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로렌의 마녀 (3)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만들어진 목적 자체야 알아내기 쉽지. 음…. 네 이름이?”
“마이아입니다. 마이아 엘드렛.”
“아, 칼엘손이 들였다는 엘드렛 가의 영애가 너구나. 그래, 마이아 엘드렛. 보아하니 너는 이 물건을 다뤄본 모양인데. 어땠니?”
베이츠에서 칸의 실험에 어울려 마나 탈진을 몇 번이나 겪었던 마이아가 잠깐의 고민 끝에 신중히 입을 열었다.
“…막막했습니다. 물론 제 실력이 부족한 것도 크겠지만, 마나를 밀어넣을 때마다 벽에 막힌 것처럼 밀려나오더군요. 저로서는 제대로 된 길을 찾는 데에만 수십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이 물건의 쓰임새인 거야.”
“예?”
“자물쇠. 아니, 금고인가?”
칸의 추측에 루드밀라가 빙긋 웃으며 수긍했다.
“정해진 패턴을 따라 마나를 주입해야 열리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암호로 잠긴 금고지.”
“하지만 그 보옥은….”
“대충 뭔 말을 할지는 알겠어. 마나를 주입했을 때 주변의 공간을 굴절시켰지? 그것 때문에 공격용으로 만들어진 마도구라 생각했을 테고.”
루드밀라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이 보옥이 가진. 음, 그래. 방범 마법이라 생각하면 편해. 강제로 자물쇠를 뜯어내려는 무뢰한을 격퇴하기 위한 보안 체계라는 말씀이지.”
칸과 마이아가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저택의 천장과 바닥을 박살 내다 못해, 지워버린 공간 마법이 일종의 보안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말 아닌가. 그 위력을 눈앞에서 실감한 둘이기에, 더욱 믿기 힘든 말이었다.
‘그럼, 저 보옥이 보관하고 있는 물건은 대체….’
“뭐, 솔직히 말하자면 이거는 못 푼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어.”
“루드밀라. 너도 불가능한가?”
“지금으로선.”
무작정 마나를 쑤셔넣다가 공간의 틈새에 끼어서 죽고 싶지는 않거든. 섬뜩한 소리를 웃으며 내뱉은 루드밀라가 보옥을 티테이블에 다시 내려놓았다.
“대신, 마도사의 유물을 좀 더 가져올 수 있다면 모르겠지? 어쨌거나 모든 마법에는 고유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그를 통해서 패턴을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쉽지 않은 숙제인데.”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당신에게는 필요한 거잖아? 이 안의 감춰진 무언가…. 혹은 비밀이.”
마치 칸의 속내를 들여다보듯 루드밀라의 자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러나 야만전사의 우묵한 눈두덩이에선 일말의 동요조차 읽어낼 수 없었으니.
루드밀라는 읽히지도 않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짓은 관두고, 보옥을 칸이 있는 방향으로 밀어 보냈다.
도르르륵….
“그런 고로. 이 물건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유물을 내게 더 가져오면 돼.”
*
*
*
“급하게 할 건 없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도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조금 더 확실하게 하고 싶으면, 비슷한 수준으로 둘 정도?”
“보옥은 가지고 있을 필요 없나?”
“그건 당신 선택. 내게 맡기면 소득이 더 있을 수 있겠지만, 나보다는 이곳저곳 쏘다니는 당신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적당히 써먹을 수 있게 마석도 손을 좀 봐줄게.”
다행히 경계마을의 네리아에게서 얻은 마석의 수가 꽤 됐기에,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석을 부수면 마석의 마나가 알아서 특정 패턴을 따라 보옥에 주입될 거야. 내가 준비한 종류는 둘. 하나는 전방의 공간을 굴절하는 거고, 하나는 당신 주변의 공간을 휘게 하는 것. 용도는 말 안 해줘도 알겠지?”
루드밀라는 보옥의 보안 체계를 이용한 일종의 꼼수라며, 공간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결과를 도출하는 것인 만큼 결과물은 쓸만할 거라 호언장담했다.
여타 마법사와는 달리, 독자적인 주문 체계를 구축한 존재. 그녀가 괜히 로렌의 마녀라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고맙다.”
