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왕가의 핏줄 (2)
“어서 예를 갖추어라─!”
로열가드들의 성난 외침에 일행의 움직임이 뚝- 굳었다. 제2 왕자, 알란은 그 모습을 보고선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게 당연한 반응이지.
제아무리 북부의 영웅이니, 참수자니, 치켜세워도 결국은 왕가의 위세에 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야만인이라도, 십수 명의 로열가드가 뿜어내는 기세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이고.
‘흠. 그래도 조금은 날뛰어줬으면 했는데. 아쉽게 됐어.’
흑익공의 대전사를 통해 참수자를 포섭한다는- 여러모로 귀찮은 과정을 생략한 건 좋다. 하지만 알란의 머릿속 계획으로는 야만인이 제힘만 믿고 덤비는 걸 로열가드를 통해 제압하고서, 강압적으로 휘하에 복속시킨 후 길들일 생각이었단 말이다.
그러나 일말의 반발은커녕,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는 모습을 보니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야만인의 소문이 반만 사실이라도 당장 덤벼들 거라 생각했건만.
아쉽지만…. 그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 그만큼 밑에 들여서 길들이기 쉽다는 얘기일 테니. 알란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언제까지 멀뚱히 서서 보고 있을 건가? 이 내가 먼저 이름을 밝혔는데 말이야.”
“어서 예를 갖추고, 네 신분을 고하라─!”
쿵. 쿵.
오러까지 써가며 발을 구르는 로열가드들의 압박, 그리고 갑자기 일어난 소란을 주목하는 수많은 이목, 어서 답하라고 재촉하듯 턱을 치켜올린 알란.
아무리 용맹한 전사라도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사태의 중심에 선 야만인은 심드렁했다.
‘이 새끼는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왕가와 줄을 대보려고 흑익공의 도시를 찾았다가 우연히 제2 왕자를 마주쳤다?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자신의 목적을 생각하면 쓸데없는 과정을 생략했다며 좋아할 일이지.
다만 상대의 태도가 심히 유감스러웠다.
재수를 밥말아먹은 게 미들랜드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라지만, 눈앞의 놈은 그 이상이지 않나. 초장부터 제 곁에 도열한 깡통들을 내세워서 겁이나 주다니. 나이도 처먹을 만큼 처먹은 놈이….
‘가정 교육을 못 받은 게 분명하군.’
저런 놈들이 있으니까 사랑의 매가 시대를 불문하고 애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선조들의 지혜를 이어받아 유교식 예절 주입이 필요한 때라고.
“때리면 안 돼.”
그때 아리에스가 일행에게만 겨우 들릴 법한 목소리로 칸을 제지했다. 가만히 있던 레오가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정말 왕자를 패려고 했습니까?’라고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것들이 누굴 무식한 야만인으로 아나.’
그에 심기가 불편해진 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생각 없었다.”
“아니. 때렸을 거야. 칸이라면 반드시.”
“공. 아무리 그래도 왕가의 일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좀…….”
“주군. 저는 싸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 로열가드가 상대라니….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이놈들이──!”
알란을 허수아비처럼 세워두고 자기들끼리 쑥덕대는 일행의 모습에 분개한 로열가드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는데, 그 태도가 그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한 듯했다.
우우우웅!
지금껏 마주친 아르곤 왕국의 기사들이 하찮게 보일 정도로 찬란한 오러가 십수 개. 별안간 성문 주변에 푸른 태양이 떠오른 것만 같았다.
“이 아르곤의 땅에서! 위대한 혈통의 주인을 마주하고도 감히 예를 갖추지 않아─! 여기서 목이 잘려도 불만은 없으렸─다─!”
오러로 성량을 늘린 것마냥 우렁차다. 가까이서 벼락이 내리쳐도 이렇진 않을 터였는데, 가까이 있는 알란은 조금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귀를 막지 않았다. 극도로 섬세한 오러 운용으로, 제2 왕자만을 여파에서 비껴낸 것이다.
“하하. 아드리안 경. 너무 그러진 말게. 저들이 겁을 먹지 않았나?”
“전하. 뒤로 물러나 옥체를 보중하소서. 저 무도한 것들이 어떤 패악질을 부릴지 모릅니다.”
“설마. 북부의 영웅으로서 반란을 바로잡은 이가 그러겠는가? 잠시 놀라서 그런 게지.”
그렇지 않은가?
알란의 느물거리는 말투에선, 노골적인 압박이 섞여있었다. 어서 대답하지 않으면 로열가드의 칼날이 떨어져내릴 거라 말하는 것처럼.
노골적인 연기다. 아드리안이라는 로열가드가 나서서 겁을 주고, 알란이 자애로운 왕자의 모습을 연기하는 전형적인 회유책.
