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신의 이름으로 (1)
다국가 연합으로 이루어진 이백의 호위대와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로 이루어진 감찰단의 등장으로 베이츠 전체가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혹시나 눈에 띄어 붙잡힐까 염려한 주민들이, 아예 모습을 감춘 것이다.
“쯧. 오물로 가득한 도시로군요.”
사제, 리노가 대놓고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이런 곳을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단 말입니까. 이는 명백히 주변국의 실책입니다.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어요.”
“리노 사제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역시, 고위 축복을 다루는 분께서는 그 식견이 남다르시군요. 그러고 보니, 일전에 축복을 내려줌으로써 막내 왕자의 대부가 되셨다고….”
“흠흠. 대부라니요? 어찌 신께 귀의한 몸이 세속 왕가의 일원과 연을 맺겠습니까. 그저, 이따금 만신전의 가르침을 전해주기로 약조한 것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신 일입니다. 천상에 계신 주께서 기뻐하시겠어요.”
무법도시 베이츠가 아닌, 제국의 제도를 거니는 것처럼 태평하게 리노의 어깨를 세워주는 사제들의 모습에서 경계심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주위로 성벽처럼 둘러친 병사들의 호위를 믿기 때문일까.
“그래도 다행입니다. 처음엔 다소 소요가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만.”
“하하. 리노 사제님. 저 버러지들이 감히 교회의 감찰단은 어찌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럴 용기가 없어서 이곳에 모여든 것들일진대.”
만신전 교회의 이름을 빌린 감찰단이기 때문이다.
추기경의 성토에 감읍하여 자체적으로 구성된 감찰단을 건드린다? 그건 교회의 성전사단이 직접 움직일 명분을 주는 거나 다름없었고, 그때는 정말 베이츠란 도시 자체가 쑥대밭이 될 거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일의 해결에 대해서 걱정할지언정. 범죄자들의 습격 따위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교회의 본단에서 성기사, 그것도 사도직을 내정받았다는 엄청난 인사를 보내주기로 약조한 까닭이다.
“하지만 조금 걱정이군요. 성기사께서 합류하신 뒤에 본격적인 감찰에 나서는 것이…….”
“하하. 그래서 더욱, 우리가 먼저 감찰을 마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대륙의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분들께, 이런 사소한 일로 짐을 떠안겨선 안 됩니다.”
“역시! 리노 사제님이십니다…!”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 리노의 눈동자 속,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성기사들은 오로지 주의 뜻을 받드는 칼날이다. 최소한의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 만약, 성기사의 주도로 감찰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건 곤란하지.
속내를 푸근한 웃음 속에 감춘 리노는 감찰단을 베이츠의 중앙 구역으로 이끌었다. 거리를 점거한 채 행진하는 그들을 향한 시선이 점차 사라졌을 때쯤.
“이곳이군. 맞습니까?”
“예…. 이곳에 예의 야만인이 들어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요.”
“흠. 알겠습니다. 그럼….”
“자, 잠깐. 약속한 대로, 저는 그냥 보내주시는 거. 맞지요?!”
“물론이지요. 주께서도 당신의 속죄를 받아주실 겁니다. 그분들께선 자비로우시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비열한 인상의 남자가 뒤도 안 돌아보고 멀어진다.
웃는 얼굴로 그를 보내준 리노의 얼굴이 즉시 굳어지고, 그가 호위대의 부관에게 귀띔을 남겼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도시 바깥에서 처리하도록…….”
“하하. 굳이 말로 반복할 필요는 없네. 그럼, 부탁하지.”
호위대의 일부가 은밀히 남자의 뒤를 따라 사라지고, 리노를 필두로 한 감찰단은 예의 ‘감찰 대상’이 숨은 건물 앞에 좌우로 도열했다. 그 숫자가 기백에 달하니, 가히 전쟁을 방불케 했다.
호위대의 일부가 저택의 문을 강제로 열어 정원에 진입, 안전을 확보한 이후 사제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만신전 교회의 감찰단이오. 스스로의 결백을 제 손으로 입증할 기회를 줄 터이니, 어서 나오시오!”
