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124화 (124/132)

#124화. 왕가의 핏줄 (6)

‘은패 용병 코르디 칸’의 앞으로 부쳐지는 용병 조합의 모든 서신은 모두 지급(至急)으로 처리된다.

이는 마탑의 마구스 제롬이 보내올 무기와 서신을 빠르게 받아볼 수 있도록 칸이 따로 부탁한 조치였고, 칼엘손의 직접적인 입김이 닿아 아르곤의 모든 용병조합 지부에 전달된 사항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디에고로선 나름의 머리를 굴려서 조합을 통해 연락을 시도한 것이었겠으나, 의도치 않게 최선의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그렇게 전해진 서신은 중세 무지렁이들 특유의 난잡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지만, 아예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내용 자체는 제대로 전달이 됐다.

「날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혹시 몰라서 서신을 남기겠소. 그쪽과 헤어진 후에 나는 요르투스 후작가의 호위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위쪽 인간들이 야만인을 씹어댄다는 얘기를 동료한테 들었지 뭐요. 듣자마자 딱 감이 왔지. 이거는 그쪽이랑 엮인 얘기구나! 하고 말이오. 바그너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뭐더라…. 내가 말하려는 건, 요르투스 후작가의 상단이 알란 왕자와 함께 서부로 향한다고 하는구만. 아르곤 전역으로 사람을 뿌렸다가, 서부로 모이게 한다는 걸 보아하니 구린내 나는 일을 하려는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고 일단 그쪽이 알면 좋아할 것 같아서 서신을 쓰는 거요. 이만하면 대충 알아먹겠지? 뭐 더 써야 할 말이 있나…….」

칸은 서신에 적힌 내용 중, 필요한 것만 골라 일행에게 공유했다. 알란 왕자가 서부로 향하고 있으며, 상단의 병력을 대대적으로 차출했다는 것까지.

“서부면….”

드물게 떨떠름한 반응을 내비치는 아리에스에게 칸이 그녀의 생각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제아무리 감정 표현이 희박한 그녀조차, 서부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으리라.

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부는 그가 본격적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계기가 된 장소라고 할 수 있으니까. 또한 아리에스에게는 일생의 숙원을 해소한 장소일 테고.

“뭔가 짐작가는 게 있으신 건가요?”

“있다마다.”

“정말요?!”

델피나가 놀란 얼굴로 부쩍 거리를 좁혀왔다. 나름 일국의 공주라는 양반이 지나치게 스스럼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칸은 구태여 티 내지 않고 장내의 모두에게 들리도록 알란 왕자의 목적지를 입에 담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당장 서부에 떡하니 있지 않소.”

“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마이아였고, 그다음으로 델피나와 막심이 얼굴을 굳혔다.

“서부 대산맥. 아무래도 그쪽에서 뭔가 터지려는 모양이오.”

*

*

*

서부 대산맥과 인접한 네카르 산을 코앞에 둔 도시 노르딕.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네카르 산에서 나오는 마물의 부산물로 부양되고 있는 그 기형적인 도시는 최근 큰 혼란을 겪었다.

왕국 내에서 악명이 높은 흑마법사 다르킨 페레야스가 네카르 산에 은신처를 둔 것도 모자라서, 도시 내의 주요 인사들이 다르킨과 내통하여 불법적인 인체 시술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탓이었다.

하물며 도시의 시장보다 명망이 높았던 수도원 부원장 노만마저 타락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마당에, 저택에 틀어박혀 향락에 취한 채 업무를 내팽개친 시장이라고 횡액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사태에 책임을 지고 시장직에서 물러난 그를 대신해, 알란 왕자는 국왕과 왕세자의 부재를 틈타 본인을 지지하는 귀족을 자리에 앉혔다.

당연히 왕자의 외척인 요르투스 후작가가 운용하는 상단의 영향력이 노르딕을 순식간에 잠식했고, 상단 측에선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노르딕의 새 시장을 움직여 하나의 사업을 시작했으니.

‘서부 대산맥 개척 사업.’

지금껏 정복하지 못한 서부 대산맥의 개척을 통해, 마물 소재 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골조의 사업.