“고마우면, 다음부턴 뒤처리나 확실하게 하고 가. 당신이 멋대로 저질러놓고 동부를 벗어난 것 때문에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알아?”
“변경백인가?”
칸은 숲의 중입에서 마주친 두 사람에 대해서 떠올렸다. 서약에 묶여 꼼짝없이 당한 에빌 남작을 제외하고도, 다급하게 숲을 벗어나는 기척이 하나 더….
“그렇다면 그 기척은 케일론이겠군. 그 충견을 직접 보낼 정도라면, 그쪽도 뭔가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야.”
루드밀라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됐다.
케일론이라면 칸과 일면식이 어느 정도는 있는 노인네였다.
변경백의 자식새끼가 오우거의 시체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려 들길래 서릿골식 예절 주입을 통해 정신 개조를 좀 해주다, 놈이 거느리던 기사들과도 맞붙은 적이 있었다.
에빌 남작, 그 돼지 새끼가 칸에게 앙심을 품게 된 것도 전부 그때 이빨을 몇 개 털린 탓이었고. 그 과정에서 극대노한 변경백의 자식새끼가 제 아비에게 ‘저 무도한 야만인을 혼내주세요!’하고 요청한 결과 나선 것이 케일론이었다. 당연히 그 노친네와 싸웠고, 결과는 이도 저도 아닌 무승부.
‘생긴 건 일세의 충신 같은데, 속은 완전 능구렁이인 양반이었지.’
붙어보다가 이거 영 아니다 싶었는지, 곧장 없던 일로 하자는 것부터 범상한 노친네는 아니라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케일론이 변경백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최측근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의 행보가 곧 변경백의 의지를 대변하는 셈.
거기서 생기는 의문은 하나다.
오래전에 루드밀라를 불길한 존재라며 내버린 늙은 여우가, 다 커서 마녀가 된 딸을 찾는 이유가 뭘까.
“뭐, 대단한 일은 아닐 거야. 저번처럼 자기 역량으로 해결하기 힘든 마물이라도 나타난 걸지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루드밀라가 건넨 보옥을 품에다 챙기며, 몸을 일으킨 칸이 웃었다.
“그거야 직접 알아보면 될 일이지.”
저번엔 늙은 여우의 수작질에 적당히 넘어가 줬다마는. 이번에도 주제를 모르고 귀족 특유의 개수작을 부렸다간-.
‘그때는 내 방식대로 가야겠지.’
주먹과 칼, 손도끼를 이용한.
서릿골의 방식대로.
*
*
*
마녀, 루드밀라와 헤어진 직후 일행은 곧장 마녀의 숲을 벗어났다.
“그 여자. 마음에 안 들어.”
“하하…. 경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확실히, 꺼림칙한 술수를 다루더군요. 만약 다른 곳에서 다른 일로 마주쳤다면 진짜 마녀라고 착각하고 토벌했을 겁니다.”
“괜히 덤볐다가 뒈졌겠지.”
칸의 딴죽에 레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 수준으로는 그랬겠지요.”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루드밀라를 죽이기는 쉽지 않을 거다. 오우거 주먹도 튕겨내는 녀석이니까.”
“오우거…. 설마, 공께서 사냥했다는 오우거가…?”
“설마 내가 혼자 잡았겠나? 루드밀라가 마법으로 목을 따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동부는 쑥대밭이 됐을 거다.”
물론, 그 마법의 완성 시간을 버느라고 개같이 구르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오우거를 끝장낸 건 루드밀라의 마법이었다.
“오우거 슬레이어라는 거창한 별명은 원래 내가 가질 게 아니라, 루드밀라가 가져야 마땅한 거란 소리지.”
“한데, 소문의 오우거 슬레이어는….”
“어른의 사정이란 거다.”
정확히는, 자기가 내다 버린 자식의 명성이 높아지길 원치 않았던 못난 아비의 개수작이라 표현해야겠지만.
“그럼, 공께서 그녀와 인연을 맺은 건. 오우거를 같이 사냥한 것이 계기라는 거군요.”
딱히 그것만은 아니지만, 칸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기엔 조금 사정이 복잡한 까닭. 애초에 설명할 생각도 없고.
