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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26화 (126/132)

#126화. 왕가의 핏줄 (8)

히드라의 피는 그 자체로 초인조차 중독시키는 극독이다. 게다가 산성까지 품었는지, 건물과 땅에 피분수가 튈 때마다 치이익- 녹는 소리를 냈다.

“그에에엑!”

제각기 대가리들은 통각을 공유하는 듯했다. 멀쩡한 다섯 개의 머리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직접 잘라낸 머리를 짓밟아 터뜨린 칸이 재차 쇄도했다.

[바람 정령의 가호가 깃든 브로치]

─바람 정령의 애정을 얻어보세요. 정령의 가호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사뭇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설명창, 그에 반해 브로치의 성능은 그야말로 걸출하단 표현이 모자랄 정도였다.

이전보다 힘을 덜 들여도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고, 공격할 때의 움직임에도 미세한 가속이 붙는다. 물론 사소한 차이라 할 수 있는 정도지만, 칸의 수준을 생각하면 그 사소한 차이가 결정적인 요소를 판가름하기엔 충분한 바.

어느새 공명하듯 지르던 비명을 멈춘 히드라의 공격을 한발 먼저 회피한 칸의 검격이 커다란 몸통을 스치듯 관통했다.

성벽에 비견되는 덩치를 생각하면 작은 흠집이라 봐도 될 상처지만, 그 상처를 낸 무기가 ‘용살검 드라우프니르’였다.

[이제 좀 잠이 깨는 기분이로구나.]

어쩐지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비몽사몽한 말투.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날, 마경을 토벌한 직후부터 원념은 반쯤 잠에 취한 사람처럼 제대로 의사를 표현하지도 못했으니까. 검신을 진동시켜 투정을 부리는 것도,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마경에 들어설 때부터 상태가 영 좋지 않았거늘. 이렇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렇게 꽤 긴 시간 잠에 들었다 깨어난 원념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본신에서 강제로 뜯겨져 나가며 훼손되었던 부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미 상실당한 영혼의 일부가 자생하듯 회복되다니. 이 몸의 상식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그렇게 말한 원념은 스스로의 성장을 자랑이라도 하듯 ‘용살의 저주’를 개방했다. 그게 히드라의 머리 위에 올라탄 시점에 있었던 일이었다.

[흠. 그나저나, 이 몸이 회복하는 사이 네놈은 더 강해졌구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몸뚱어리로다.]

묘하게 건방져진 말투야 어쨌건, 원념의 말은 크게 틀린 구석이 없었다. 녀석이 제정신으로 본 마지막 전투는 알파와의 전투였고, 그 이후로 두 번의 레벨업과 장비의 스펙업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의 성장은, 체력 스탯의 폭발적인 성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체력 : 38] +9

북부에서의 전리품으로 획득한 ‘근면성실한 드워프의 팔목보호대’와 ‘늙은 트롤의 가죽신’으로 상승한 체력이 3. 거기에 탐욕의 그릇과 ‘오우거의 낭심가리개’에서 획득한 추가 체력이 6. 합해서 9의 추가 체력이 붙었다.

총 체력 47.

포신의 내구도가 약한 탓에 최고의 폭약을 가지고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던 유리대포가, 이제는 십수 발을 쏴도 포신이 녹지 않는 강철대포로 변한 셈.

체력의 상승으로 인한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예전보다 더 효율적이야.’

비단 바람 정령의 가호 때문만이 아니라, 육체가 더욱 단단해진 만큼 이 넘쳐나는 괴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아우굴라베스와의 전투 때도 지금과 같은 스펙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몸뚱어리를 효율적으로 굴리지를 못했다.

‘지금은 아니지.’

[안타레우스류 비전 검술(B) - 76%]

지금껏 익힌 스킬들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A등급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스킬.

원념이 선심 쓰듯 전수한 안타레우스류 검술이 완전히 몸에 달라붙었다.

물론 ‘사실 삼십 대 배불뚝이 회사원이었던 내가 알고 보니 무술 천재?’라는 어디서 본 듯한 설정이 숨겨져 있던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몸뚱어리가 타고난 재능이라 봐야겠지.

촤아아악──!

