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왕가의 핏줄 (3)
“때는 내가 아직 작위를 이어받기 전. 그래, 일개 로열가드로서 국왕을 보필하던 시절이었네. 왕위를 두고 격렬한 후계 다툼이 벌어지던 와중. 나는 단신으로 반대파 세력으로 쳐들어가 말했지. 진정 자신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개가 있다면 내 앞에 서라고 말이야. 그렇게 낭만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런데 요즘 것들은 틈만 나면 요행이나 부리지…….”
“그만─! 그만하십시오! 각하.”
“루시아. 그게 무슨 소리니. 아직 해야 할 말이 한참 남았는데….”
“공무 중입니다. 공작 각하.”
장장 이십여 분을 혼자 떠들던 흑익공이 헛기침했다.
“지금 중요한 건, 알란 왕자께서 북부의 영웅으로 알려진 자를 공공연한 장소에서 겁박했다는 겁니다. 왕실의 방패를, 저자의 파락호들처럼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부단장의 말이 옳다. 왕자는 이에 대해 하실 말이 있으신가?”
“……오해군요. 왕실의 핏줄을 모욕한 죗값을 치르게 한 것뿐입니다.”
알란의 말에 흑익공이 자신의 장광설에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하던 칸에게로 향했다.
“그게 사실인가?”
“글쎄. 모욕인지는 모르겠군.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이름을 물어보길래, 알려주기 싫다고 답한 것도 무례가 되나?”
“왕국의 신민이라면.”
“난 서릿골의 전사니, 그에 포함되지 않는군.”
“뭐…. 맞는 말일세.”
“대부님…!”
제 억울함을 토로하려던 알란 왕자의 입을 흑익공이 틀어막았다.
“왕자. 이에 대해선 자네의 과가 크네. 어쨌거나 그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북부의 반란을 제압한 일등공신. 자네가 아무리 왕실의 핏줄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없었어.”
“저는 아르곤의 왕자입니다!”
“왕자일 뿐이지. 왕도 아니고, 왕세자도 아닌.”
알란 왕자의 입이 꾹- 다물려졌다. 모든 왕가 혈통들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흑익공의 말은 그만큼이나 무거웠다.
“만약 자네의 무례에 저치가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어쩌려 했나?”
“그때야말로 저자의 목을 잘라냈겠지요.”
“그래서 자네가 왕세자가 되지 못한 것이야.”
“그게 무슨!”
쾅──!!
지근 거리에서 터진 충돌에 알란 왕자가 비틀거렸다. 아드리안이 서둘러 그를 붙들었으나, 그 아드리안의 얼굴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손님 대접이 거칠군.”
가히 섬전처럼 쏘아진 흑익공이 내뻗은 주먹을, 제자리에서 손바닥으로 받아낸 칸이 심드렁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챈 알란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미안하네. 대부되는 몸으로서 아이의 잘못을 바로잡아주고 싶었거든.”
“그런 거라면야.”
왕국 최강의 기사가 불시에 가한 기습을 너무나 간단하게 막았다. 그것만으로도 아드리안과 알란은 칸의 실력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보았다. 만약 칸이 작정하고 알란을 해하고자 했다면….
“자네 휘하로 들어간 어수룩한 놈들은, 이 친구를 막지 못했을 거야. 설령 막는다 쳐도, 그때는 왕자가 죽은 뒤겠지.”
“……이 땅에서 제 목숨을 해한다면, 그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 친구 하나 잡자고 왕실 기사단을 전부 일으키자고? 그것만으로도 큰 손실이고, 자네는 죽어서도 웃음거리가 될 게야.”
가감 없는 현실에 알란의 낯빛이 일그러졌다.
“그러니, 없던 일로 하지. 자네들은 여기서 처음 마주친 것이고, 이제 제대로 대화를 시작하는 거야. 알았나?”
*
*
*
흑익공의 중재로 상황이 정리된 후.
가볍게 술을 나누며 얘기하자는 흑익공의 제안에 따라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자리.
“흐허허! 이 친구. 요즘 것들이랑 다르게 제법 싹싹하고 화끈하구만!”
“그쪽도 요즘 보기 드문 제대로 된 어른이오. 이쪽에선 거의 처음 보는 것 같군.”
“그래? 그런가?”
“특히, 방금 했던 말들 모두 마음을 울리더군.”
“하하하─! 내 자식놈들도 이런 얘기는 들은 체도 안 하는데, 설마 처음 보는 이에게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이야!”
