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로렌의 마녀 (2)
포츠랄 산맥을 그대로 관통해, 투사의 땅 인근을 돌파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발목을 잡히기엔 일행의 수준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하기사, 사도 내정자 하나에 제7막의 보스가 되는 미래의 성기사단장이 더해졌으니. 어지간한 일로는 위협조차 느끼기 쉽지 않을 터였다.
“아, 그건 제가 해도 됩니다!”
“됐습니다. 이건 종자인 제가 할 일이니.”
“저도 아리에스 경의 종자입니다만….”
“그럼 그분을 도우십시오.”
“어…….”
오히려 마이아와 레오가 뜻밖에도 삐걱거리는 일이 있었던 게, 이따금 나타나는 마물보다 더 큰 해프닝이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게다가 그 다툼의 원인이 ‘칸을 보좌하는 건 내 역할이다.’라는 것에서 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자존감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쳤던 녀석이 대체 뭘 보고서 충실한 신하처럼 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사람.”
“알고 있으니까 더 말하지 마라.”
제 의견을 내는 법이 적은 아리에스조차, 마이아를 두고 한마디 남겼을 정도였다.
‘저러는 이유가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닌데….’
마이아는 기사 가문의 영애이자, 금패 용병이라는 신분까지 모두 저버리고 야만인 따위의 종자를 자처할 만큼 강함에 대한 열망이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불쑥 튀어나온 엄한 녀석이 ‘종자 포지션’을 빼앗으려 하니까, 위협을 느꼈겠지.
무엇보다도 포츠랄 산맥에서 마주친 오크들을 저 혼자서 정리한 레오의 실력에 위기감을 느꼈으리라.
사도 내정자인 아리에스야 강한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일개 종자이자 ‘예비’ 딱지가 붙은 놈이 그렇게 강할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레오는 제5막을 기점으로 난이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미들랜드 퀘스트’의 제7막 보스들 중 하나니까. 그 재능은 대륙의 영웅급 강자들과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는 게 당연하다.
‘적당히 하다가 말겠지….’
이런저런 아이템으로 그녀의 전투력을 상승시켜 주는 정도라면 모를까. 스탯창과 스킬의 힘으로 강해진 자신이 그녀를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마이아가 스스로 헤쳐나가야 했다.
어쨌거나 여정 자체는 몹시 평화로웠고, 최단거리로 포츠랄 산맥을 돌파한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마녀가 머무르는 역십자의 숲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게 원인이었는지, 뜻하지도 않은 선물이 포장된 상태로 칸을 맞이했다.
“너…!”
“에빌 남작, 이 씹새끼.”
자신의 행적을 퍼뜨려 다르킨에게 먼저 노려지도록 만든 장본인, 에빌 남작이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지를 벌벌 떠는 모습에 칸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잠깐…!”
뭔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걸까. 무어라 다급히 입을 열려는 에빌 남작을 향해 칸이 주먹을 뻗었다. 쾅──!
칸은 놈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단련을 게을리 한 탓에 돼지 같았던 몸뚱어리를 멀쩡한 상태까지 되돌린 걸 보면 나름의 단련을 한 모양이지만, 도약까지 써가면서 내지른 일권(一拳)을 어찌할 수는 없음이라.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힌 놈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확실하게 놈을 끝장낼 요량으로 진각을 밟으려던 칸이 움직임을 멈춘 건, 역십자 숲의 나무가 나뭇가지를 촉수처럼 뻗어 에빌 남작을 위로 끌어당긴 시점이었다.
아그작- 아그작-
역십자 형태의 나무 괴물들이 에빌 남작을 통째로 씹어대는 소리에, 칸은 뒤늦게 떠올렸다.
변경백의 봉신인 에빌 남작이 어정쩡한 자세로 굳은 채 마녀의 숲에 서 있고, 역십자 숲이 지랄 맞은 상태로 태세를 바꿨다는 건….
“이게 누구야.”
요사(妖邪)스럽단 말이 절로 나오는 미성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에 아리에스가 얼굴을 찌푸리고, 마이아와 레오가 경계하듯 제 무기 위로 손을 얹는다.