거대한 머리통을 공성추 삼아 내던진 히드라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직후, 그대로 검을 내리쳐 잘라내자 시끄러운 비명이 골통을 뒤흔들어댔다. 그에 칸은 잠깐 미간을 찌푸릴 뿐. 쉬지 않고 다음 동작을 이어나갔다.

난리통에 기둥만 겨우 남은 건물을 타고 뛰어, 단숨에 히드라의 몸통에 올라탔다. 그다음, 능숙한 솜씨로 튀어나온 비늘을 발판삼아 머리 꼭대기를 즈려밟고 섰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

“케에엑─!”

그러나 히드라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예 머리통과 칸을 통째로 씹어 삼켜 확실하게 끝장낼 작정인 듯, 다른 머리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목숨 하나를 소모해 가장 까다로운 적을 제거하겠다는 필사의 공격. 그에 칸은 기다렸다- 말하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쯔거어어억──!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한 히드라의 비늘이, 용살의 저주와 맞물려 부드럽게 잘려나간다. 그렇게 머리가 정확히 위아래로 양분되고, 잘려나간 윗머리가 한참 허공을 유영하다 아래로 처박혔다.

쾅!

그렇게 턱만 남은 대가리가 칸이 올라탄 히드라의 머리와 충돌했다. 통각에 움찔대다 그 충격에 정신을 차린 놈이 머리를 똑바로 세워 칸을 떨어뜨리려 하자, 칸은 망설이지 않고 뛰었다.

발판으로 삼았던 비늘에 드라우프니르를 박아넣은 채로.

콰드드드드득!

인간으로 치면 정수리와 척추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검상을 입은 셈이었다.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또 하나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제 둘이다.”

순식간에 네 개의 머리를 처리한 칸이 순백의 방패를 우산처럼 펼치며 말했다.

설마 말뜻을 알아먹은 건 아닐 테고, 히드라의 남은 머리들이 눈을 끔뻑거리더니 뒤로 도망을 쳐버렸다. 방금까지 아르곤 전역을 멸망시킬 기세로 날뛰던 놈이, 피를 줄줄 흘리며 도망치는 광경에 사람들이 벙쪘다.

그러나 서릿골의 전사들은 다잡은 사냥감을 놔주는 법이 없었으니.

[거대한 짐승이로구나! 조카야─!]

성문에서 마주친 마물들과 미친 듯이 치고받던 파샨투의 등장.

마치 거대한 회색의 늑대가 건물들 틈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칸이 그랬던 것처럼 건물의 외벽을 즈려밟으며 도약한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비늘을 붙잡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그 커다란 덩치에 사람 하나 무게가 더해졌다고 도주가 늦춰질 일이 있겠냐마는. 파샨투는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히드라를 멈춰 세웠다.

쩌억! 쩌억! 쩌억!

암벽등반을 하는 클라이머처럼, 흑색의 도끼를 박아넣으며 대가리로 기어 올라오는 인간의 존재를 언제까지고 방치할 수는 없음이라. 네카르 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던 히드라가 휘청- 몸을 비틀어 건물을 들이박았다.

“파샨투…!”

델피나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졌다. 칸의 놀라운 무력에 홀린 듯 전투를 관망하다가, 그녀의 대부가 빌려준 대전사가 크게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

“나설 필요 없소.”

“네? 하지만….”

“고작 저 정도로 다칠 양반이었으면, 서릿골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요.”

“그게 무슨….”

서릿골이 무슨 인세의 지옥이라도 되는 건가요? 이해할 수 없는 믿음에 입만 끔뻑대던 델피나가 이어서 탄성을 터뜨렸다.

“파샨투!”

“정신! 번─쩍─!”

파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재차 모습을 드러낸 파샨투는 전신이 피범벅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히드라의 몸통에 박아넣은 도끼를 놓치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다.

‘하여간, 명줄 하나는 더럽게 질긴 족속이라니까.’

칸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도끼를 움켜쥐었다.

처음 히드라를 상대할 땐 어쩌나 싶었지만, 게임에서 등장한 대가리 아홉 개의 히드라가 아니어서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물론 그게 히드라가 약하단 의미는 아니었다.