“어려서 그렇지. 아닌 말로 요즘 것들은 너무 정신이 해이해서 문제요.”
“그럼, 그럼!”
별안간 의기투합을 해서는 ‘요즘 것들’에 대한 토론을 시작한 흑익공과 칸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리에스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둘이 닮았어.”
“…….”
“…….”
갑자기 분위기가 차게 식었다. 급격히 찾아온 정적과 시선에 아리에스의 옆에 있던 레오가 흠칫 놀라 두리번거렸지만, 아리에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본인 몫으로 나온 요리를 우물거릴 뿐이었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레오가 나서서 뭐라도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흑익공이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마침 이런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지! 꼬마 아가씨가 눈썰미가 좋구만!”
“꼬마 아닌데.”
“꼬마 아가씨 말이 맞네. 이 친구 성격이 제법 나랑 잘 맞는단 말이야. 듣자 하니, 파샨투와는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라지? 그래서 그런가?”
“서릿골에선 한 다리 건너면 전부 엮여 있으니, 딱히 특별할 것도 없소.”
“그런가? 나중에 한번 기회가 된다면 서릿골에도 가보고 싶군.”
후회하실 텐데. 칸은 두툼한 고기를 두어 번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흠. 마음 같아선, 자네와 밤새도록 대작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은데……. 형편이 돕질 않는군.”
“그건 일을 전부 끝내고 해도 늦지 않소.”
“그렇지. 그래서 슬슬 본제로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한데…….”
술에 취한 것처럼 구부정했던 흑익공의 자세가 단숨에 번듯해졌다.
“우선, 알란 왕자의 얘기를 들어보는 게 맞는 순서 같군. 대충 예상은 가지만 말이야.”
“아룡들을 토벌할 생각입니다. 왕가의 이름을 내걸고, 대대적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 공훈은 왕자가 홀라당 삼킬 예정이겠고.”
“……그걸 위해서 전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쭉정이가 아닌, 아룡을 상대로도 본인의 무위를 발휘할 수 있는 진짜배기들을요. 대부께서 아끼는 대전사나, 여기 있는 참수자처럼.”
“파샨투를 빌려달라? 그건 어렵지 않지. 애초에 기회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사람이니까. 하지만 명목상이나마 그녀의 고용주인 내가 내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요.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주셔야 합니다. 대부님. 지금도 왕국민들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아룡이란 재앙에 의해 큰 혼란을 겪고 있다는 걸요.”
흑익공은 알란 왕자의 말에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평소 오만한 성정을 감추지 않는 알란 왕자가, 왕국민 운운하는 게 가당찮다는 투였다.
“물론, 무상으로 힘을 빌려달라는 건 아닙니다. 요르투스 후작가를 비롯한 세 백작가에서 보상을 약속했으니까요.”
“자네를 지지하는 세력들이로군. 그와 별개로, 내게 군침이 당기는 보상은 아니라는 거. 왕자도 알 걸세.”
“대전사께서는 바랄 수도 있겠지요. 대부님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내어준다 약속한다면 말입니다.”
“그럼 저치는 어쩔 생각인가?”
흑익공이 화두를 칸에게로 돌렸다.
“저만한 실력이면 야만인이라는 출신을 빼놓고서도 천금을 안겨주겠다는 곳이 넘쳐날 텐데. 대체 얼마나 보상을 주려고?”
“…그건 지금부터 협상을 해봐야 할 문제겠지요.”
“그 시작 단계를 초장부터 어그러뜨린 건 왕자일세. 나름 왕실의 할 일을 대신해 북부의 혼란을 바로잡은 영웅을 겁박했으니까.”
“물론…. 그에 대해서도 섭섭지 않게 할 생각입니다.”
그 말에 흑익공이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칸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무언의 표현에 칸이 피식 웃으며 화답했다.
“나는 몸값이 꽤 비싼 편인데.”
“뭘 원하는가? 북부에서의 얘기를 듣자 하니 금에는 욕심이 없는 듯한데. 절세의 무구라도 주면 만족하겠나?”
“그쪽이 말하는 절세의 무구와 내가 생각하는 절세의 무구는 많이 다를 거요.”
“…왕실의 저력을 무시하지 말게. 자네에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무구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으니.”
“글쎄.”
과연, 네가 그런 걸 준비할 수나 있겠냐? 라고 말하는 듯한 웃음.
칸으로선 당연한 반응이다.
