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신의 이름으로 (2)
총총 흔들리는 은발의 머리카락과 허리춤에 건 순백의 검이 특징적인 소녀. 아니, 이제는 숙녀라고 불러도 될 분위기를 풍기는 아리에스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옅게 미소 지었다.
‘몇 달 만에 보는 건데, 많이도 변했군.’
애들은 쑥쑥 자라니까, 그럴 만도 한가.
물론, 변한 건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강해졌군.’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도, 안정적인 자세는 그때와 비교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검술 실력이야 그때와 비교해서 나아지긴 했겠지만, 실제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은 아리에스의 성장을 체감했다. 체감하고 있었다.
‘공명하고 있다.’
오른쪽 가슴에 자리한 ‘심원의 성흔’이, 아리에스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녀에게 이끌리듯 요동친다. 서로의 반쪽을 향해 다가가려는 것처럼.
아티팩트에 여신의 신성이 깃들어 성유물로 화한 기물이, 여신을 섬기는 성기사에게 이끌린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여신의 천칭인 엘레나에게는 이와 같은 반응이 없었다. 아리에스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이다.
‘본산에서 신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했지.’
알-란자스에서 정의의 신과 대면했을 때 들었던 말이다. 그때는 단순히 신성력을 더 받고 있노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사도가 된 거요?”
“아니. 그 준비.”
여느 때처럼 무심한 대답. 하지만 그 내용은 대륙의 모든 이가 경악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만신전의 상위신들 중 하나인 정의의 신이 본인의 사도를 내정하고, 신성을 내어주었다? 이는 새로운 초인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범부들이 기사나 성기사, 마법사를 뭉뚱그려 표현하는 단어로 쓰이는 초인이 아닌.
진정으로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초인’이!
‘시발, 개사기네….’
소프트한 RPG게임도 잡몹 사냥 같은 전직 퀘스트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그냥 여신이 신성을 주유해주는 것만으로도 현격한 성장을 이룩해낸다. 성기사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할까.
‘물론, 그만한 자질과 함께 신의 총애를 받을 성품까지 지녀야 하지만. 그래도…….’
누구는 알몸으로 설원을 뛰어다니며 설원 그린스킨과 레슬링을 하고, 마경을 전전하면서 몇 번이나 뒈질 뻔하고, 오우거를 상대로 술래잡기를 하고, 와이번 족치려고 도시 하나를 박살 내고, 공허의 하수인을 마주치고….
단순히 나열만 해도 가슴이 꽉 막힐 정도로 쇠빠지게 굴러놓고도 30레벨을 못 찍었는데-.
“크흠. 뭐, 축하할 일이군.”
뒤늦게 제정신을 되찾은 칸이 아리에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스탯창과 스킬의 덕택에 끝없이 성장하는 자신이야말로 불합리의 결정체 아니던가.
“딱히?”
“……다음에는 여신께 성장판이라도 늘려달라 하시. 억.”
왜 때리냐고 핀잔을 주려던 칸이 문득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
“…….”
겸손을 배운 엘프를 본 것처럼 굳어버린 수백 명의 이목이 그들을 향해 쏠려 있었다.
‘교회의 성기사가 존재 자체가 이단이나 다름없는 야만인과 친근히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라니?’ 그런 생각이 훤히 읽히는 시선에 칸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회포나 풀 때가 아니었군.
“우선 저것들부터 정리하는 게…….”
“두 분께선 편히 못 나눈 얘기를 나누시지요. 뒤처리는 제가 할 테니.”
“음?”
칸의 말을 끊고서 나선 건, 금발의 기사….
아니, 성기사였다.
“종자.”
추임새 같은 아리에스의 화법을 해석하자면, 저 삐까뻔쩍한 녀석이 자기 종자라는 얘긴데…. 어딘가 익숙한 낯짝이었다.
제국 귀족들의 그것과 비교해도 빛이 날 듯 화려한 금발. 무감한 듯 보이면서도 활활 타오르는 열기가 담긴 푸른 눈동자. 전체적으로 선이 여린 이목구비와 반대로 잘 단련된 육체.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공자의 상이다.