“그래. 이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
“알려주기 싫다면.”
“…뭐라?”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에 알란의 얼굴이 굳었다. 비록 왕세자는 아니라고 하나, 제2 왕자인 알란에게 대놓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상대는 이 세계의 결말을 수십 번도 넘게 본 것도 모자라서, 눈칫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닳고 닳은 현대의 회사원이었으니.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는 짧은 사이, 상황 파악을 끝마친 칸이 이죽였다.
“내가 알려주기 싫다고 말하면, 니가 뭘 할 수 있냐고.”
*
*
*
“즉─참──!”
아드리안이 발을 구르는 동시에 그의 신형이 일그러졌다. 오러로 각력을 강화해 단숨에 거리를 좁힌 것이다.
철벽의 아드리안이라 불리우는 그의 실력은 로열가드 내에서도 수위를 다투었다.
‘마경 토벌의 주역? 하찮기는!’
그런 그의 눈에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야만인은 경계할 가치조차 없었다.
전신에 얇게 두른 오러, 왕가의 로열가드에게 주어지는 특제 판금 갑옷. 그 방벽을 꿰뚫을 만한 위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흑익공의 대전사인 파샨투가 흑익공에게 패배한 것도 그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한 탓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놈도 똑같겠지.’
“흐아압!”
짧은 기합과 함께 오러가 열화와 같이 치솟는다. 별다른 잡기는 필요치 않다. 아드리안은 특별 제작된 검이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오러를 밀어넣었고, 순수한 오러의 힘만으로 눈앞의 야만인을 짓이길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드리안의 예상과 달리, 그의 앞을 막아선 건 야만인이 아닌 그의 동료로 보이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공! 제게 맡기십시오…!”
순백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방패를 내세운 청년, 레오의 눈에서 순백의 광채가 피어오른다.
그 광채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린 아드리안은 일순간 당황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로열가드와 예비 성기사의 충돌로 생겨난 굉음이 성문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뭐…?”
“물러나십시오!”
그 결과는 뜻밖에도 동수였다.
왕국의 로열가드에서도 한 손에 꼽는 아드리안과 예비 성기사가 맞수를 이룬 것이다. 그에 아드리안이 경악했고, 레오는 차분히 방패로 아드리안을 떨쳐냈다.
‘어떻게 이런 놈이!’
방패를 통해 전해지는 반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같은 로열가드와 전력으로 충돌해도 이렇지는 않을 터. 아드리안은 저 젊은 성기사가 보통 놈이 아님을 직감하고서 자세를 달리했다.
참수자라는 야만인도 아니고, 고작 곁다리에 불과한 어린 놈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뭐. 대충 이렇게 되겠지.’
그러나 레오의 미래를 아는 칸에게는, 그닥 놀라울 것도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변방왕국의 왕실 기사단이라 해봤자, 실상은 제국의 상급 기사조차 당해내기 힘든 놈들 아닌가.
하지만 레오는 제국 귀족 가문의 태생이면서,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며 성기사단장에 오르는 천재 중의 천재다. 무엇보다 그가 예비 성기사에 머무른 까닭은 단순히 경력의 부재일 뿐이며, 개인적인 야심에 의한 것이었으니.
쾅─!
레오의 기량은 평균적인 성기사의 그것을 가뿐히 상회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변칙적인 오러의 향연에 레오는 거목처럼 굳건히 버티고 섰다. 처음 아드리안과 충돌한 자리에서 조금도 밀려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레오에겐 아직 여유가 넘쳐 보였다.
그 이유는 성기사의 특징이 단단함에 있기 때문이다.
검호들은 무엇이든 베는 검술로 말미암아 압도적인 공격력을 손에 넣었고, 기사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할 수 있는 오러를 통해 다채로움을 손에 넣었다면.
성기사들은 신앙심으로부터 비롯된 강인한 정신력과 신성력에 의한 압도적인 방어력, 그리고 축복에 의한 자가 회복을 통해 철벽과도 같은 수비를 자랑했다.
극단적으로 공격에 치중된 아리에스와 달리, 가장 정석적인 형태의 성기사가 바로 레오인 것이다.
“애새끼가 감히─!”
그런 레오의 여유가 눈에 거슬렸던 걸까.
아드리안이 분개하며 주변의 로열가드를 향해 눈짓했다. 다 같이 나서서 칸 일행을 아예 짓밟겠다는 노골적인 신호였다. 그에 레오가 칸의 의견을 구하듯 고개를 돌렸다.
“뭐, 너한테 맡기라며.”
“공……!”