게임을 통해 종결급 아이템을 수도 없이 다뤄본 것도 모자라, 해괴한 사념이 들러붙은 마검에 여신의 신성이 깃든 도끼까지 다뤄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그의 기준에 충족하는 무구를 내어주려면,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 따위가 금고를 여는 거로는 부족하다. 그래, 적어도-.
“왕실의 보물고. 그 정도는 열어주셔야겠는데.”
“이런 미친…!”
그 말에 분노를 터뜨린 건 아드리안이었다.
“듣자 하니 네놈의 방자함이 도를 넘는구나! 왕실의 보물고를 열라고?”
“싫으면 말던가.”
“왕자님! 저 미개한 놈의 손을 빌릴 것 없이, 제가 직접 아룡을 토벌하겠습니다!”
“뭐…. 열심히 해보라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척.
아드리안과 칸의 갈등을 손을 들어 막은 알란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자네의 자신감이 엄청나다는 건 알겠네. 그러니 이번엔 이쪽에서 묻고 싶군. 정말 자네에게 왕실의 보물을 내어줄 만한 가치가 있고, 자네가 그걸 원한다면. 그걸 내어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가진 게 누구일 것 같나? 참고로, 이 안건에 대해선 폐하와 왕세자께선 조금도 관여하지 않으실 거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알란은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다. 현재 폐하와 왕세자가 부재한 이 시국에, 가장 계승권에 가까운 지위를 지닌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왕실의 보물고를 열 수 없음이다.”
“호오.”
“또한, 머지않아 섭정을 맡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알란 왕자.”
망부석처럼 알란의 뒤에 서서 상황을 관망하던 로열가드의 부단장, 루시아가 낮게 일갈하자 알란은 알겠다며 능청을 떨었다.
“뭐, 그런 거야. 자네가 정녕 왕실의 보물을 탐낸다면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는 충분히 설명이 됐으리라 믿네.”
알란은 거기까지 말하고서, 나머지는 스스로 생각하라는 듯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왕실의 보물을 주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으면서도, 가능성을 넌지시 제시하여 교묘히 회유하는 알란 왕자의 화법은 전형적인 귀족들의 그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질적이었다.
본인의 신분이 가진 힘을 똑똑히 인지하고, 추후 책임을 피할 길까지 만들어둔 것.
이러한 정치적 화법에 익숙하다 못해, 몸에 밴 귀족 같은 부류가 아니라면 말의 허점을 깨닫지 못하고 속을 수밖에 없다.
‘이런….’
레오가 티 나지 않게 침음을 흘렸다.
‘공께서는 분명 비상한 두뇌를 가지셨다. 하지만 이건 별개야.’
대륙에서 가장 간교한 뱀들이 모여드는 제국 귀족가에서 태어난 레오였다. 그렇기에 알란 왕자가 내뱉은 말이 함정이나 다름없음을 대번에 눈치챘다.
알란 왕자는 칸의 무력을 빌리고선, 본인의 권한으로도 왕실의 보물고는 열 수 없었다며 발뺌할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분명하게 왕실의 보물을 주겠노라 말한 적이 없다고도 하겠지.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그게 무슨 억지냐고 따지겠지만, 그것이 정치다. 이상할 정도로 칸에게 호의를 보내는 흑익공조차 알란 왕자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뛰어난 전사라도. 아니, 개세적인 무력을 가진 공이니. 더욱더 귀족들의 정치에는 익숙하지 않을 거야.’
레오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나설 때라 생각했다. 무력적으로는 칸의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이런 면에서는 그래도 자신이 더 나을 거라 확신했기에.
하지만 그런 레오의 생각은 반만 정답이었다.
칸이 귀족들의 정치판에 익숙하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간의 뒤통수 경험을 통해, 귀족을 상대하는 방법은 진작에 터득한 지 오래였다. 그 방법이란-.
“그 누군가가 꼭 그쪽일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계승권을 지닌 왕족이 더 있을 텐데? 가만히 있어도 후순위에 따라 계승권을 지니게 될 그쪽보다 훨씬 더 절실한 왕족이 말이야.”
판 자체를 엎고, 이쪽의 방식대로 새로이 판을 짜는 거다.
“그러니까,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 보물고를 열어줄 건지, 말 건지.”
고작 몇 마디 말로 이쪽에서 보수를 요구하는 게 아닌, 상대방이 어떻게든 보수를 안겨주도록 경쟁해야만 하는 상황을 강제한다. 그렇게 주도권을 틀어쥔 칸이 팔짱을 끼며 조소했다.
“만약 거절하면… 알지?”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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