그리고 칸은….
“크흠. 오랜만이군.”
“그러게.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지 뭐야. 당신이 제 발로 내 영역에 들어올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어…?”
“못 올 곳은 아니지 않나.”
“그래. 그건 아니지. 그거 알아? 난 언제고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굳이….”
“엄한 곳에 가서 비명횡사하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했지. 적어도, 내 손으로 끝장내주고 싶어서 말이야.”
쿠구구궁-!
제 주인의 감정에 호응하듯 숲이 몸을 뒤튼다.
주변 모든 곳에 가득한 나무들이 나뭇가지를 손처럼 움직여 하늘로 뻗기 시작하고, 발아래의 꽃들이 날카로운 이빨로 가득한 아가리를 쩌억- 벌린다.
“이건 대체 무슨…!”
마법의 영역을 넘어선 기현상에 레오가 검과 방패를 쥐고선,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녀를 향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신성력을 일으켰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다루는 주문조차도 이런 현상을 단번에, 그것도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일으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건 마법이라기보다, 흑마법사들이 다루는 흑마법에 더 가까워 보이는…!
“성기사를 둘이나 데리고 다녀? 밖에서 제법 재미있게 놀았나 봐? 그따위 짓을 해놓고.”
“딱히 그렇지는-.”
“멈춰.”
화아아악!
숲 전체에 내려앉은 어둠을 순백의 광원이 밀어낸다.
아리에스가 단숨에 일으킨 거대한 신성력이 제 영역을 침범하자, 마녀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솟았다.
“재밌네.”
“하나도 재미없어.”
쿠구구궁…!
마녀가 손을 휘젓자, 속절없이 밀려나던 어둠이 신성력을 재차 밀어내며 본래의 영역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에 미간을 찌푸린 아리에스가 신성력을 더욱 일으켰고, 두 기운은 조금의 물러섬 없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하. 보통 성기사가 아니었네. 대체 어디서 이런 꼬맹이를 주워온 거야? 당신.”
마녀의 말의 어디가 아리에스의 심기를 건든 걸까. 순백의 기운이 분노를 표출하듯 더욱 거칠어졌다.
그에 마녀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지려던 순간, 어째선지 망설임 가득한 투로 어물쩍 대화를 넘기려고만 하던 칸이 한숨을 토했다.
“됐다…. 쓸데없는 신경전은 그만하지. 루드밀라.”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마녀의 두 눈이 곱게 휘었다. 그러자 격렬하게 서로를 밀어내던 빛과 어둠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지옥의 일부처럼 보이던 숲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어머, 그래?”
고작 손가락을 한 번 튕겨서 그만한 변화를 일으킨 루드밀라가 물었다. 칸은 체념이 섞인 투로 재차 한숨을 토하곤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잘못은 이쪽이 했으니….
“네가 왜 그러는지는 충분히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그러나 순진무구한 미소와 함께 들이닥친 질문에,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그러는 건지.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줄래?”
‘시발, PTSD 오네….’
*
*
*
“자, 들어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일행을 거처로 들이는 마녀의 얼굴에서 일말의 적의나 경계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등장만 해도, 전투에 대비했던 일행에겐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정도의 변화.
그 변화는 모두, 칸이 그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넨 직후 일어난 것이었다.
마녀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대화 내용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지만, 칸이 마녀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고 그에 대한 사죄를 했으리란 것쯤은 분위기상 유추하는 게 가능했다.
“그래, 이번엔 또 어떤 재밌는 얘기를 가져온 건지. 천천히 들어볼까?”
짝짝-
마녀가 가볍게 손뼉을 마주치자, 저택 내부의 물건들이 저 스스로 움직이더니 다섯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티테이블과 의자를 대령했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마이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대단하군요. 마법으로는 이런 것도 가능한 겁니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걸.”
“예? 하지만…….”
“주문쟁이들이 흔히 다루는 주문이랑은 궤가 다른 거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 이해하려고 하면 피곤해.”
“말이 심하네.”
“사실이니까.”