번쩍거리는 전신 갑옷을 입은 호위대장이 우렁차게 외쳤다. 기사는 아니지만, 마도구로 온몸을 도배했기에 베이츠의 거주민이나 서릿골의 야만인이 저항하더라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호위대장은 한 번의 외침 이후 잠깐 침묵하며 감찰단의 실질적 수장인 리노에게 시선으로 의견을 물었고, 리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나오지 않겠다면, 강제로 집행하겠소! 우리는 분명 해명의 기회를 줬소─!”
“…….”
마지막 경고에도 돌아온 건 침묵뿐.
그에 호위대장이 리노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고, 호위대에서 망치를 든 병사들이 나서 저택의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부수기 위해 문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쾅──!
“컥!”
“끄아악!”
사람이 하늘을 날아? 리노 사제가 비명을 지르며 시야 바깥으로 사라진 병사들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니, 애초에 망치를 휘두른 건 이쪽인데 왜-.
“이렇게까지 몰려온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무겁다. 목소리의 높고 낮음을 얘기하는 게 아닌, 음성 자체에 무언가 힘이 실린 것 같았다. 리노는 무형의 힘이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박살 난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회백의 전사를 시야에 담았다.
사람 둘은 충분히 들어갈 만한 넓은 문이 꽉 차 보이는 거한이다. 게다가 포츠랄 산맥에서 마주친 오크 투사를 연상케 하는 근육은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풍겼다. 무기라고는 아무것도 쥐지 않았으나, 전혀 비무장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포위해라─! 감찰 대상이 저항한다!”
유일하게 넋을 놓지 않고 침착하게 목소리를 높인 호위대장이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그를 따라 기백에 달하는 호위병들이 전열을 갖추며, 반원 형태로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침묵과 긴장감이 저택의 정원을 짓누르는 가운데. 뒤늦게 침착함을 되찾은 리노가 식은땀을 닦으며 물러났다.
꿀꺽-.
그는 고위 축복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였다.
범부와는 차원이 다른 정신력을 지녔다는 말이다. 그런 리노가 고작 목소리 한 번 들었다고 패닉에 이르렀다?
‘이상하다. 저놈, 뭔가 있어……!’
“얌전히 무릎을 꿇어라!”
리노의 안에서 야만인에 대한 위험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반면, 호위대장은 처음과 같은 침착함으로 대응했다.
그에 리노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이쪽의 숫자가 몇 명인데…. 사람인 이상. 이 숫자를 전부 감당할 수는 없다. 초인이라도 데려오는 게 아니면….’
게다가 이쪽에는 성기사가 있다.
아직 자리에는 없지만, 머지않아 그녀가 도착할 거라 생각하니 일말의 불안감조차 깔끔히 사라졌다.
“잠깐, 호위대장. 제가 먼저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사제님. 위험합니다.”
“아니요. 이쪽에서 먼저 위협적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들, 야만인은 문명화가 되지 않아 무척이나 난폭합니다. 이쪽의 의도를 오해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시다면….”
다른 사제들이 리노를 보며 아량이 넓다느니, 야만인 이단 앞에서도 침착을 유지하는 게 대단하다느니, 떠드는 걸 흘려들으며 야만인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멈춰섰다.
“우선, 과격하게 나온 점에 대해서는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베이츠 사태가 워낙 심각하여, 이쪽에서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지라…….”
“됐고. 너희 책임자나 불러라.”
“……책임자는 따로 없지만, 일단은 제가 대표로.”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리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연합국에선 왕자의 대부로 불리는 사제가 바로 리노였다. 이단 야만인 따위에게 예의를 차려주는 것만 해도 리노의 입장에선 엄청난 양보요, 자비였다. 그런데 이따위로 나오다니? 역시, 야만인 따위에게 자비는 사치인가?
“…얌전히 협조해주십시오. 당신이 사태 당일에 베이츠 곳곳에서 모습을 보였다는 증언은 이미 입수했습니다. 존재 자체가 이단인 야만인이, 악마 추종자와 같은 날에 날뛰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강제로 형을 집행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자비란 말입니다.”
