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125화 (125/132)

#125화. 왕가의 핏줄 (7)

히드라.

게임이건, 소설이건, 판타지라면 매체를 불문하고 자주 등장하는 괴물. 또한, 제5막의 다르킨 토벌전에서 낮은 확률로 마주치는 최악의 중간보스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놈을 상대하는 데 소모되는 자원이 어마무시한 까닭이었다.

제5막의 마지막.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플레이어 캐릭터조차 단숨에 녹여버리는 극독, 어지간한 근력 스탯으로는 비빌 수도 없는 괴력과 덩치, 그리고 트롤은 우습게 보일 정도의 급속재생까지.

언뜻 보면 이전에 사냥한 바실리스크와 비슷하지 않나? 그렇게 무시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히드라의 진짜 무서움은 다른 게 아니다.

콰과광──!!

성문을 넘기 무섭게 거리에 즐비한 건물들 위로 꿈틀대는 뱀의 ‘대가리들이’ 보인다.

저것이다.

저것이 히드라를 재앙으로 분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다.

대가리의 개수만큼 목숨이 존재하는 셈이나 다름없고, 모든 머리를 동시에 제거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재생하고 마는 재생력을 지녔으며, 상처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피에 닿기만 해도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만 하는 혈독을 품었다.

거기에 이제껏 상대한 바실리스크나 와이번 같은 아룡들은 갓난아이처럼 보이게 만드는 압도적인 체구까지.

사실상 지금이 메인 퀘스트의 제2막 시기인 걸 감안하면 마주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괴물이다. 만약 지금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상황이었다? 아마 주저하지 않고 도주를 선택했을 터.

그러나 이건 현실이다.

‘루트가 조금 꼬였다고 속 편하게 캐릭터를 삭제하고 리겜이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 어떤 망겜보다도 현실이 더 시궁창인 법 아니겠는가.

“머리가 여섯 개…? 설마 저 머리를 전부…!”

“그나마 다행인 줄로 아시오. 공주.”

과연 머리가 잘 돌아가는 공주님답게 히드라의 공략법을 단번에 꿰뚫은 델피나가 경악했다. 거기에 대고 옅은 미소와 함께 찬물을 끼얹은 칸이 마검…. 아니, 용살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나마 저게 덜 자란 놈이니까.”

경악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칸이 거칠게 땅을 박찼다.

일단 뱀처럼 생겨서 그런 건지, 히드라도 ‘미들랜드 퀘스트’의 세계관에선 아룡으로 분류되어 마물을 조종했다. 그 결과 노르딕 내부는 이미 마물 반 사람 반에 가까운 상황. 아마 제 역량이 닿는 선에서 네카르 산의 마물을 모조리 끌고 나온 것일 터.

‘거기에 휩쓸린 놈들도 있을 거고.’

대충 육감을 통해 느껴지는 강대한 기척만 두셋이다. 히드라와 같은 심부의 마물도 그 정도 넘어왔다고 봐야겠지. 예전에 론의 입에서 들었듯, 한 마리만으로도 기백의 용병을 학살해버리는 괴물들이 말이다.

“공! 길을 뚫겠습니다!”

“뒤에 있어.”

칸의 전력을 최대한 온존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두 명의 성기사가 빠르게 튀어나갔다. 신성력을 터뜨리며 나아가는 크고 작은 흰 덩어리들은 그야말로 ‘도발 탱킹’의 정석이었다.

맞서 싸우는 용병은 물론이고, 집에 숨어든 인간까지 건물을 부숴가며 씹어 삼키던 마물들의 눈이 훽- 돌아간다. 오히려 길을 뚫기보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나섰다는 생각이 들 정도.

노르딕의 거리를 가득 채운 수십, 수백의 마물들이 눈이 부실 정도의 광채를 거대한 몸으로 뒤덮기 시작하자, 아리에스와 레오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일행들 중 누구도 그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어중간한 발톱과 이빨로는 성기사의 방벽에 흠집조차 낼 수 없음이라. 하물며 그 정체가 미래의 재앙이 될 예정인 레오와 정의의 신의 사도로 내정된 아리에스였으니.