네카르 산의 심부로는 얼씬도 안 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하루를 연명하던 노르딕의 용병들은 금새 반발했다. 심부의 마물이 남긴 공포가 그들 마음속에 깊숙히 각인된 탓이었다.

그에 요르투스 후작가는 또 하나의 방안을 냈다.

‘개척 성과에 따라 추가 보수를 지급하고, 경우에 따라선 후작가의 사병으로 용병대 전체를 고용하겠다.’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그렇게 하나둘 개척에 나서는 용병대가 늘어났다. 그들은 개척 성과를 용병조합이 아닌 요르투스 후작가에 직접 보고하기 시작했고, 후작가는 기대했던 대로 노르딕을 완전히 그들 영향력 아래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후작가만 이득을 본 셈이지. 미개척지는 곧 기회가 넘쳐난다는 뜻이고, 요르투스 후작가는 그 기회들을 돈으로 독점한 거니까. 그리고 이것들 모두가 지나가는 야만인이 다르킨 페레야스를 족친 탓에 생겨난 여파요.”

“뭐 어쩌라고.”

“딱히. 그냥 당신이 떠나간 이후 도시의 상황을 알려드린 것뿐이오.”

여전히 왕실의 인장이 찍힌 갑옷으로 위장한 레븐이 피식 웃었다. 녀석은 말에 탄 상태로도 긴 설명을 이어나가는 데에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 막힘이 없었다.

“어쨌거나. 알란 왕자의 목적지가 노르딕이란 걸 단번에 간파한 부분은 나조차도 조금 놀랐소. 그게 도시의 내밀한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라는 것도 놀랍고.”

“흰소리는.”

레븐은 진심으로 칸의 두뇌에 감탄했다.

하지만 칸은 자신의 머리가 그다지 똑똑한 편이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발상을 쉬이 도출해내고, 부족한 정보로 정답을 찾아내는 건 전적으로 게임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 덕분이니까.

이번에도 그렇다.

‘네카르 산 심부를 공략한 경험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 바로 나니까. 바로 네카르 산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뿐이지.’

“당장 중요한 건 하나다. 알란 왕자보다 먼저 노르딕에 도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알란 왕자가 노리는 ‘무언가’가 터지기 전에 먼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가. 맞죠?”

“맞소.”

그녀의 물음에 칸이 수긍하자, 델피나의 두 눈에 결연한 의지가 맺힌다.

“알란이라면 도시가 반쯤 망가지고 나서야 나설 거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알란보다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소. 약속한 보상만 제대로 내어주신다면.”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 이름을 걸고, 어떻게든 왕실의 보물고를 열어드릴 테니까요.”

그래, 이쪽은 시원해서 좋군.

알란과 다르게 확실하게 보상을 약속하는 델피나의 모습에 만족스레 웃은 칸이 자신의 무게 때문에 금새 헐떡이기 시작한 말을 다독이며 중얼거렸다.

‘개인적으로, 그 싸가지 없는 놈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하고.’

*

*

*

국왕과 왕세자, 델피나 공주의 우호 세력을 통해 말을 몇 번이나 교체하고 잠까지 줄여가며 달린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는지. 다행히 칸 일행이 노르딕에 도착했을 시점에 알란 왕자의 병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정보를 은닉하기 위해 십수 갈래로 찢은 병력이 우회하면서 노르딕으로 향하는 까닭에 시간이 지체됐고, 남서부에서 직선 방향으로 쭉 전진한 일행이 알란을 앞지른 것이리라.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늦은 것같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고 있소. 쬐끄만 양반.”

“…작지 않아.”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닙니다…!”

멋드러진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린 레오가 본인의 검과 방패를 꺼내들며 외쳤다.

그가 말한 대로다.

쾅───!!

콰드득. 콰직!

사람들의 비명과 건물이 무너지며 내는 소리, 창칼 따위가 어지럽게 부딪치는 전장의 소음이 높다란 성벽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알란 왕자가 노렸던 ‘무언가’가 활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 무언가는 높은 확률로 아룡이거나, 심부의 마물일 테고.’