“주군. 그렇다면 이제부턴 그녀가 요구한 대로 유물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겁니까?”
“아, 그건 저도 궁금했습니다. 일단 공께서 ‘모르탈리아의 유물’을 수집하는 것이 목적이란 것까지는 이해했는데,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딱히 생각해둔 방안이 있으신지.”
“있다.”
“역시, 론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느꼈지만. 공께서는 엄청난 혜안을 지니고 계신 듯…….”
“보물을 가지고 있는 놈을 털면 돼.”
“예?”
레오의 번듯한 얼굴이 괴상하게 구겨졌다. 보물을 가지고 있는 놈을 턴다고? 그럼 도둑질을 하겠다는 건가? 아니,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대체 누구를…? 모르탈리아의 유물씩이나 되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려면 어지간한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변방에서도 손에 꼽는 역사를 지닌 왕국의 왕가 정도면,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겠지.”
그 얘기를 들은 레오의 얼굴에 떠오른 건, 의문과 당황이 아닌 황당함이었다. 무려 정의의 신이 선택한 전사가 내놓은 방안이란 게, 세속 왕가의 주머니를 털겠다는 거라니. 대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레오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정의의 신이시여. 제 신앙심을 시험케 하지 마시옵소서…….’
자기도 모르게 신실한 성기사에게 시련을 내린 칸이었지만, 그는 레오의 반응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르킨 페레야스. 이제 와서 그놈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우연한 계기로 자신과 엮여 운명이 뒤틀린 비운의 보스몹. 만약 칸이 서부 대산맥의 네카르 산에서 놈을 족치지 않았더라면, 녀석은 사령술의 대가이자 사룡의 주인으로서 아르곤을 집어삼키고 망자들의 왕이 됐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보물과 진귀한 장비로 무장시킨 망자들의 군대를 일으켜 제국을 침공했겠지.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그 망자들의 군대를 상대하면서, 갑작스러운 난이도 상승에 비례해 부족한 장비를 보충하며 다르킨 토벌전에 나서게 된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중에 드랍템으로 ‘모르탈리아의 유물’이 분명 포함돼 있었다. 언데드 리치이자, 다르킨을 대신해 망자의 군대를 지휘하던 ‘지휘관 에렉툰’의 드랍템.
‘모르탈리아의 둔갑 로브.’
사실 지금까지는 얻을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해 기억에서 밀어뒀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다르킨을 족친 마당에 미래의 다르킨이 떨구게 될 아이템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아니면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건가. 문득 하나의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미래의 다르킨이 손에 넣은 보물들은 대부분이 아르곤 왕국을 집어삼키면서 챙긴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도 아르곤 어딘가에 고이 보관되어 있을 테고, 이 변방 왕국에서 그만한 유물을 가지고 있을 법한 인물은 많지 않아. 예를 들어… 흑익공.’
마나도 없고, 무식하기까지 한 야만인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고대의 정수’를 파샨투에게 쥐여서 북부로 보낸 그 양반이라면 모르탈리아의 유물도 하나쯤 수집했을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없더라도 괜찮다.
그를 통해 왕가에 줄을 댈 수만 있어도 큰 수확일 테니.
‘베이츠에서 들은 소문에 의하면 아르곤 왕국에 아룡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고 했다. 론이 말하기를, 아르곤 땅에 아룡이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다고 했지. 그건 왕가의 비밀과 연관이 있어.’
그 상황에서 변경백이 루드밀라를 호출했다.
제 봉신을 그녀의 화풀이 팻감으로 버릴 정도로 다급하게.
‘변경백이 제 자존심을 버리도록 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지.’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왕가가 드디어 칼을 빼든 거다. 아르곤 땅에 몸을 뉘인 아룡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력을 모집하려고, 와이번을 사냥한 전적이 있는 루드밀라를 찾은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이미 북부에서 와이번과 바실리스크를 참살한 바가 있는 야만인이 등장한다면?
‘잘 하면, 왕가의 보물고를 열 수도 있겠지.’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흑익공과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 마침, 그를 만나러 갈 괜찮은 명분도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어디, 숙모의 직장에 견학이라도 가볼까.’
당연한 소리지만, 당사자의 허락은 나중에 받을 생각이었다.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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