콰드드득──!!

순백의 구체와 흉측한 마물들이 부딪칠 때마다, 짓이겨지고 터지는 건 마물들이었다. 군마에 올라탄 기사의 랜스 차징을 아득히 상회하는 돌파력으로, 수십 배가 넘는 숫자를 충돌하는 족족 분쇄했다.

“케헤헤헥…!”

‘나 센 놈이오.’라고 광고하는 듯한 상판대기를 가진 마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때였다. 직전에 느낀 강대한 기척의 주인이기도 했고, 칸이 무심코 도끼를 내던지려는 반응을 내비칠 만큼 실제로도 꽤 강한 마물의 등장.

그러나 칸의 도끼가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펑─!

갑작스러운 등장과 같이, 갑작스러운 퇴장이었다. 마물의 정신이 성기사가 뿜어대는 광채에 온통 쏠린 틈을 타, 마이아가 ‘요룬의 창’에 지금껏 아룡을 상대하며 저장한 충격을 마물의 몸통에 쑤셔 넣어 일격에 폭사시켜버린 것.

비록 무기의 성능으로 이룩해낸 결과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마이아의 전과를 폄하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오만한 그녀였다면 어떻게든 히드라의 머리통이라도 날려버리려 기회를 노렸을 테니까.

그러나 칸을 만나고, 그와 함께 온갖 지옥 같은 전장을 누비며 그녀도 성장이란 걸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또한, 타고난 성정을 극복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이라 할 수 있을 터.

“주군. 달리십시오!”

그렇게 외치는 마이아의 모습이 제법 믿음직해 보였다. 그녀가 가진 특이한 괴벽을 아주 잠깐이나마 잊게 할 만큼.

‘엄청나…!’

가장 후미에서 막심의 보호를 받으며 뒤따르며, 칸 일행의 전투를 모두 지켜본 델피나가 감탄을 터뜨렸다.

저들이 단기간에 아룡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다시피 한 강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싸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실제로 저들의 강함이 어떨지는 상상과 추측의 영역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하물며 왕성을 수호하는 최정예들 사이에서 자라온 그녀였기에, 강함의 기준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하나가 로열가드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도……!’

생각한 대로. 아니,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로 강하다.

제국의 총본산에서 길러지는 성기사들은 수가 적은 만큼 평균적인 무력이 상당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가 스물 초반도 넘기지 않는 어린 성기사들의 강함이 왕국의 로열가드를 상회해?

제국과 변방 왕국의 차이가 그리도 어마어마하다는 건가?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찔함에 현기증이라도 느꼈을 정도의 아득함이었다.

더 믿기 힘든 사실은, 왕국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여식이 범인의 몸으로 저런 괴물들 사이에서 합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심부의 마물 하나를 일격에 즉사시키지 않았던가.

‘저런 천재가 왕국의 기사가 되어 주었다면…….’

물론 마이아는 델피나가 생각하는 만큼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아리에스와 함께 두 마리의 아룡을 격살하며 저장한 충격을 일거에 소모해 방금처럼 싸우는 건 불가능하단 사실을 모르기에 한 착각이었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왕국이 놓쳐버린 엄청난 천재’로 마이아가 델피나 공주에게 눈도장을 찍는 사이.

“공주님! 더 가시면 위험합니다!”

어느새 히드라에 의해 실시간으로 난장판이 되어가는 노르딕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 시장의 저택까지 돌파에 성공한 일행이었다.

델피나는 제 앞을 가로막는 막심을 따라 걸음을 멈추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저토록 강한 이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보내는 칸은 또 얼마나 강할 것인가?

‘혹시,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얼마나 헛된 기대였는지도, 바로 직후에 느꼈다.

콰과과과광──!!!

그저 거대한 머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대저택의 절반이 통째로 무너진다. 그리고 여섯 개의 머리가 달라붙은 몸통을 밀어붙여, 나머지 절반을 통째로 짓뭉갠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수 초.

