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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15화 (115/132)

#115화. 신의 이름으로 (3)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가.”

아리에스와 둘만 남은 방 안에서, 고개를 떨군 레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 아니, 공의 선택을요.”

레오는 본인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칸에 대한 호칭을 바꿔 불렀다가, 서둘러 정정했다. 그만큼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칸의 결정 때문이었다.

“어째서…. 공께서는 교회의 제안을 거절하신 걸까요. 악마의 의식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대륙 어디를 가도 안전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공의 실력이라면 어지간한 악마 추종자 정도는 가뿐하겠으나…. 아니, 아닙니다.”

레오는 고개를 저어 스스로의 상념을 부정했다.

‘그래, 교회의 추기경들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의심이다.’

총본산의 신자들 대부분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레오는 알고 있다. 교회의 추기경들 중,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는 인물이 많지 않다는 걸. 그들의 신앙심 자체는 거짓이 아닐지언정, 순수하게 신앙심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단 말이다.

당장 베이츠만 해도, 교회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정화할 수 있었다. 그걸 같잖은 이유로 미루고, 미루다가 악마가 소환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난, 그걸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성기사가 됐고, 사도 내정자인 아리에스의 종자를 자처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 수많은 과업을 수행하는 게, 성기사단의 요직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 여겼다.

레오의 추측은 반쯤 정답이었다.

아리에스를 따라 악마의 의식체를 총본산까지 무사히 운반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종자 생활이 크게 단축될 정도의 공적을 쌓는 게 가능할 터였다. 문제는 칸이 거절했다는 것.

“저희의 임무는 악마의 의식체와 함께 그걸 처치한 전사를 총본산까지 무사히 호위하는 것까지…. 그런데 호위를 받아야 할 공께서 총본산 행을 거절하셨으니. 이럴 땐…….”

‘성기사다운’ 일처리 방식에 따르자면, 강제로라도 임무를 집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상대는 와이번을 홀로 격살한 것도 모자라, 마경을 토벌하고, 악마의 의식체를 봉인한 전사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는 정의의 신이 직접 나서서 그를 비호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전면적으로 교회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그에 대한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었다.

결국, 레오의 입장에선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음이라.

기실 종자인 레오에겐 결정권이랄 게 없었다. 결국, 임무의 향방은 아리에스에게 달려있는 셈인데….

“경께서는, 따로 생각해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임무는 할 거야. 언젠가는.”

“언젠가…… 라고요?”

그에 대한 아리에스의 답은 간결했다.

“언제까지 데려오라고는, 들은 적 없어.”

교회의 이름으로 내린 명령은 그녀에게 중요치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호위는 계속. 칸이 총본산에 갈 때까지.”

“그건……! 추기경들이 경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정의의 신의 사도로 내정된 성기사라지만, 추기경들 또한 신들의 총애를 받는 최고위 사제였다. 하물며 그들은 교회 권력의 중추들 아닌가.

천상의 신들이 적극적으로 교회의 운영에 개입하지 않는 스탠스를 유지하는 이상, 제아무리 아리에스라도-.

“불만 있으면 나오라 해.”

“……!”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

아리에스의 과격한 발언에 레오가 벙쪘다.

그녀는 레오의 잘생긴 얼굴이 망가지건 말건, 개의치 않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신의 이름으로 말이야.”

마치, 어딘가의 야만전사처럼.

*

*

*

“킁.”

누가 내 험담을 하나…?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져 중얼거린 칸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최근 여기저기 들쑤신 곳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주군. 여기, 감찰단에서 발견한 물건입니다.”

“저기 놔둬.”

“예.”

이제는 완전 자기를 수행비서쯤으로 생각하는지, 이런저런 잡무까지 알아서 떠맡기 시작한 마이아가 책상 위에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올려놓았다.

대부분은 이렇다 할 특징적인 요소가 없는 진짜 잡동사니였다. 아니, 겉으로는 전부가 그렇게 보였다. 세월의 풍화를 겪으며 깎여나간 탓이겠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정보창이 뜨는 물건이 있었다.

[고대의 회의록]

이렇다 할 정보는 안 적혀 있지만, 정보창이 적힌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했다. 칸이 중앙 구역의 지하에서 발견한 석판과 달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마는.

조금씩 읽히는 내용이 있기는 했다. 먼젓번에 발견한 석판에 나온 ‘초월 인자’와 ‘아르고스’에 대한 내용이 말이다.

‘계속 이 내용만 나오는 걸 보면, 근방에 실험실 같은 게 더 나올 수도 있겠는데….’

감찰단의 사제들은 레오의 지시에 따라, 베이츠 거주민과 호위대의 병력을 이용해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 있었다. 명목상 베이츠가 벌인 불법적인 거래들에 대한 물증을 확보한다는 이유였으나, 실제로는 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석판에 적힌 마도사의 흔적을 더 찾기 위해.

‘하지만 모르탈리아와 관련된 건… 없는 것 같군.’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며칠에 걸쳐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다. 그런데도 나오지 않았다는 건,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얘기겠지. 혹은 쉽게 찾을 수 없도록 감춰져 있거나.

고대의 주문쟁이들이 뭔가 음흉한 방법으로 감춰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정말 그렇다면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여기까진가.”

“충분하십니까?”

“그래. 더 털어서 나올 건 없어 보여.”

회의록을 아에카리스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칸이 벗어두었던 ‘설산백랑의 털가죽’을 걸쳤다.

“슬슬, 돌아갈 때다.”

단서는 수집했으니, 그걸 해석해줄 사람을 만나러 가야겠지. 칸의 중얼거림에 마이아가 긴장한 얼굴로 그 인물의 별칭을 입에 담았다.

