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왕가의 핏줄 (9)
칸이 황당하단 얼굴로 도끼를 잃고 허전해진 손을 쥐락펴락했다. 어째 도끼는 쓸 때마다 부숴먹는 기분인데.
이번 일이 끝나면 제롬에게 재촉하는 서신을 하나 써야겠다 다짐하며, 변화를 끝마친 알란 왕자를 마주했다.
‘닮았군.’
네카르 산에서 마주친 다르킨 페레야스. 녀석과 비슷한 용인(龍人)의 모습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사령술의 대가인 다르킨이 뼈로 만든 날개와 꼬리를 달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알란의 경우 날개와 꼬리가 돋아나진 않았다.
대신 칸 자신과 비슷한 정도로까지 덩치가 커졌다. 그리고 기존의 호리호리한 체형은 그대로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빼곡하게 뒤덮은 비늘 탓에 조금 기괴했다.
“아, 알란…….”
“델피나. 이 건방진 년아. 혈통조차 제대로 잇지 못한 반푼이가 감히 날 방해하려고 저따위 것들과 손을 잡은 것이냐? 왕실의 수치 같으니라고.”
알란의 목소리는 여전히 변이하기 전과 똑같았다. 만신창이가 된 히드라를 보고 눈을 까뒤집었을 때보다 더 차분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감정의 변화가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보와 들쑥날쑥한 정신 상태는 물론이고, 칸이 소유한 용의 비늘조각이 반응한 것까지.
‘구린내가 좀 나는데.’
칸은 다르킨에게 용의 비늘조각을 건넨 미지의 존재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에도…….
“그리고 너 야만인. 감히 내 자비로운 제안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서, 훼방을 놓아? 이 아르곤 땅에서 내게 거역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도 그런 거라면…. 이 자리에서 처형해도 억울함은 없으렸다.”
“지랄. 누가 보면 벌써 왕이라도 된 줄 알겠군.”
“왕이라. 머지않아 그렇게 될 예정이었지. 국정을 오래도록 방치한 폐하와 왕세자를 대신해, 이 아르곤을 이끌어나갈 인물이 나 외에 또 누가 있을까? 기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연스레 섭정에 오를 예정이었다, 이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 왕성을 벗어났건만. 너, 오만한 네놈이 모두 망쳤다는 말이다.”
알란의 뱀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아니, 이제 와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네놈이 내 존체에 손을 댔다는 것이 중요하지.”
“뱀새끼로 변한 몸뚱어리도 존체로 쳐주나?”
“뱀? 이건 위대한 피의 흔적이다. 그 옛날의 찬탈왕이 그러셨듯이!”
비늘로 뒤덮인 육체를 자랑하듯 두 팔을 벌린 알란이 씨익 웃었다. 입가를 뒤덮은 비늘이 벌어지고, 인간의 구강구조와 완전히 달라진 날카로운 이빨들이 훤히 드러났다. 희귀 등급의 도끼를 단숨에 박살 낸 용아(龍牙)가 예기로 번쩍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려주자면. 난 처음부터 네놈을 찢어죽이고 싶었다. 그 오만하고 건방진 무표정을. 고통으로 일그러지게 하고 싶었단 말이야.”
“그거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군.”
마침, 나도 왕족의 머리를 쪼개보고 싶었거든. 중얼거리는 말소리보다 먼저 붉은 검날이 알란이 있던 자리에 틀어박혔다. 쾅─!
도약과 바람 정령의 축복의 가속이 더해졌다. 알란의 변화에 벙쪄 있던 로열가드들은 물론이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델피나와 막심조차 칸의 검격이 바닥을 긁는 순간에야 반응을 내비쳤다.
그리고 알란은….
“기습이라니. 미개한 야만인다운 방법이로구나.”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유유히 나타나 칸을 조롱했다. 적어도 아리에스 수준은 되어야 반응했을 법한 기습을, 너무나도 쉽게 회피한 것이다.
칸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거의 즉흥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기습이었다. 그 누구도 왕족을 대놓고 썰어버릴 거라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알란은 칸이 도약을 쓰는 시점부터, 검을 내리찍는 그 순간까지의 모든 동작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뒤로 물러났다.
‘뱀눈깔에 뭐가 있기는 있군.’
적어도 민첩 스탯에선 자신과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최소 50은 넘길 것이고,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근력과 체력은 부딪쳐봐야 알겠지만… 아우굴라베스의 의식체와 전투에서도 나름 버틴 희귀급 도끼를 작살낸 놈의 이빨은 거의 즉사 패턴에 가깝다고 봐야만 한다.
“저, 전하! 물러나소서!”
그때 알란을 호위하는 로열가드들이 녀석과 칸의 사이를 가로막듯 도열했다.
“대단한 충성심이군. 저 꼬라지를 보고도 전하 소리가 나오나?”
“닥쳐라! 야만인!”