어쩌면,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용사 따위로 가장 어울리는 낯짝이다. 어디선가 봤다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법한 재수 없는 면상이기도 했다.
‘대체 저걸 어디서 봤더라…?’
그에 대한 고민은 짧았다. 어디기는, 현실이 아니라면 당연히 게임 속. 스킵충인 칸이 기억할 정도라면, 나름 비중이 있는 네임드라는 얘기이며 그중에서도 범위를 성기사로 한정한다면…….
“레오니르라고 합니다. 부디, 공께서는 편하게 레오라고 불러주시기를.”
기억났다.
레오니르.
놈이 생략한 성까지 합치면, 레오니르 폰 이스탄틸.
‘이런 식으로 미래가 흘러가게 되는 건가.’
먼 훗날 최연소 단장이란 명예와 함께 성기사단의 단장으로 취임하고, 뭇 만신전 신들의 총애를 받으며 대륙의 영웅들 중 하나로 찬란한 명성을 누리는 천재. 또한, 만신전 교회의 몰락을 앞당기는 원흉이자 장본인.
제국의 붕괴에 쐐기를 꽂는 제7막의 보스들 중 하나.
‘변절자 레오니르.’
칸에 의해 살아남은 아리에스의 종자로 녀석이 배정되고, 그 결과.
제5막의 보스였으나, 우연찮은 계기로 엮이게 됐던 다르킨 페레야스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 이른 시기에 자신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
*
*
“왜 그래.”
“별거 아니오.”
“있는 얼굴인데.”
“그 쬐끄만 양반이 종자를 뒀다니까 조금 놀라서 그랬던 거요.”
짓궂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아리에스는 칸의 얼굴에서 묘한 기색을 읽어냈는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칸이라고 마음 같아선 죄 떠벌리고 싶었으나, 자신의 가장 큰 비밀을 아무렇게나 떠들 수도 없는 노릇.
“뭐…. 내 얘기야 당장 중요한 건 아니고, 일부터 먼저 처리하는 게 맞지 않겠소?”
“그래.”
“일단 서신에도 적었듯이, 아우굴라베스의 의식체가 이곳. 베이츠에 강림했소. 다행히 막아낼 수 있었지만,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지. 여기까지는 만신전 교회도 인지하고 있는 거요?”
아리에스는 고개를 주억였다.
긍정의 의미다. 그녀의 간략한 표현 방식을 감안하면, 만신전 교회 측에선 이 사안을 굉장히 심각하게 여기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확실하게 사도 내정자가 된 아리에스가 먼 변방까지 직접 행차한 게 그 증거겠지.
“칸의 가슴에 남은 악마의 권능. 그걸 노린 거야.”
“맞소. 원래는 단순 습격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컸겠지. 해봐야 악마 계약자가 하나 더 늘어나거나. 놈이 의식체를 강림시키기로 마음먹은 건, 내 존재를 인지한 순간부터였을 테고.”
자신이 베이츠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셰이는 악마의 그릇이 되어 소멸하지 않고. 악마 계약자가 되어 미들랜드를 혼란에 빠뜨리게 되었을 거란 얘기다.
“그것만은 아니야.”
칸이 설명을 요구하기 전에, 아리에스가 먼저 뒷말을 붙였다.
“아에카리스. 그 악마의 권능이 약해졌어.”
세력을 일궜거나, 교회가 경계할 정도의 악마 추종자. 혹은 흑마법사들은 ‘아에카리스의 구덩이’를 이용해 도주하기 때문에 추격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탐욕의 그릇’에 권능의 조각이 봉인된 탓에 ‘아에카리스의 구덩이’의 발동 자체가 불안정해진 것.
“교회가 전격적인 토벌에 나서서, 그쪽도 조급해.”
“내게서 권능을 빼앗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이거군.”
아리에스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만신전 교회만 노났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만큼, 만신전 교회는 더 많은 흑마법사와 악마 추종자를 대륙에서 축출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니.
그제서야 사도 내정자를 흔쾌히 내어준 교회의 의중이 엿보이는 듯했다.
“내 곁에 붙어서 최대한 목숨줄을 붙여보라고 얘기를 들었겠군. 그렇지않소?”
“반만 정답.”
“반만?”
