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왕가의 핏줄 (4)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왕가의 혈족 중, 더 많은 대가를 내어주는 쪽에 붙겠다.
그 오만한 제안에 알란 왕자는 격노를 터뜨리며 한참을 날뛰더니, 로열가드들을 데리고 네그라스 성을 벗어나 버렸다. 기필코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협박과 함께.
“돈 못 주겠단 말을 길게도 하는군.”
“괜찮겠습니까? 공. 왕가를 적으로 돌리면, 왕국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질 겁니다.”
“내가 언제 왕가를 적으로 돌렸다는 거냐. 이왕자가 왕실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레오가 걱정하는 건, 왕실의 기사단인 로열가드를 사사로이 대동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이왕자를 적으로 돌렸단 사실 그 자체였다.
물론, 악마의 의식체를 단신으로 토벌한 강자라면 굳이 아르곤에 얽매이지 않고 당장 제국을 가서도 호의호식할 수 있겠지만.
“공의 목적을 생각하면…. 악수가 아니었는지.”
“아니, 오히려 잘됐지.”
“잘됐다니요?”
“대충 이런 흐름을 바라고 괜한 바람을 넣은 거 아니오?”
“나 말인가?”
“당신 아니면 누구겠소. 흑익공.”
칸의 지목을 받은 중년인, 흑익공이 옅은 미소와 함께 시치미를 뗐다.
“나는 그저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뿐이야.”
“그런 것치고는, 어째 하는 말마다 왕자의 속을 뒤집어놓던데. 그것도 별 의도가 없던 거요?”
“글쎄. 그 속좁고 오만한 놈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누가 알겠는가.”
“대부 정도 되면 알 만하지.”
“역시, 자네. 나랑 의형제라도 맺을 생각 없나? 이렇게 마음이 잘 맞기도 어렵거늘.”
“서릿골에 가서 전사의 시험을 치르고 오면, 생각해 보겠소.”
“나중에 꼭 가야겠군.”
졸지에 지옥행 티켓을 스스로 끊어버린 흑익공이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럼, 이것까지 알겠나? 내가 자네와 이왕자가 손을 잡지 못하게 훼방을 놓은 이유를.”
“파샨투.”
“응?”
“성문에서 충돌이 났을 때. 파샨투가 모습을 보이지 않더군. 그 양반 성격을 생각하면 당장 뛰쳐나오는 게 정상인데.”
“……!”
늘어지듯 의자에 몸을 뉘였던 흑익공의 허리가 절로 세워졌다. 설마 그 사이에 거기까지 추측을 했다고…?!
“단순 추측이지만. 내 숙모는 이미 다른 곳에서 다른 왕가의 핏줄과 함께 아룡을 사냥하고 있는 것 아니오?”
*
*
*
“────!”
아룡의 포효가 거리를 막론하고 귓전을 파고들어 의지를 제압한다.
개체마다 전투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아룡이 재앙 취급을 받는 이유다.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전투 의지를 잃는다. 주변의 마물을 모조리 끌어들이는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다가, 공통적으로 단단한 비늘을 지닌 탓에 죽이기 조차 쉽지 않다.
‘이게… 아룡!’
가까운 거리에서 포효를 직격당한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는지, 여인이 경악하며 주춤거렸다.
드문드문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은 아룡이 날뛰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맺힌 주문의 형상이 그 이유를 증명하고 있었으니.
“물러나세요!”
일반적인 주문의 발동 속도를 아득히 상회하는 고속 영창이었다.
포효로 인해 정신력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완성한 중위계 주문이 아룡의 비늘을 두들기는 가운데, 코앞에서 주문의 폭발을 맞닥뜨린 또 다른 여인….
아니, 서릿골의 야만전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 뜨겁다─!”
“파샨투…!”
물러나라는 경고에도 아룡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서릿골의 전사들에게 전수되는 근접 박투술, 카르투스로 아룡의 목을 붙든 그녀의 모습은 제국의 용기사를 연상케 했다.
“키이익──!”
