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왕가의 핏줄 (5)
“공. 이놈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냐.”
“예. 하얀 까마귀…. 레븐이라고 했던가요? 그자의 말로는 나머지 지방에 나타난 아룡은 내버려 두면 토벌이 될 테니 가봤자 시간 낭비라고 합니다.”
“그놈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다.”
쿵──!
목이 졸린 채 그대로 질식사한 아룡의 시체를 가볍게 내팽개치는 칸의 괴력을 목도한 레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 내린다.
흑익공과 모종의 거래를 맺은 뒤.
칸은 일행을 둘로 나누어 아룡 사냥에 나섰고, 이번에 잡은 녀석이 칸과 레오가 함께 사냥한 네 번째 아룡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냥한 아룡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강력한 개체로 제법 난항을 겪을 거란 레오의 예상과 달리. 사냥은 지나치단 말이 나올 정도로 간결하게 끝났다.
‘아룡의 목을 졸라서 죽여? 주문으로도 하기 힘든 짓거리를 맨손으로…….’
심지어 이번에 사냥한 개체는 아룡 중에서도 특출난 단단함을 자랑하는 괴물이었다.
레오가 전력으로 내리찍은 검격으로 놈의 갈색 비늘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던 걸 생각하면, 과거 칸이 사냥했다는 바실리스크나 와이번은 비교도 안 될 정도리라.
칸은 그런 괴물의 두꺼운 목덜미를 양팔로 휘감아 조르다 못해, 으깨서 부셔버렸다. 본래의 절반 크기도 안 되게 쪼그라든 아룡의 목이 칸의 괴력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냈는데, 레오는 저도 모르게 본인이 칸과 싸우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필패다. 저건 못 막아…!’
제아무리 수비에 특화된 성기사라고 한들, 방금 목이 졸려서 죽은 아룡보다 단단하지는 않다. 만약 레오 자신이 칸의 일격을 받아내려 했다가는, 순식간에 몸뚱어리가 터져버리겠지.
‘절대 개기지 말자.’
레오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제7막 보스 ‘변절자 레오니르’의 등장 확률을 낮춰버린 칸은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앞으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리에스가 제대로 움직였다면, 그 싸가지 없는 놈이 사냥했어야 할 아룡은 씨가 말랐겠지.’
현재 난생 겪은 적 없는 아룡의 공격에 흔들리는 민심을 알란이 휘어잡게 된다면, 모종의 사유로 국정에 나설 수 없게 된 국왕과 왕세자의 뒤를 이어 알란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칸의 역할은 ‘왕의 이름으로’ 아르곤 전역에 나타난 아룡을 토벌해, 민심을 비롯해 흔들리는 국왕파의 단결을 다잡는 것이었다.
‘내 역할은 대충 끝났다. 여기서 아룡이 더 나타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이제까지 아르곤 땅을 밟지 않던 아룡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부터.
어째선지 지금까지의 습격이 전초전에 불과하단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쯧. 이놈의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아서 문제인데.’
*
*
*
이튿날, 인근 도시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던 칸과 레오를 찾아 아리에스와 마이아가 합류했다.
웬 꺼림칙한 놈과 껄끄러운 숙모, 그리고 왕실의 핏줄을 대동하고서 말이다.
“전에는 반란군의 병사더니, 이제는 공주의 호위병으로 취직한 거냐?”
“나야 뭐. 돈을 잘 주는 쪽의 고용인 아니겠소? 언제나 그렇듯.”
“대단한 돈벌레 납셨군. 그래서, 요새 한창 주가가 오르는 정보 길드의 주인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냐.”
“음……. 그 얘기는 내가 아니라 이쪽 공주님에게 듣는 게 낫겠소.”
왕실의 인장이 박힌 갑옷으로 무장한 익숙한 낯짝, 하얀 까마귀 레븐이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파샨투와 깡통 하나를 양옆에 둔 적금발의 여인.