“그 부분은 제가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칸 공.”
“……레오니르.”
“레오라 불러주셔도 됩니다.”
장내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환히 밝히는 듯한 귀공자의 출현에 칸이 미간을 좁혔다.
“…들어보지.”
“예.”
변절자 레오니르.
아니, 먼 미래에 그렇게 될. 지금은 교회가 아리에스의 다음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예비 성기사. 레오가 옅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악마를 홀로 처단하신 공의 경이로운 무력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며…….”
“요점만 말해라.”
“하하….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제 방식대로 설명하지요.”
처음 보여준 무뚝뚝한 얼굴은 어디 갔는지,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인 레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공께서 모종의 방법으로 악마의 의식체를 봉인하셨다고 하셨지요. 교회의 추기경들께선 그 말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계십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의심이지요. 공의 활약을 저의 주인 되시는 아리에스 경과 엘레나 사제께서 교회에 알렸다고는 하나….”
“뭐, 내가 야만인이니. 쉽사리 믿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
“예. 맞습니다.”
정작 선선히 인정하는 레오에게선 어떠한 편견이나, 경계의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 저는 추기경들께서 실수하셨다고 봅니다. 정의의 신께서 선택한 전사를, 그분의 종들이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그건 그 자체로 불경이오. 두 분 사도들께도 큰 결례입니다. 무엇보다.”
오히려 칸을 향해 반짝 눈을 빛냈다.
“공께서 보여주신 영웅적인 행보와, 야만인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는 지혜를 본받아. 우리도 쇄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하는 대화에 칸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부디, 저희와 함께 본산으로 가주십시오!”
“…….”
“…….”
칸과 아리에스가 똑같이 침묵하는 가운데. 레오는 그러한 기색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재차 외쳤다.
“그곳에서, 악마의 의식체를 천상에 공헌해주시기를. 그것이 교회의 총의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오는 조용히 칸의 답을 기다렸다. 녀석의 안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대체 어떤 식으로 구축되어 있는 건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충견의 그것처럼 초롱초롱했다.
‘설마….’
“혹시나 해서 묻는데, 론이라는 용병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나?”
“물론 있습니다. 굉장히 신의 있는 자였지요. 그에게서 공의 얘기를 일부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그 염병할 주둥이가 또…! 머릿속을 스치는 멍청한 얼굴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칸이 얼굴을 찡그렸다.
미래의 보스몹이 자신을 존경하고 있다니. 저 순수한 열정으로 타오르는 눈빛은 도저히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게 연기라면, 놈은 성기사가 아니라 극단에 취직했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녀석을 변질케 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녀석은 순수하게 교회의 앞날과 방향성에 대해 걱정하는, 열의 넘치는 성기사에 불과하다는 얘기.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미래의 보스몹을 아군으로 완전히 포섭할 수도 있는-.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레오에 대한 사안은 일단 제쳐두고, 당장 중요한 건 만신전 교회의 수뇌부가 전해온 제안이다.
교회의 본산. 즉, 제국으로 오라는 제안….
‘만신전의 뜻은 아니군.’
천상에 머무르는 신들은 어지간해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칸이 벌써 몇 번이고 정의의 신을 마주한 건, 그녀가 칸을 전사신의 대전사라 착각하고 있는 데다가 아리에스의 목숨을 구해준 탓이 클 터였다.
그 증거로, 감찰단이랍시고 찾아온 사제들은 정의의 신이 간접적으로 강림하기 전까지 그녀의 의중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본산의 사제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교황이라면 모를까.’
지금 이 제안은 오로지 교회 수뇌부의 판단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만신전의 신들은 일단 사태가 돌아가는 꼴을 고고하게 관망할 작정일 테고.
그렇다면, 여기서 칸이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였다.
‘교회 수뇌부의 의도.’
태생부터 이단이나 다름없는 서릿골의 야만전사를, 교회의 총본산으로 초대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결정했다.”
미래에 벌어지는 일들, 교회의 수뇌부들이 움직이는 방식, 그와 별개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악마 추종자를 끌어들이는 자신에게 아리에스를 보낸 정의의 신의 의도….
그 모든 걸 종합해 하나의 결론을 내린, 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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