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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16화 (116/132)

#116화. 로렌의 마녀 (1)

로렌 지방에는 사람의 발 길이 끊긴 곳이 존재했다.

마녀의 숲, 혹은 역십자 숲으로 불리는 곳은 밤낮을 경계로 모습을 바꾼다.

해가 떠 있을 땐, 왕국의 어디에서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울창한 숲처럼 평온하나. 밤이 되면 그 흉악한 진면모를 드러내 마녀의 영역으로 탈바꿈한다는-.

“크흠….”

바로 그 마녀의 숲 앞에서, 비단으로 짠 의복을 입은 중년인이 긴장이 완연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에빌 남작이라는 동부의 귀족으로, 동부의 국경을 수호하는 ‘늙은 여우’ 아르센 변경백의 봉신이었다. 주로 변경백을 대신하여 접경지 바깥에서 벌어지는 대소사를 관할하는, 감찰사에 가까운 감투를 쓴 까닭에 작위에 비해 드높은 권위를 손아귀에 쥔 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아르곤 왕국의 삼대 금역 중 하나, 마녀의 숲에 당도한 건 다름 아닌.

‘이런 제기랄…. 각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요녀를 다시…….’

그의 주군인 아르센 변경백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녀의 숲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그 자줏빛의 요녀를 데리고 나오라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명령을-.

“남작. 준비가 끝났으니, 모시겠습니다.”

“알겠소.”

에빌 남작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사이 변경백이 내어준 늙은 기사가 먼저 마녀의 숲에 발을 들였고, 에빌 남작도 그 뒤를 따랐다.

“…….”

정적이 흐른다.

변경백의 늙은 기사는 애초에 말수가 적었고, 에빌 남작은 마녀의 숲이 주는 기이한 압박감에 시달리느라 입을 열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조용한 이 숲의 분위기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게 강제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숲이라면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나 온갖 생명들이 내는 소음이 나기 마련인데, 마녀의 숲은 그렇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건지….’

에빌 남작은 “마녀의 숲은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곳입니다요…!” 하고 요란을 떨던 시종들의 호들갑이 전부 사실임을 몸소 체감했다.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은 한가?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되물어도, 그 마녀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냐는 정답만 나올 뿐이다.

“남작. 조금만 더 앞에 가면, 그분의 거처가 나올 겁니다.”

“……생각보다 깊지 않군.”

“아침이라 그렇지요. 밤에는 조금 더 깊숙이 가야 합니다.”

밤이 되면 숲이 저 스스로 영역을 넓히거든요. 늙은 기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뱉은 말에 에빌 남작이 얼굴을 찡그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알수록 빨리 벗어나고 싶은 기분 나쁜 숲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주의해주십시오. 그분의 심기를 해친다면, 숲은 당장 그 모습을 바꿀 테니까요.”

“명심하지….”

“그럼, 가십시다.”

마녀의 거처가 모습을 드러낸 건, 늙은 기사와 대화를 나눈 지 수십 초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허어.”

에빌 남작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마녀의 거처는 울창한 숲속에 덩그러니 놓인 공터에 자리했는데, 가짓수를 전부 헤아리기도 힘든 다양한 화초들이 가득했다.

사사삭.

그야말로 세상의 온갖 색채를 옮겨다 뿌린 듯한 정원이었다. 도저히 삼대 금역의 주인이 머무르는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런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건, 에빌 남작이 다가설 때마다 화초들이 저 스스로 움직여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별세계군….!’

감히 누가 이 아름다운 정원을 두고 저주받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가 마녀의 거처를 찾아왔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경탄하며,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그렇게 화초들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정원을 벗어나자, 거대한 넝쿨로 뒤덮인 작은 저택이 눈에 들어온다.

“저곳입니다. 부디, 당부한 바를 잊지 마시기를.”

“아, 알았네.”

에빌 남작은 늙은 기사의 당부를 듣고서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뭐에 홀린 기분이군…….’

정신을 바짝 차려도 모자란 장소에 발을 들여놓고 넋을 놓다니, 에빌 남작은 스스로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다잡았다.

저벅- 저벅-

쿵. 쿵.

그때 기사가 저택의 문을 두들겼다. 그 스스럼없는 모습에 에빌 남작이 움찔하며 서둘러 따라붙었고, 기다렸다는 듯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이 혼자…. 자, 잠깐!”

단번에 안으로 들어서는 늙은 기사를 따라 저택에 들어선 에빌 남작은 저택의 내부를 살피다 말고 석화의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덜컥- 굳었다. 허업- 헛숨을 삼킨 그의 시선이,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는 자줏빛 눈동자에 집어삼켜지는 듯했다.

“저런 걸 달고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변경백께서 보낸 인사입니다.”

“흐응. 아, 알겠네. 그 얼굴 보니까 생각났어.”

기이익.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일어선 자줏빛의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에빌 남작은 숨이 멎는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너. 걔구나? 그이를 어떻게 해보려다가, 호되게 당했다던….”

도저히 흘려넘길 수 없는 발언이지만, 에빌 남작에겐 무어라 따질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마녀다. 처음으로 마주한 로렌의 마녀를 보고서 에빌 남작이 떠올린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허리춤까지 곧게 흐르는 자줏빛 머리카락은 온갖 사치품을 향유하며 살아온 에빌 남작조차 본 적 없는 미색(美色)이었고, 반짝거리는 자줏빛 눈동자는 별을 머금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손끝이 자신을 향했을 때, 에빌 남작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이런…!’

에빌 남작은 눈앞의 마녀가 사이한 주술로 자신을 홀린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변경백의 늙은 기사와 마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나서는, 그 생각이 확신에 가까워졌다.