저런 괴물을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상처라도 낼 수는 있을까? 아룡 특유의 저 두꺼운 비늘을 뚫고, 여섯 개나 되는 머리를 모두 제거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델피나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절망 앞에서, 주춤 뒷걸음질 쳤다.

‘안 돼…!’

야만전사들은 모두가 뛰어난 전사이다. 흑익공의 대전사인 파샨투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전사인지 배운 그녀였다.

또한, 그토록 강한 동료들이 맹목적으로 믿는 칸의 강함이란 분명 파샨투의 이상일 터.

‘하지만 이건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존재하는 법이다. 만약 칸의 강함이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진짜배기 초인들과 동일 선상이라면 또 모르겠지.

그러나 칸은 서릿골의 야만인이다.

인간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게 해주는 마나의 축복을 타고나지 못한…. 타고난 육체의 강함이 인간을 능가할지언정, 타고난 가능성의 천장은 인간보다도 한없이 낮은 열등종이란 말이다.

‘상대가 너무 나빠…!’

범인을 아득히 넘어서는 야만전사의 괴력? 타고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감각? 공포를 모르는 투지? 그런 건 비슷한 체급의 상대에게나 통용되는 법 아닌가? 성벽과 비교해도 될 만큼 압도적인 체급의 괴물에게, 저런 요소들이 과연 통하기나 할까?

델피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고, 공주님…?!”

흔히 볼 수 없는 델피나의 좌절한 모습에 호위 기사인 막심이 당황했다. 하지만 막심의 생각과 달리, 델피나가 절망에 빠진 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래요. 이건, 처음부터 알란을 막기 위해 시작한 내 독단적인 행동이었죠.’

델피나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깃들었다.

그녀는 아르곤의 핏줄을 타고난 이들에겐 금기나 다름없는 혈통의 힘을 일깨울 작정이었다.

매우 짙은 혈통을 타고난 그녀의 오라비나 배다른 남매인 알란과 달리, 아주 옅은 피를 타고난 델피나여도 목숨을 건다면 충분히-!

“다들 비 조심해라.”

“……비요?”

나지막한 속삭임인데도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칸의 경고에, 상념을 끊고 고개를 든 델피나의 얼굴이 몇 번째인지 모를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칸이 경고한 ‘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급히 머리 위로 불꽃의 장막을 피워올렸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올라탄 건지, 히드라의 머리통 위에 우뚝 선 칸이 검을 높게 치켜들고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델피나가 입까지 쩍- 벌려가며 경악하지는 않았으리라.

‘저 검은 뭐야…?!’

마나도 아니고, 오러도 아니고, 신성력도 아니다.

그저 한없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붉은 기운. 그걸로 검신을 두껍게 감싼 마검을 본 순간, 델피나는 히드라를 마주한 순간보다 더 큰 공포에 휩싸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저 붉은 마검은 히드라의 천적이다. 아니, 어쩌면 용의 계통에 속한 모든 것들에게…!

“────!”

델피나와 마찬가지로 붉은 마검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히드라가 포효를 터뜨렸고, 다른 머리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칸을 집어삼키려 했다. 하지만-.

[바람 정령의 가호가 깃든 브로치]

일찍이 마이아가 암시장에서 ‘모르탈리아의 공절 보옥’과 함께 입수한 브로치의 버프를 발동한 칸이 더 빨랐다.

용살검이 그려내는 붉은 궤적이 히드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훑고, 칸의 신형이 아래로 낙하함과 동시에.

파아아악!

머리를 잃은 히드라의 목이 세차게 뿜어대는 피분수가 노르딕의 땅 위를 적시기 시작했다.

*

*

*

[용살검 드라우프니르]

─용의 원념이 서려있는 마검. 현재 여러 개의 분신으로 나뉘어져 본 성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new!)공허의 힘을 흡수한 원념이 힘을 회복했습니다. ‘용살의 저주’가 개방됩니다.

─(new!)용살의 저주 :: 용(龍) 계통의 적을 상대로 추가 피해가 적용됩니다.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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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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