돌아오는 건 재밌는 싸움 구경을 발견한 중학생처럼 신난 칸의 웃음뿐이었다.
졸지에 열 명도 넘는 로열가드를 상대로 몰매를 맞게 생긴 레오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한 그때. 멀리서 날아든 섬광이 싸움판의 정중앙에 내리꽂혔다.
────쾅!
섬광이 먼저였고, 뒤늦게 굉음이 울렸다.
“정신이 나갔구나. 아드리안.”
그 뒤를 이어 나지막이 울려 퍼진 목소리에 아드리안을 비롯한 로열가드들이 그 자리에 굳는다.
“공공연한 장소에서 로열가드가 왕국의 신민도 아닌 이들을 겁박해? 같잖은 정치질에 눈독을 들이더니, 명예조차 잊은 것이냐?”
“부단장…!”
“닥쳐라.”
어느새 섬광이 내리꽂힌 자리에 나타나, 장창에 버금가는 크기의 쇠화살을 회수한 여인. 로열가드의 부단장인 루시아 데 네그라스가 낮게 일갈했다.
“너희에 대한 처우는 이후 논의하마. 그리고…….”
루시아의 눈이 알란을 스쳤다가, 웃음기 섞인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는 야만인의 순서에서 멈췄다.
“왕자와 외부의 손님께선, 보는 시선이 많으니 안으로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중한 어조이나, 명백히 강압적인 태도로 나서는 루시아의 말에 알란은 잠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이내 수긍했다.
“그쪽 손님께선?”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게 루시아의 개입으로 성문에서의 소요는 순식간에 일단락되었고, 알란과 칸 일행은 나란히 네그라스성으로 들어섰다.
“다들 수고가 많았네. 나머지는 아드리안 경과 루시아 경이 맡을 테니, 편히 쉬시게.”
“예!”
알란의 호위를 맡은….
정확히는 알란을 지지하는 로열가드들이 성의 시종과 함께 모습을 감췄고, 나머지는 그대로 루시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향한 곳은, 방금까지 식사가 한창이었던 듯 향긋한 냄새가 감도는 너른 방이었다.
“흠. 바깥이 제법 소란스럽던데.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나? 알란 왕자.”
“…작은 소란이 있었지요. 대부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내 앞마당에서 절제를 모르는 짐승들이 짖어대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금세 정원이 엉망으로 변할 텐데?”
가히 파격적인 언행이다. 비록 왕세자도 되지 못한 왕자라고는 하나 엄연히 왕가의 핏줄일진대, 그런 알란을 ‘짐승’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알란도, 그를 주군으로 삼은 아드리안도, 로열가드의 부단장인 루시아조차 중년인의 언행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내 누누이 말했지. 뭐든 적당히 하는 게 좋다고. 그렇지 않나? 알란 왕자.”
“……그랬지요.”
“그랬는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만으로도 방 안이 꽉 차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중년인의 체구가 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세가 압도적이다.
질 좋은 기름으로 가지런히 빗어넘긴 머리카락 탓에 짙은 눈썹과 맹금류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눈동자가 훤히 드러났다.
마치, 고고한 창공의 지배자가 사람의 모습으로 화한 듯했다.
“그랬는데도. 기별도 없이 내 성을 찾아온 것도 모자라서, 감히 성의 법도를 어지럽혀? 그게 자네가 대부인 날 대하는 방식인가? 보자보자 하니, 알란 왕자 자네…. 벌써 자기가 왕위를 차지한 것처럼 구는구먼?”
“그게 아니오라…!”
“그만.”
왕국 최강의 기사이자, 왕국의 유일한 공작이며, 공적으로는 왕실 혈통들의 대부로서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낸 흑익공이 알란 왕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준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알란 왕자에게는 재교육이 필요할 성싶네. 나 때는 말이야, 귀족이란 응당 야심을 속에 감추고 겉으로는 겸양과 웃음을 내보여야 하는 존재였어. 당연히 나는 그걸 자네에게 가르쳤지. 그런데 이게 뭔가? 국왕과 왕세자께서 부재한 상황이라고 꼬리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꼴이라니. 왕국의 젊은 귀족들을 대표해야 하는 자네가 이래서야 다른 친구들이 뭘 보고 배우겠나? 통탄스러운 일이로다. 내 소싯적에는 말일세. 귀족이라고 무식하게 굴어서는 안 되었어. 스스로의 능력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스스로가 쟁취해야만 하는 시대였다는 말일세. 그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걸 다 가진 마냥 굴지 않았…….”
숨도 쉬지 않고 연달아 쏟아지는 훈계 세례에, 알란의 얼굴이 구겨지고 루시아가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칸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군.’
망겜 속 야만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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