말에서 내린 칸이 익숙하게 도끼와 마검을 양손에 집어들었다.

“시가전이 될 거다. 말은 버리고, 최대한 일직선으로 길을 뚫어. 걸리적거리면 용병이고, 마물이고, 신경쓰지 말고 전부 치워버리고. 늦장부리면 피해만 커진다.”

“나는 공주님을 지키도록 하겠네. 그래야 자네들도 싸움에 집중할 수 있을 테지.”

“마음대로 하시오.”

“나! 전투다─!”

눈앞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피가 끓었는지, 파샨투가 흑색의 손도끼를 휘두르며 길을 뚫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사람을 쫓아 뛰쳐나온 마물들을 엄청난 속도로 쪼개버리는 야만전사의 등장에 이목이 쏠린다.

특히 야만인에게 호되게 당한 적 있는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고, 골통 분쇄기다!”

“임마. 골통 분쇄기는 남자잖아!”

“시벌. 저게 어딜 봐서 여자야?! 덩치를 보라고!”

저 새끼들은 아직도 저 별명을 쓰네.

오랜만에 듣는 흉흉한 별명에 얼굴을 찡그리던 칸의 고개가 문득 돌아갔다.

“형님! 조금만 버티쇼!”

“으어…. 울렁거린다. 이 녀석들아!”

“그러니까 살 좀 빼라 했잖수!”

“이 다리로 어떻게 살을 빼라고!”

머리가 빠지다 만 못생긴 남자를 대머리 둘이서 힘겹게 부축하며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 엿 같은 세계에선 드물게 눈물겨운 우애의 형제다. 문제는 도시를 습격한 마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중이라는 것.

안 그래도 쉽게 잊기 힘든 못난 얼굴. 거기에 절름발이라는 특징까지 더해지니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들었다. 다리 하나를 병신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 아니었던가.

“쯧.”

짧게 혀를 찬 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못난이 삼형제의 뒤로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삼형제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느라 뒤쪽의 상황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했고-.

“키엑─.”

“닥쳐.”

먹잇감이 늘어난 것에 포효하던 마물의 머리가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성벽까지 날아가 터졌다.

“으헉! 이게 누구야…!”

“미친! 골통 분쇄기다!”

“시끄럽다.”

그제서야 자기들이 마물 먹이가 될 뻔한 사실을 알아차린 삼형제가 뒤를 돌아봤다가, 칸의 얼굴을 보곤 숫제 발작을 일으켰다.

“그, 그쪽이 여기는 어떻게…? 아니, 괜한 걸 물었군.”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한 삼형제의 맏이인 절름발이가 고개를 저었다.

“심부를 탐색하니, 뭐니, 하던 양반이니 저 괴물을 족치러 오신 거겠지. 시기를 어떻게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실수한 거요. 지금 나타난 놈은 어떻게 해볼 만한 놈이…….”

쾅──!

“뭐?”

성벽에서 뛰어내린 집채만 한 마물을, 돌아보지도 않고 후려쳐 날려버린 칸.

압도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인 괴력과 감각에 할 말을 잃은 삼형제의 맏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쪽도 괴물이었군…….

“……네카르 산 방향의 성벽을 부순 건 심부의 마물이었소. 이제까지는 본 적도 없고, 대체 어떻게 그 큰 덩치를 감추고 살았는지 의문이 드는 거대한 놈이었지.”

“직접 봤나?”

“봤지. 눈이 병신인 게 아니라면 볼 수밖에 없었어. 대가리가 여럿 달린 거대한 뱀을… 어떻게 못 볼 수가 있겠나?”

“머리가 여럿 달린 뱀?”

“그래, 믿기 힘들겠지. 건물보다 덩치가 큰 데다가 대가리가 여러 개인 뱀이라니. 마녀의 실험체가 아니고서야 그런 끔찍한 생물이 존재할 수는…….”

이런 시발.

절름발이의 말을 끊고서 욕지거리를 내뱉은 칸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성벽. 아니, 성벽 너머를 향했다.

‘…엿 됐군.’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949-224-9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