“하하…. 설마, 나보고 이 어리석은 작자를 찢어 죽이라고 보낸 건가요? 그렇게 해서라도 내 화를 풀어보려고?”

“절대 아닙니다. 영애.”

“정말 그래요? 내 생각엔 그쪽이 맞는 것 같은데─.”

자줏빛의 마녀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방금까지 앉아있던 의자를 책상에 밀어 넣었다.

“어때요?”

“뭐, 뭐가 어떠냐는….”

갑작스러운 마녀의 질문에 화들짝 놀란 에빌 남작이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마녀는 그 꼴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렸다.

“그쪽 생각은 어떠냐고요. 그 사람이 당신을 내게 보낼 이유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나, 나는 변경백 각하의 봉신이오! 또한, 그분에게 당신을 변경백께서 계신 요새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봐요, 케일론.”

“무엇을 말입니까. 루드밀라 영애.”

“그 사람을 반백 년 넘도록 모신 당신이라도 날 설득할 수는 없는데, 이런 멍청한 인간을 사자랍시고 보내다니. 우리 대단하신 동부의 여우가 그런 멍청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

늙은 기사, 케일론은 주군을 조롱하는 마녀의 말에 침묵했다. 마녀는 그 반응조차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그 사이에 끼어, 영문도 모르고 죽게 생긴 에빌 남작은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은 변경백 각하의 명을 받들어 마녀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왔건만, 정작 마녀와 케일론은 자신의 목숨을 두고 토론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듣자듣자 하니! 귀하에게 나를 죽일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무엇보다 나는 변경백 각하의 봉신……!”

“불쌍해라.”

“뭐, 뭣?!”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 당신.”

또각. 또각.

에빌 남작은 마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만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쿵- 벽에 등을 부딪치곤 발작하듯 외쳤다.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러는 거요…!”

“있지. 당신이 그이를 괴롭혔다면서?”

“그러니까! 그게 누군지나 알려주고! 컥!”

에빌 남작은 두꺼운 무언가가 제 입속에 들어오자 깜짝 놀라서 발버둥 치려 했다. 그러나 팔다리가 벽에 고정당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벼, 벽이…?!’

그가 등을 맞대고 있던 벽이, 그의 몸을 박제하듯 집어삼키고 있었다. 심지어 저택의 외벽을 따라 자라났던 덩굴이 그의 몸을 옭아매고, 입에 재갈처럼 물려져 있었다.

에빌 남작은 변경백의 봉신이기에, 마법사가 부리는 주문에 대한 식견이 상당한 편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지금의 기현상은 도저히 마법이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대수림의 주술사들이 다룬다는 주술에 더 가까운…!

“코르디 칸. 아는 이름이지?”

“으읍……!”

에빌 남작의 눈이 찢어질 듯 벌어진다.

그 이름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 괴물 같은 야만인을 어떻게든 제거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여기저기에 흩뿌린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랬다.

그가 바로 다르킨 페레야스의 제자 엘리야에게 칸이 마차를 타고 동부를 벗어났노라고 귀띔한 인물이었다.

‘이런!’

에빌 남작은 그제서야 본인이 맹수의 아가리에 스스로 들어간 신세임을 눈치챘다. 변경백이 출가한 제 자식을 데려오기 위한 제물로 자신을 보낸 것이다!

‘마녀와 그 야만인이 한통속이라는 게. 정말 사실이었나…!’

투두두둑! 쾅!

순식간에 오러를 일으켜 벽을 부수고, 덩쿨을 찢어버린 에빌 남작이 저택의 문고리를 붙잡고 돌렸다. 덜커덕- 덜커덕-! 그러나 무슨 수로 잠갔는지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에 아예 어깨로 들이받아 문을 박살 내며 탈출한 에빌 남작이 한 바퀴 구르곤 곧장 땅을 박찼다.

가진 오러를 모조리 쏟아부으며 벌이는 필사의 도주였다. 지난번 칸에게 패배한 이후, 다시 단련한 육체가 끊임없이 활력을 내뿜으며 주변 풍경을 밀어낸다.

‘도망쳐야 해!’

어디로? 이미 변경백에게 버림받았는데? 아니, 이 자리에서 내가 죽는 게 각하를 위한 길…!

에빌 남작의 발이 멈춘다. 방금까지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갑작스러웠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를 속박한 듯했다.

부르르─.

“크으윽…!”

얼마나 힘을 준 건지, 목에는 핏대가 섰고 두 눈은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에빌 남작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는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모든 기사는 ‘충성의 서약’을 맺고, 그 내용은 서약의 주체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다. 에빌 남작이 자신의 죽음이 주인에게 도움이 된다 판단한 이상, 그는 살고 싶어도 죽어야만 하는 몸이 된 것이다.

퍽.

대체 얼마나 힘을 줬던 건지, 에빌 남작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가 살길을 찾아 정처 없이 흔들렸고, 변해버린 숲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파스스.

갑자기 밤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숲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파리들이 중력을 거스르듯 거꾸로 솟구치는데, 그 모양이 꼭 역십자의 형태를 닮아 있었다.

‘역십자의 숲…!’

그 평화롭던 숲이 순식간에 악마가 머무르는 지옥처럼 변한 걸 보며, 에빌 남작은 어째서 변경백의 영애인 그녀가 마녀라 불리우는지 절절히 깨닫고 말았다.

그런 그의 귀로, 익숙하고도 증오스러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지금 자신이 마녀에게서 도망치게 된 원흉이자,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원수의 목소리가-.

“숲이 갑자기 지랄 맞게 변하길래 뭔가 했더니….”

어둠이 내려앉은 숲에서 홀로 흉폭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회백색의 야만인이 덫에 걸린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뜻하지도 않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네.”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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