마녀, 본인을 루드밀라라고 소개한 그녀가 인원수에 맞춰 차를 준비한 직후. 칸은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네게 해석을 부탁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
“저번에 가져온 고대 문헌은 어쩌고? 이미 확인해 본 거야?”
칸은 말없이 다르킨이 떨군 비늘 조각을 테이블에 올렸고, 루드밀라의 눈이 진한 흥미로 물들었다.
“엄청나네.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해 보이는데도, 이만한 힘이라니…. 마석을 산처럼 쌓아도 대체할 수 없을 정도야. 과연, 진짜 용의 수준은 이 정도라 이거지……?”
“다르킨 페레야스. 시체박이는 그걸 제 몸에 박아넣고, 용인(龍人)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
톡- 톡-
“다르킨 페레야스라. 이름은 들어봤어. 금색 마탑도 보유하지 못한 기술을 가진 인체학의 대가라지? 뭐, 실제로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대마법사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작자에게 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에 대해선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아에카리스. 대악마의 적자이자, 지옥의 군주들 중 하나인 그놈의 권능이 ‘탐욕의 그릇’에 감춰져 있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악마의 지식을 빌렸던가. 아니면, 용의 기운을 다룰 수 있는 지식을 보유한 집단이나 개인의 도움을 받았겠지.”
그에 대해서는 현재 회색 마탑의 마구스인 제롬이 연구 중에 있었다. 그의 제자인 얀이 마탑으로 복귀했으니, 머지않아 소식이 닿으리라.
“네게 부탁할 건, 별개의 건이다.”
용의 비늘을 다시 품에 집어넣은 칸이 마이아에게 눈짓했다.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를 쓸데없이 보여줄 생각이 없었기에, 미리 ‘모르탈리아의 공절 보옥’을 그녀에게 맡겨두었던 것.
“너라면 잘 아는 인물이 만든 물건이다. 어쩌면, 용의 비늘보다 더 관심을 가질 법한…….”
“마도사! 모르탈리아의 제작품이구나!”
루드밀라가 드물게 높다란 목소리를 내며 마이아가 내민 보옥을 빼앗아 들었다.
“그래, 틀림없어. 범용적인 주문의 틀을 벗어난, 독자적인 마나 패턴…. 내 눈으로도 단번에 읽히지 않는, 혼돈에 가까운 복잡한 설계 구조까지. 내 말이 맞지? 응?”
“…맞다.”
“흐응-. 당신이 마도사에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네. 실재했는지도 불확실한 존재들을 뒤쫓을 때부터 괴짜라고는 생각했는데, 이제는 마도사야?”
“제법 잘 아는 모양이군. 마도사에 대해서.”
“그야 당연하지. 어쩌면 나랑 비슷한……. 음. 아니, 쓸데없는 얘기는 됐고. 마도사야 말로 정말 제대로 된 마법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거든.”
눈을 빛내며 설명하던 그녀가 손짓하자 어디선가 물건들이 날아왔다.
[모르탈리아의 장난감 태엽] (전설)
[모르탈리아의 불꽃 지팡이] (전설)
그 물건들의 정보를 확인한 칸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모르탈리아 시리즈가 무려 두 개. 그것도 게임에서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었다.
“뭐, 자세히 설명해봐야 이해도 못 할 테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신만의 독자적인 마법 체계를 정립하고, 주문이란 틀을 벗어나 ‘마법’을 부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당연히 발명품들도 전부 독창적이고, 뛰어나지. 그리고 당신이 가져온 물건은…….”
‘모르탈리아의 공절 보옥’을 손에 쥐고 가만히 살펴보기를 한참, 루드밀라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당장 알아보기는 무리네.”
“시간이 좀 걸리겠나?”
“응. 조금 집중해서 알아봐야 해. 워낙 복잡하거든.”
“해석이 끝날 때까지는 가지고 있어도 좋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써먹지 못할 물건이니까.”
“그건 아닐걸?”
보옥을 티테이블 정중앙에 올려놓은 루드밀라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자세히 살펴봐야 알겠지만. 이게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인지는 대충 알겠거든.”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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