“델피나 데 아르곤 이 레이옌이라고 합니다. 자리를 비우신 폐하와 왕세자를 대신해 왕국의 혼란을 잠재워주신 점. 미력한 몸으로나마 감사를.”
“고, 공주님!”
“막심. 응당 취해야 할 예를 취한 것뿐이에요.”
전혀 비굴하단 기색 없이 야만인에게 허리를 굽히는 왕족이라. 전형적인 왕족의 모습을 보였던 알란에 비해, 이쪽 공주님은 여러모로 독특한 부류인 듯했다. 게다가 전신을 흉터로 뒤덮은 거구를 마주하면 거칠기로 유명한 용병들도 주춤하기 마련인데, 똑바로 마주친 눈의 흔들림이 없다.
‘여러모로 특이한 공주님이시군.’
기억에 오래 남을 법한 첫인상을 새긴 공주, 델피나는 깊게 숙인 허리를 피더니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로열가드의 부단장이자, 흑익공의 적녀이신 루시아 경이 지급으로 사람을 보내왔어요. 알란 왕자가 비밀리에 외가인 요르투스를 방문. 일단의 무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고 해요.”
“이제 와서 나서봤자, 껀덕지가 없을 텐데. 왕성이라도 습격할 셈인가?”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건 아닐 겁니다. 왜냐햐면…….”
“요르투스 후작가가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상단은 왕국 최대요. 말이 호위 병력이지, 사실상 사병이나 다름없는 병력을 왕국 곳곳으로 퍼뜨리는 데다가 왕실의 외척이라는 배경 탓에 이곳저곳 연결된 세력이 많아.”
“레븐의 말이 맞아요. 즉, 이제와서 알란이 움직인 건. 요르투스 후작가가 물어온 정보가 있었다는 얘기겠죠. 그리고 그건.”
현 구도를 완전히 뒤바꿀 정도의 ‘무언가’라는 것.
“그게 아니고서야 알란이 무리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어요.”
“너희 쪽에서 추적은 불가능한가? 레븐.”
“최대한 해보고는 있소. 그래도 제때 맞추기는 힘들 거야. 저쪽도 내가 끼어들었단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여기저기 사람을 뿌리고 있거든. 최근에야 하얀 까마귀도 꽤 컸지만, 왕실의 외척이 부리는 인력에 비할 바는 아니라.”
“귀찮게 됐군.”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건가.
칸이 생각하기에 알란이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많지 않다.
국왕과 왕세자가 부재한 왕성을 점거하는 것. 그러나 민심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의 반란은 결국 실패할 따름이다. 제아무리 멍청한 녀석이라도 저지르지 않을 실수. 또 하나는-.
‘왕국이 통째로 패망할 만한 문제를 본인 주도하에 해결하는 것.’
그나마 민심도 잡고, 본인의 승기도 잡을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발목만 잠긴 사람을 구해줘봐야 고마움을 느낄까? 그렇지 않다. 당연히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순간에 구해줘야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는 법이다.
‘알란 왕자는 사건이 터진 직후에 움직이겠지. 그에 맞춰서 뒤늦게 움직여봐야 늦을 거고.’
하지만 왕국 전체를 위협할 만한 대사건을, 고작 왕자의 개인 세력만으로 해결하는 게 가능하냐는 의문이 남는다.
결국, 종적을 감춰버린 알란 왕자의 행방에 정보력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어진 무기력한 상황에-.
용병 길드를 통해 다른 누구도 아닌 칸의 앞으로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단서가 담긴 전서가 도착했다.
“디에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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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는 생각했다.
마흔하고도 둘이라는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맞이한 인생의 전환기가 있다면, 바그너에서 웬 야만인과 엮였던 순간일 것이라고.
물론, 말을 대신해 마차를 끈다는 굴욕적인 경험도 겪게 되었지만. 그만큼 값진 걸 얻었고, 그 덕분에 그의 용병 생활도 큰 변혁을 맞이할 수 있었다.
“흐흐. 예쁜아. 오늘도 빛이 나는구나.”