디에고의 서신이 없었더라면 노르딕을 포함한 인근 도시들은 쑥대밭이 되었을 테니까. 알란 왕자는 그때쯤에 느지막이 나타나 히드라를 토벌하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아니었다면 오늘 서부는 더 이상 서부가 아닌, 마물의 영역이 되었을 거다!”라고 말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방파제 역할을 하던 노르딕이 멸망한 순간부터 동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마물의 위협으로부터 훤히 노출되는 셈이니. 사람들은 왕국 전역을 마물로부터 구한 영웅 취급을 받게 됐을 터.

‘로열가드를 그렇게 거느린 놈이니, 지지세력의 기사들까지 더해지면 대가리 여섯 개 달린 히드라 정도야 잡기는 했을 테고.’

그걸 아니까 노르딕이 무너지리란 걸 알고도 방치한 것 아니겠는가.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는 하다마는….

[어서 숨통을 끊지 않고 무어 하느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원념의 재촉에 검신을 손으로 퉁겨 화답한 칸이 도끼를 투척하려 했다. A등급 스킬이 된 용아포를 쓰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힘이라면 머리통 하나쯤은 충분히 날릴 수 있으리란 견적이 잡혔다.

나머지 하나 정도야 히드라의 뒤에 따라붙은 아리에스 혼자서도 자를 수 있겠지. 나머지 상처는 전보다 강해진 원념의 사기(邪氣) 때문에 재생이 늦춰지고 있고-.

“이 소리는……?”

우뚝.

투척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에 델피나가 무슨 일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기 무섭게, 뒤쪽에서 터진 함성에 깜짝 놀란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우와아아아──!!”

“도시를 구원해라!”

“우리는 알란 왕자의 군세다─!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우리의 깃발 아래에 모여라!”

델피나는 경악을 감추지 않았다.

히드라가 노르딕과 인근 도시를 모조리 박살 낼 때까지 늑장을 부리다 나타나서 영웅 행세나 할 줄 알았던 알란 왕자가 생각보다 일찍 모습을 드러낸 것. 더 놀라운 점은, 왕자 본인이 직접 선두에 가까운 위치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외양과 삐까뻔쩍한 무장, 그리고 직접 손에 피를 묻혀가며 사람들을 구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영웅적인 왕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노르딕이 망가지기 전에 사태를 수습하면 효과가 극적이지 않을 텐데? 설마 진심으로 히드라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는 거야?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으면 히드라가 날뛰기 전에 나서는 게 정상 아닌가…?’

델피나는 자신의 이복 남매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내 만신창이가 된 히드라를 발견한 알란 왕자가 눈을 까뒤집고 악을 써대기 시작하자, 고민은 확신으로 기울었다.

“저 빌어먹을 것들이! 또 내 사냥감을 가로채……!”

“와, 왕자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놔라─! 저기 내 사냥감을 눈앞에서 빼앗는 도둑놈들이 있지 않느냐!”

대체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건지, 호리호리한 체구의 왕자가 십수 명의 장정을 뿌리치며 달려드는 광경은 사뭇 섬뜩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덤벼드는 마물까지 일격에 썰어대는 모습엔, 칸이 눈을 크게 뜨고 반응할 정도였으니.

[멍청한 놈이로구나. 주제도 모르고, 분에 넘치는 힘을 일깨웠어.]

원념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되물으려던 칸이 심장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열감에 흠칫하며, 털가죽 모피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열기의 정체는 호심갑의 용도로 심장에 대고 있던 용의 비늘조각이었다. 지금까지 드라우프니르를 놀리는 용도가 아니면 써먹지 못하던 애물단지.

‘갑자기 뭔…….’

기현상은 용의 비늘조각이 뜨거워진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챙그렁!

이쪽을 향해 미친놈처럼 돌진하던 알란 왕자가 손에 쥔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고, 이내 그의 몸에서 우드득!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조짐에, 칸은 방향을 틀어 알란 왕자의 머리통을 향해 도끼를 투척했다. 그 돌발행동에 놀란 막심과 델피나가 그를 막으려 했으나, 이미 도끼는 손을 떠난 뒤였고-.

콰득. 콰드득.

“감히…. 왕실의 핏줄을 공격하다니.”

입속에 틀어박힌 도끼를, 아무렇지 않게 씹어서 부숴버린 알란 왕자가 파충류의 그것을 닮은 눈동자를 세로로 주욱- 찢으며 웃었다.

“네놈은 여기서 즉결처형이다. 야만인.”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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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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