그 말에 거짓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호위 대장이 야만인을 향해 무기를 치켜들었다.
이만하면, 야만인도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그리 예상한 리노가 천천히 물러나려던 그때.
“이 새끼들이, 기껏 똥을 치워놨더니….”
오싹.
짐승이 포효하듯, 낮게 울려 퍼지는 야만인의 음성.
“공격해──!”
순간의 공포심을 이기지 못한 부관 중 하나가 발작적으로 내린 명령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아차- 싶었던 호위대장이 멈추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쾅!
주먹 한 방으로 연달아 세 명을 날려버린 야만인의 팔다리가 뻗어질 때마다 병사들이 하늘을 날았다. 그러다가 일일이 주먹을 뻗는 것도 번거로워졌는지, 사람을 하나 붙잡아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모습엔 리노가 입을 쩍 벌렸다.
“사제님!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곧장 리노를 비롯한 사제들이 무릎을 꿇는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려는 것이다. 그 대상을 누구로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단을 상대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축복을 내려주는, 미들랜드의 정의를 수호하고 악을 징벌하는 여신.
그녀의 축복이 병사들에게 더해진다면, 저 야만인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정의의 신이시여! 이들에게 이단을 징벌할 힘을……!”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이제 머지않아 그분이 어린양의 기도에 응답해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오오오…!”
“여신께서 직접!”
정의의 신이 리노의 부름에 응답했다. 한갓 필멸자의 감각으로는 인지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리노의 의식에 강림했다. 그건 다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환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들랜드의 정의를 수호하는 검과 저울의 여신이시여……!”
기도를 올린다고 반드시 신이 강림하는 건 아니었다. 간접적으로 축복을 내려주는 선에서 그칠 뿐.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저 이단 야만인의 행태에 여신께서 그만큼 분노했다는 뜻이다!’
일생에 한 번이라도 그 존재감을 마주할 수 있다면, 크나큰 총애를 받은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 바로 만신전의 상위신들이다. 리노는 이로써 자신의 신실함이 보답 받았노라 환희하며 외쳤다.
하지만.
“너! 오만방자한 야만인아! 네놈을 징벌하시고자 여신께서 친히 강림하셨노라……!”
그것이 리노의 착각에 불과했음이, 여신의 분노를 통해 드러났다.
“시, 신성력이 흩어진다?!”
“여신이시여! 어찌 축복을 거두어가시는 겁니까…!”
사제들을 중심으로 퍼진 혼란은, 이내 호위대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치 여신이 저주를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심신을 무언가가 옭아매기 시작한 것이다.
여신의 진노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여신이 선택한 대리자를 위협하는 필멸자들에게 내려지는 엄정한 징벌이었다.
‘이게 대체…!’
다만 그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제와 호위대들에겐, 여신이 진노했다는 이 상황 자체가 두려울 뿐이었다.
“거, 요란스럽기는. 애초에 화를 낼 거면 처음부터 말리지 그러셨소?”
그리고 야만인이 여신을 향해 친밀한 농담을 건네면서, 그 혼란은 배가 되었고-.
햇빛을 받아 찬란한 빛을 머금은 은발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 사고 친 거야?”
제국의 장인이 직접 짠 천갑옷 위로 순백의 갑옷을 덧대 입은 소녀가 총총 머리카락을 흔들며, 야만인의 앞에 선다.
“사고는 그쪽이 쳤겠지. 애 먼 사람을 잡았잖소. 사고뭉치가 따로 없어.”
“무슨 소리. 사고뭉치는 내가 아니라 칸이야.”
“제국으로 갔다더니, 쓸데없이 혀만 길어졌군. 쬐그만 키는 그대로인데…. 만신전 교회가 밥을 시원찮게 주는 거요?”
퍽.
“아픈데.”
“아프라고 찬 거.”
어쩐지, 그리움이 느껴지는 대화와 함께 마주 선 야만전사와 성기사가 동시에 웃었다.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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