이곳저곳에서 날뛰었다는 얘기는…….”

“그 포악스런 종족이 우연하게 등장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지요. 어쩌면, 악마 추종자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일 가능성도…….”

그리고 최대한 빨리 범인을 잡아들일 생각으로 눈이 먼 그들의 일차적인 표적은.

“그럼, 결정한 겁니다.”

“예. 이단의 종족부터 붙잡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요.”

다름 아닌, 칸이었다.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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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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