그러나 실상은 아룡의 목에 억지로 다리를 건 채 버티는 형국이었으니. 아룡이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어떻게든 파샨투를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전사의 시험을 통과한 대부분의 야만전사들이 그렇듯, 파샨투는 카르투스의 달인이었다.
꽈드드득!
오히려 조이는 힘이 더 강해지자 아룡이 비명을 토하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적금발의 여인이 눈을 빛냈다. 아룡이 주문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때를 놓치지 않고 주문을 투사해 놈의 비행을 끝까지 막아냈고, 그사이에 파샨투가 흑색 도끼로 아룡의 안구를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단단한 비늘을 가진 아룡이라도, 속살을 헤집다 못해 진탕으로 만드는 야만전사의 도끼질엔 별 수 없었다.
퍽! 퍽! 퍽! 퍽!
태생적으로 괴력을 타고나는 야만전사. 그중에서도 특히나 거대한 덩치를 타고난 파샨투의 도끼가 눈동자 안쪽의 단단한 껍질을 부수며 뇌를 통째로 으스러뜨렸다.
그러고도 얼마간 발버둥을 지속하던 아룡이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힘이 다해 기우뚱 거대한 몸체를 바닥에 뉘었다.
“키이익……!”
마지막 단말마를 토하며 아룡이 죽었다.
그러자 용의 지배에서 벗어난 마물 호드가 기사들의 오러를 피해 사방으로 도망쳤고, 그제서야 적금발의 여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곤 바깥에는 이런 괴물들이 우글댄다 생각하니, 기가 다 질리네요…….”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정말 그랬다면 제국 외의 국가들은 진작 패망했을 테니까요.”
“막심 경.”
아룡에게 이끌려 모여드는 마물을 혼자 감당하고 있던 기사. 막심이 기가 질린다는 투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저나, 흑익공이 제일 아낀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군요. 마나도 없는 몸으로 어찌 저런…….”
“경이 보기에도 대단한 수준인가요?”
“물론,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도 저만큼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거지요. 오러를 써야 가능한 몸놀림이라는 거니까.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저 투쟁심과 몸을 아끼지 않는 전투법이 가장 위협적입니다-. 막심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건 다행이군요. 알란 왕자는 아직 사람을 모으지도 못했을 테니. 확실히 앞서고 계실 겁니다.”
“이런 문제로 경쟁을 하는 게 맞기나 할까요….”
“공주님께서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그래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르곤 왕국의 공주이자 왕세자의 친혈육인 델피나의 얼굴에 근심이 어린다.
“알란에겐 지금이 왕세자가 될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요.”
모종의 문제로 왕과 왕세자가 모두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금. 델피나가 왕성을 벗어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정확히는 알란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 그녀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막심과 흑익공의 대전사인 파샨투와 함께 아룡 사냥에 나선 것.
‘그래요. 이미 벌어진 일, 근심에 빠져서 멈춰 서기엔 늦었죠.’
델피나는 맥심과 파샨투에게 전장의 정리를 부탁한 후, 아룡의 등장으로 쑥대밭이 된 도시의 시장을 만났다.
“공주 전하…! 정녕 그 골칫덩어리를 잡으신 겁니까!”
도시의 시장이 눈물을 흘리며. 아니, 무릎까지 꿇어가며 델피나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뜬금없이 나타난 아룡에 의해 도시가 폐허가 되기 직전에 델피나가 나타나 그걸 막아주었으니, 그에겐 델피나가 가문의 은인이나 다름없을 터.
“폐하와 왕세자께서 이 사태를 가만히 두지 않으실 거예요. 저도 개인적으로 귀하를 지원할 생각이 있으니, 시민들을 잘 다독여서 재건에 힘쓰시길.”
“이, 이를 말씀이십니까! 최선을 다해서 도시를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국왕 폐하 만만세!”
이렇게 구원받은 이들은 자연스레 국왕파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델피나는 그렇게 믿고서 또 다른 도시로 향했다.
난생 겪어본 적 없는 아룡이란 재해에 시름 하는 도시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다행히 아르곤 왕국의 왕족들은 대부분이 강골인 데다가, 마나를 다루는 재주 또한 능숙했기에 강행군에 익숙지 않은 델피나라도 무리 없이 파샨투와 막심의 속도에 맞출 수 있었다.