아르곤 북부의 알-로렌느와 붙어있는, 동부 로렌 지방에 본인의 영역을 둔 존재이자. 왕국 내에서는 온갖 미신의 심볼처럼 여겨지며 두려움을 사는 괴인. 또한, 제국의 오색 마탑이 끊임없이 마탑에 초청하려 했음에도 거절했다는 풍문이 나도는 기인.

“로렌의 마녀…….”

*

*

*

아르곤 동부로 향하는 길은 두 가지였다.

포츠랄 산맥을 통해 북부로 간 뒤에 동부로 향하거나, 포츠랄 산맥에서 동쪽으로 쭉 나아가 투사의 땅 인근을 우회해 동부로 향하는 것.

안전성은 당연히 전자가 낫다. 투사의 땅 인근에선 어디를 가더라도 그린스킨과 마주칠 수밖에 없으니까. 투사의 땅의 그린스킨들은 나름의 이성이 있는 존재여서 무턱대고 습격에 나서진 않으나, 그렇다고 안전이 보장되는 건 또 아닌 까닭.

다만 북부를 경유하면, 귀찮은 일에 엮일 공산이 컸다. 안 그래도 마경 토벌의 영웅으로서, 두 명의 야만인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마당에 칸이 나타나면 쓸데없이 이목을 몰고 다니리라.

“그런 고로, 투사의 땅을 거쳐서 간다.”

“상관없어.”

아주 당연하게 따라붙은 아리에스를 보며 칸이 어깨를 으쓱이곤, 그녀의 곁에 선 레오를 향해 물었다.

“쬐그만 양반이야 그렇다 치고…. 너는 어쩔 거지?”

“저는 당연히 공을 호위…. 아니, 제 실력으로 공을 호위할 수는 없겠지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최연소로 단장이 된 천재인 만큼 녀석이 강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테지. 다만 미래에 녀석이 도달한 수준에 닿으려면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예 써먹지 못할 실력은 아니겠지만.’

굳이 데리고 다닐 정도는 아니란 소리다. 녀석이 교회의 총본산으로 돌아가겠다면, 붙잡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만 저는 아리에스 경의 종자입니다. 게다가, 예비에 불과하다고 한들 저도 엄연한 성기사이니. 공께서 품은 권능을 노리는 악마 추종자들을 상대로 적잖이 쓰임이 있으실 겁니다.”

레오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불꽃이라도 머금은 듯 타올랐다. 저 열정이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의욕이 넘쳐 보이는 건 확실했다.

‘쯧….’

무려 미래의 성기사단장이 저 알아서 굴러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냐마는. 놈의 미래를 아는 칸의 입장에선, 마냥 환영할 수도 없는 노릇.

갑자기 회까닥 한 놈이 뒤에서 찔러오면 어쩐단 말인가.

“흠….”

칸의 우묵한 시선에 레오가 흠칫- 몸을 떤다.

도저히 문명화가 되지 않은 야만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깊은 눈빛. 그리고 절로 몸을 긴장되게 만드는 기세가 자연스레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에겐 목표가 있고, 그를 위해선 성기사가. 아니, 그 이상이 되어 교회를 바꿔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아리에스의 종자라는 위치를 최대한 지켜야만 했다. 또한, 정의의 신이 총애하는 전사의 진면목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도 조금은 있었다. 대부분의 성기사가 그렇듯, 정의의 신의 총애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천상의 의지에 반하는 일만 아니라면, 저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칸의 눈빛이 자신에게 거두어지는 걸 본 레오가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그의 절박함이 전해진 걸까. 잠시간 레오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칸이 피식- 웃었다.

“마음대로 해라.”

“공…!”

“대신, 방금 네가 한 말은 꼭 지키는 게 좋을 거야. 뭐든 돕겠다고 한 거.”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당부하는 칸에게,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답한 레오가 환하게 웃었다.

‘호구 하나 잡았네.’

칸의 생각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서-.

*

*

*

미들랜드 퀘스트의 시대적 배경이 중세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세계의 주민들은 미신에 굉장히 취약했다. 신과 악마, 온갖 마물들이 실존하는 세계라 더욱 그런 것일지는 몰라도. 거의 광적인 수준으로 말이다.

“그중에서도, 마녀의 숲은 아르곤 왕국 삼대 금역 중 하나입니다.”

“삼대 금역…. 말입니까?”

“예.”

레오의 물음에 마이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제각기 서부와 남부, 동부에 하나씩 있는데. 아르곤 왕국 사람들은 어지간해선 그 주변으로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사람들이 다 떠났거나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지역이기도 하고요.”

왕국의 사정에 어두운 레오가 마이아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는 과정에서, 삼대 금역에 대한 얘기가 나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주군의 목적지가 바로 그 삼대 금역의 하나인, 마녀의 숲입니다.”

“마녀…!”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 레오가 서둘러 되물었다.

“설마, 겨울의 마녀와 똑같은….”

“그건 아니다. 그랬으면, 진작에 토벌당했겠지.”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마녀라고 불리는 건지….”

“미개한 중세 놈들이라 그렇지.”

“예?”

칸이 혀를 차며 부연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두려워하고 온갖 소문을 가져다 부풀리면. 멀쩡한 인간도 마녀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는 얘기다.”

“아무리 그래도. 평범한 인간에게 마녀라는 이름이 붙고, 두려움의 상징이 되는 게 쉬워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에 대해선, 마녀를 직접 만나보지 않는 이상 이해할 수 없겠지. 칸은 구태여 입 아프게 설명하는 대신 간단한 말로 정리했다.

“만나보면 알 거다. 그 여자가 왜 마녀라 불리는지.”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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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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