바그너의 분쟁 과정에서 칸에 의해 목숨을 구한 드워프가 선물한 흑색의 검은 무려 오크 가죽조차 부드럽게 잘라버리는 천하의 명검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나름 칼재주가 나쁘지 않은 디에고의 실력이 더해지니, 같은 고생을 해도 이전의 몇 배나 되는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당연히 용병 업계에서 알음알음 디에고의 명성이 퍼져나갔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의뢰주들의 덩치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으며, 종국엔 왕국 최대의 상단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호화로운 식사에, 편한 잠자리에, 그냥 얼굴 마담 노릇만 해도 주어지는 엄청난 봉급까지을 약속하는 그들에게 디에고는 냉큼 수락 의사를 밝혔다.
‘왕실의 외척이라는 배경과 후작가에서 직접 운용하는 상단인 덕분에 자금력이 썩어나는 모양이지. 빌어먹을 귀족 놈들.’
물론, 처음에는 묘한 반발심도 있었더랬다.
그만한 돈을 가지고도 상단을 통해 왕국의 자금력을 휘어잡을 뿐. 사람들이 굶어 뒈지건 말건 조금도 신경 안 쓰는 귀족들의 행태에 조금은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귀족 나으리 만만세.’
딱히 위험한 일도 안 시키고, 굴러가는 마차의 바퀴나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기만 해도 돈을 준다. 이만큼 인심이 후한 고용주가 어디에 있다고.
디에고는 상단에 영원한 충성을 속으로 맹세하며, 어떻게든 고용주의 눈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상단이 거느리는 호위들의 총책임자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일하게 된 상단의 속사정을 겉핥기로나마 알 수 있었다.
“이왕자를 왕세자로 올려놓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래. 자네야 단기간에 바짝 치고 올라와서 모르겠지만, 상단의 주인인 요르투스가 왕실의 외척이지 않나.”
“그거야 알지. 그런데 왕세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 아니야?”
“뭐, 왕실도 사정이 있다는 거겠지. 어쨌든 윗선에선 가능성이 꽤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알란 왕자가 공훈을 세울 수 있게 지원하는 것 같고.”
호위 총책임자들 중 가장 친밀한 녀석이 부쩍 치고 올라온 탓에 겉도는 디에고에게 충고하듯 건넨 말에 디에고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니까. 조만간 우리가 호위대를 이끌고 아룡 토벌에 나설 수도 있다는 얘기지.”
“아니, 우리 같은 용병 나부랭이가 무슨 아룡 사냥을 해?”
“지원하는 정도는 가능하잖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러나 ‘국왕의 전사’를 자칭하는 무리들이 대뜸 나타나선 아룡의 씨를 말릴 기세로 아룡을 토벌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소집령?”
“그래, 시부럴. 언제까지고 꿀통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기어이 일이 터졌구만.”
“도대체 뭐 때문에?”
“몰라. 웬 야만인이 어쩌구 난리도 아니었어.”
“야만인이라고……?”
디에고가 ‘야만인’이란 단어의 등장에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가운데.
소집령에 응해야 할 책임이 있는 이들. 상행의 책임자나 호위대의 대표 격인 소수의 용병들은 요르투스 안쪽의 상단 거점에 모여 상단주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굽실거리는 상단주와 열 명도 넘는 기사를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왕자님. 이들을 데려가시면 됩니다.”
갑작스러운 알란의 등장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소문을 알고 있던 이들은 올 게 왔다는 듯한 반응이었고, 소문에 어두운 이들은 갑자기 왕자가 등장한 것에 순수한 의문을 느낀 듯했다.
그중에서도 디에고는….
‘시발,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지?’
본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노라고.
지금 앞에 놓인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길을 고르냐에 따라 인생이 또다시 큰 변화를 맞이할 거라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이전에 코르디 칸이라는 괴물 같은 야만인과 헤어지면서 자신이 내뱉었던-.
‘남부에서 재밌는 소식이 생기면 알리겠다.’는 약속이 머릿속을 스쳤다.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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