“공주! 서릿골 사람 같다!”
“하하…. 칭찬 감사해요.”
오죽하면 파샨투가 델피나의 육체를 두고 야만인 같다 할 정도. 정작 칭찬을 받은 장본인이 이게 칭찬인지, 험담인지를 두고 잠시간 고민해야 했다마는.
“다음은… 남부와 서부의 접경지네요.”
“예. 인근 도시에서 다섯의 기사와 이백의 병사를 차출했음에도 토벌에 실패했고, 현재는 도시 인근에 둥지를 틀고 잠에 들었다고 합니다.”
“아룡에 대한 정보는요?”
“정보상…. 하얀 까마귀의 말로는 조르주 공국에서 발견된 사례가 있는 개체로, 당시 거검의 에흐람이라 불리는 기사가 단독으로 토벌에 성공했다고 한 탓에 정보가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대신 에흐람이란 기사에 대한 정보를 첨부했는데, 적어도 제국의 상급 기사를 상회하는 실력자라고…….”
“애매하네요.”
하얀 까마귀의 정보가 애매하다는 게 아니다. 그들이 내어준 정보는 촉박한 시간을 생각하면 최선. 다만 에흐람이란 기사가 단독으로 토벌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모호함이 문제였다.
“거검의 에흐람. 기사들 사이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내입니다. 만약 제국에서 태어났다면 상급 기사 이상도 노릴 수 있었을 거라는 비운의 천재지요. 다만….”
“에흐람 경이 전투의 경과를 밝히지 않은 이상. 아룡의 강함은 끝까지 미지수라는 것이 문제겠네요. 그나마 분명한 건, 그가 나설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거겠죠.”
“예. 그럴 거라 사료됩니다.”
“경과 파샨투, 제 마법으로 가능할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추천드리고 싶지는 않군요. 제 목숨이야 공주님께 바쳤으니 상관없습니다만.”
아룡의 강함이 상정한 바를 훌쩍 넘어선다면, 그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막심의 말에 델피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괜찮아요.”
델피나의 말은 막심의 걱정을 덜기 위한 거짓말이나, 스스로의 마법을 과신하는 오만한 발언이 아니었다.
“저도 아르곤의 혈통을 타고났으니까요.”
그저 혈통에서 기인한 특별함에 따른 당연한 사실일 뿐.
막심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룡이 나타났다는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서릿골에서 온 여전사와 왕국의 공주, 그녀를 수행하는 기사라는 해괴한 조합의 일행은 왕위를 노리는 제2 왕자보다 먼저. 아룡들을 토벌하기 위한 여정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간간이 하얀 까마귀가 보낸 정보를 받아보며 아르곤 전역에 나타난 아룡들의 토벌 상황을 확인하던 델피나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막심을 불렀다.
“공주님. 왜 그러시는지….”
“막심. 이, 이것 좀 봐줄래요? 도저히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
“예? 예.”
현명하고 사려 깊기로 유명한 델피나였다. 그런 그녀가 당황을 감추지 못할 정도의 정보라니? 하얀 까마귀의 인장이 박힌 종이를 받아든 막심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대체…….”
“뭐길래 그러나!”
“아, 파샨투 경. 여기 서신에……. 아니, 글을 모르신다 하셨지요.”
막심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최대한 파샨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서신의 내용을 전달했다. 몇 번을 읽어도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의심되는 내용을-.
“나, 남서부에서 날뛰던 아룡이 폐하의 명을 따르는 전사들에게 격살. 그를 비롯해 아룡의 침공을 받았던 다섯 개의 도시가 순차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귀족의 인장이 찍힌 지지선언서가 함께 동봉되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쉽게 말해라!”
더 쉬운 설명을 요구하는 파샨투에게, 막심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
*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알란 왕자님! 분노를 가라앉히십시오…!”
“분노를 가라앉히라고? 이 무능한 것들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정보가 적힌 서류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알란 왕자가 대노하여 외쳤다.
“그 망할 놈들이 내 사냥감을 가로채고 있는데, 진정하란 말이 나와──!”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949-224-9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