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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19화 (119/132)

#119화. 왕가의 핏줄 (1)

흑익공의 가문은 본디 아르곤 왕가와 같은 핏줄이었으나, 점차 그 피가 옅어지면서 별개의 가문으로 나뉘어진 케이스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 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기에 충분한 정도였기에 국왕의 치세가 불안정해지면 그를 옹립하려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 결과 흑익공의 선조들은 결정했다.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분쟁의 씨앗이나 다름없으니, 영원토록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기로. 그 어떤 수를 써서도 배신할 수 없는 방법을 써서.

‘충성의 서약’이다.

당대 흑익공들은 모두 국왕의 기사인 동시에 왕국의 유일한 공작이기도 한 것이다.

그 결과 모순적이게도 흑익공의 가문은 더 큰 영광과 명예, 번성을 누리게 되었다. 영원토록 왕가에 충성하는 가문이자, 왕가의 수호신으로서 말이다.

그 이후로 아르곤 왕가를 수호하는 최강의 기사단, 로열 가드의 단장은 모두 흑익공의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이가 맡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처럼 자리 잡았다.

“알겠느냐. 그러니 우리는 왕가에 충성해야만…….”

“아휴. 알아들었다니깐요!”

짝.

이제는 수백 번도 넘게 반복한 장대한 가문의 역사를 읊으며 화목한 식사 시간을 보내던 중년인이, 제 입을 찰싹- 때린 소중한 딸을 상처 입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어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귀하게 키우셨겠죠. 그것도 백 번은 넘게 들었어요!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으면 안 될까요? 가주님?”

“가주님이라니. 단둘이 오붓하게 독대할 기회가 얼마나 있다고 그리 딱딱하게 구는 게냐. 딸아.”

“그 오붓한 시간을 지긋지긋한 장광설로 망치고 있는 당사자한테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네요. 가주님.”

“허억…!”

멀쩡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호들갑을 떠는 못난 아비를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던 금발의 여인. 흑익공의 적녀이자 로열가드의 부단장인 루시아 데 네그라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아버지. 기껏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그런 얘기나 하실 거예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네그라스로 돌아오겠어요. 제가.”

“크흠…. 미, 미안하구나.”

저 근엄한 얼굴로 금세 또 시무룩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루시아는 재차 한숨을 토하려다 억지로 삼켰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왕가의 수호신이냐고….

“어차피 분위기 다 깨진 거. 공적인 얘기나 하자구요.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이미 다 들으셨겠죠?”

“음.”

그 순간 흑익공의 기도가 일변했다. 단순히 눈빛이 바뀌고, 자세를 곧게 세웠을 뿐인데 팔불출 아버지가 왕국의 기둥이자 왕국 최강의 기사인 흑익공로 변한 것이다.

사람이 저렇게 확확 바뀔 수 있는 건가- 놀랄 만도 하지만 루시아는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다시 한번 설명할게요. 일단은 공무니까…. 오후쯤이면 귀빈께서 네그라스를 방문하실 거예요. 저는 선발대로 온 거고요.”

“그래. 둘째라고 했나? 그 오만하고 독선적인 놈이라면 엉덩이가 들뜰 만도 하지. 그래서, 내게 무슨 용무라더냐.”

“거기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대충 예상은 가네요. 아버지의 대전사, 파샨투 경을 빌려달라는 것 아니겠어요? 최근에는 북부에서 마경까지 토벌했다면서요.”

“흠. 그이라면 좋다고 받아들이겠지만, 나로서는 내키지 않는군. 둘째가 또 손을 벌린 곳은?”

“늙은 여우 아르센 변경백 쪽으로도 사람을 보낸 모양이더라고요.”

“로렌의 마녀인가…. 오우거를 사냥한 그녀라면, 충분히 포섭할 가치가 있었겠지.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마는.”

흑익공은 심드렁한 태도로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두툼한 고기를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주제도 모르고, 왕국이 제 세상인 것처럼 날뛰는군. 그러니 세자의 자리를 이어받지 못한 것이지. 천지 분간도 못 하는 것.”

“그건 못 들은 거로 할게요.”

“그러거라. 지금부터 내가 얘기할 것들도 말이다.”

루시아가 얌전히 고개를 주억였다.

“북부 비대위라고 들어봤을지 모르겠구나. 이번에 발족한 그네들에게서 소식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랑테 백작이 서신을 보내왔지. 마경을 토벌하고, 북부의 혼란을 종식한 배후에 대한 얘기였다.”

“네? 그건….”

“파샨투가 말주변이 없어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었지. 그러나 그녀가 분명히 밝혔던 유일한 사실이 바로, 본인의 역할이 크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총지부장 칼엘손. 그자의 역할이 컸다는 건가요?”

“나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다. 마경을 토벌한 영웅이 셋이란 얘기는 너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총지부장 칼엘손, 내가 대전사로 삼은 파샨투, 그리고 마지막이… 파샨투가 본인의 조카라 밝힌 야만인이다. 북부에서는 참수자라 불렸다는군.”

참수자….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지는 별칭에 루시아가 머릿속으로 아주 흉악하고 난폭한 야만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분명, 아주 흉측하고 못난 야만인이겠지- 라고.

“그 참수자가 데일론 후작의 반란을 바로잡은 장본인이라는구나. 파샨투도, 칼엘손도 곁다리에 불과하다는 거야. 그리고 랑테 백작의 요청에 따라 비대위의 이름을 지은 것도 그자라더군.”

“하지만… 야만인은 문명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잖아요?”

“참수자란 야만인은 예외라더구나. 왕국어에 몹시 능통하다고 했어. 또한 정치적인 언행도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랑테 백작이 서신에 적었다. 적어도 그가 나서서 비대위를 휘어잡으면, 자신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믿기 힘든 말이다. 그러나 루시아는 저것이 모두 사실임을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불확실한 정보를 섣불리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어리석지 않으니까. 적어도 사실 확인을 모두 끝마친 상태이리라.

“비대위의 총장, 헤른을 통해 교차 검증을 마쳤다. 참수자는 본인의 전리품이라 할 수 있는 대공의 전리품을 북부 재건에 쓴다는 약조하에 비대위에게 기증했다고 하는군. 그 감독으로는 경계마을의 촌장인 하프엘프와 전 성기사인 베르타 경이 맡았고.”

“…….”

그쯤에 이르러 루시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게 말이 돼?’

그녀는 여타 왕국인들과 달리 야만인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었다. 흑익공의 대전사인 파샨투와 자주 대련으로 어울린 덕분이다.

그리고 야만인에 대한 소문 중 절반은 거짓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 말은 즉, 절반은 사실이라는 거다.

일단은 무식하다. 아무리 시간을 들여서 가르쳐도 왕국어를 익히지 못하는 파샨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이해를 못 했다. 그런데 싸움에 나서는 순간부터는 고도의 수 싸움을 자연스레 구사할 정도로 전투의 달인들이기도 했다.

즉, 싸움 외적인 부분에선 어린애만도 못한 지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전투 그 자체를 숭앙하는 만큼, 전투로 얻는 전리품에 대한 소유욕이 크다. 그런데 본인의 전리품을 무상으로 기증했다고? 그 데일론 후작의 재산을?

‘게다가 움직인 인선도 엄청나.’

특히 베르타 경에 대해선 어떻게 움직였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만신전 교회의 야만인 혐오는 유명하니까.

루시아의 머릿속에서, 참수자라는 야만인에 대한 모습이 점점 괴상망측하게 변해가는 가운데. 그녀의 상념을 멈추듯 흑익공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상. 비대위 자체가 그자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다. 어떤 직책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자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힘들 거야. 그건 즉.”

“참수자라는 야만인이, 북부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다는 거군요.”

“그래. 게다가 검호와 아티팩트를 사용한 파샨투를 능가하는 활약을 펼쳤다니, 무력 또한 엄청나겠지. 그리고 기억하느냐? 로렌의 마녀와 오우거를 사냥한 오우거 슬레이어 또한 야만인이란 사실을?”

“……설마!”

“그래. 동일한 인물이다. 그리고 서부에서 왕국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흑마법사를 참살하고, 바그너의 분쟁에 개입한 존재도 마찬가지로…….”

야만인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딸아.

“그 모든 행보들이 전부, 고작 한 사람의 것이라는 거다.”

*

*

*

북부의 영웅, 오우거 슬레이어, 서부의 흑마법사와 타락한 사제를 제거한 존재.

개별적으로 나누어도 엄청난 업적들이 모두 한 사람의 야만인을 가리킨다는 것. 그 의미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루시아는 우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율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아버지가 그 야만인에 대한 얘기를 꺼낸 이유를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눈치챘구나. 만약 둘째가 그자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니, 랑테 백작이라면 왕가에도 소식을 넣었겠지. 당연히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거고.”

“설마, 그분의 목적은 파샨투 경만이 아니라-.”

“파샨투를 통해, 같은 야만인인 그자를 포섭하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둘째가 정말 그자의 포섭에 성공한다면 어떻게 되겠니.”

둘째 왕자의 영향력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날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었다. 간접적으로 북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내가 이 얘기를 너에게 구태여 한 이유. 잘 알아들으리라 믿는다.”

로열가드의 역할은 왕가의 핏줄을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왕족은 어디를 가더라도 로열가드를 대동해야만 했다. 그리고 로열가드의 단장과 부단장은 모두 흑익공의 혈육이고, 흑익공은 로열가드의 부단장인 루시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 둘째 왕자가 왕위를 위협하도록 방치하지 마라.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라.’고 말이다.

“…최대한 그 둘이 엮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군요. 알았습니다.”

지금의 대화가 바깥으로 새어나간다면, 왕국의 공작이 차기 왕좌의 주인을 선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루시아도, 명령을 내린 흑익공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왕국의 수호신이자, 영원토록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이니까.

“물론, 그자는 북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습을 감췄다고 하니. 둘째가 그자를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

*

*

한편, 흑익공에게 따로 알리지 않고 네그라스를 방문한 칸 일행은 성문 앞에서 뜻밖의 장애물을 마주친 상태였다.

“내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면, 네가 그 소문의 참수자겠구나. 내 너를 찾고자 네그라스를 찾았거늘. 이렇게 마주친 것에 운명을 느끼는구나. 북부의 영웅. 아니, 참수자라 불러야 하려나.”

서른 중반은 넘겼을까.

붉은 기가 도는 금발과 적안을 한 장년의 남자가 곁에 십수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서 성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우연찮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칸의 앞을 가로막았는데, 자연스레 기사들이 일행의 주변을 포위하듯 간격을 벌렸다.

자신이 원한다면 누구라도 멈춰야만 한다는 태도가 겉으로 드러나는 오만한 미소.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의 정체는-.

“감히! 존귀한 이께서 먼저 고개를 들게 만들다니! 어서 무릎을 꿇─어─라─! 이분께서는 아르곤의 영광된 핏줄을 계승했으며, 적법한 왕위 계승권의 주인이신 알란 데 아르곤 이 요르투스 제2 왕자시다!”

“뭐, 그렇다는데? 어서 스스로를 밝히지 않고 뭐 하나?”

로열가드의 외침에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이죽였고, 어느새 일행의 포위를 마친 로열가드들이 당장이라도 발검할 것처럼 검자루에 손을 가져가며 동시에 외쳤다.

“어서 예를 갖추어라─!”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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