칸의 비아냥에 대표로 나선 것은 이전에도 부딪친 적이 있는 아드리안이었다.
“모습이 어쨌건, 전하께선 아르곤의 왕자시며 차기 계승권의 적법한 주인이시다! 로열가드는 저 무도한 반역자에게서 왕자님을 호위하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라는 로열가드의 암묵적 합의를 깨뜨리면서까지 알란 왕자를 지지하는 그들이었다. 모습이 조금 변했다고 해서 쉬이 변할 충심이 아니었고, 본인을 위해서라도 그래선 안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퍽!
그들의 충심은 보답받지 못했다.
“어, 어째서……?”
“누가 방해하라고 했지.”
콰직.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후방에서의 기습. 하물며 자기가 지키려던 왕자에게 당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아드리안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심장을 움켜쥔 알란이 손을 거칠게 뽑았다.
털썩.
로열가드 내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이자, 알란의 오른팔과도 같던 이가 바로 아드리안이다.
그런 아드리안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심장을 뽑아 터뜨리는 잔인한 방식으로 죽인 알란을 향한 동요가 로열가드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물러나세요!”
“고, 공주님!”
“저건 더 이상 당신들이 알던 알란이 아니에요!”
“시끄럽다.”
또다시 피가 튀었다. 이번에는 아드리안과 가까이 있던 로열가드 둘의 머리가, 엉망진창이 된 노르딕의 도로 위로 나뒹굴며 으깨지는 소리를 냈다.
더 이상 눈앞의 왕자는 알란이 아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로열가드들의 눈빛에 독기가 어렸다.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고, 틀린 선택이었다.
“커억!”
“끄아아악…!”
용인으로 변한 알란의 속도는 그들의 동체시력으로도 희끄무레하게 비칠 만큼 빨랐다. 잠깐 사이에 로열가드 둘을 더 처리한 알란이 광소를 터뜨렸고, 붉은 마검을 쥔 야만인이 재차 알란과 격돌했다.
쾅──!!
비늘로 뒤덮인 맨손과 붉은 마검의 격돌.
그 결과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동수였다. 드라우프니르의 ‘용살의 저주’는 분명 알란의 손등에 깊은 검상을 냈지만, 알란은 간지럽다는 듯 다른 쪽 손을 휘둘러 칸을 튕겨냈다.
‘묵직하군.’
근력만으로는 자신의 비할 바가 아니나, 그보다 위협적인 건 알란의 압도적인 속도다. 제아무리 은신으로 기척을 죽이고 접근해도, 공격을 가하는 순간에는 이미 알란의 눈이 칸을 포착했다. 거기에 이빨만큼이나 날카로운 손톱은, 마검에 달린 파괴 불가 속성이 아니었다면 대적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쾅! 쾅! 콰가각!
재차 팔다리와 붉은 마검이 뒤엉킨다.
빠르다. 특히 지근거리에서 이어지는 박투전에서, 알란의 속도는 그야말로 반칙에 가까웠다. 그저 닿기만 해도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손톱을 가졌기에 더욱이 그러했다.
턱까지 튀어오른 무릎을 마검의 검면으로 받아낸 칸이 무릎을 굽혀 충격을 버티고, 곧장 주먹을 뻗어 알란의 얼굴을 후려쳤다.
쩌엉─!
튼튼하기로 유명한 트롤이라도 머리가 터져버릴 충격이 고스란히 턱에 꽂혔다. ‘전투 예지’로 찾아낸 틈새를 정확히 비집고 들어간 일격.
‘이런 미친!’
그러나 알란은 멀쩡하게 웃으며, 칸의 손을 오히려 붙잡았다. 그리고는 쇳덩어리조차 분쇄하는 이빨을 드러냈다. 까딱하다간 평생 외팔이 꼴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칸의 선택은 간단했다.
“그렇게 주먹질이 좋으면, 어울려주지.”
붉은 마검을 손에서 놓은 칸이 그대로 주먹을 뻗어 반대쪽 턱을 후려쳤다. 그때까지도 알란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에 대한 칸의 대응은 아까와 같았다.
쩌엉! 쩌엉! 쩌엉! 쩌엉!
바위도 부숴버리는 주먹이 연거푸 쏟아진다.
알란은 그런 주먹을 맞는 와중에도 오로지 칸의 팔을 뜯어먹을 생각만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비늘로 뒤덮인 속알맹이가 뭉개질 정도의 충격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버틸 만하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내린 선택. 어차피 버티다 보면, 제풀에 지쳐 힘이 빠질 거란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쩌엉! 쩌엉! 쩌엉…! 쩌억──!
“크읏?!”
무의식적으로 붙잡은 손을 놓고 물러난 알란의 목소리엔 당혹감이 묻어났다. 후두두- 떨어져 내리는 턱 부분의 비늘이, 그의 눈동자에 어린 경악의 이유를 증명했다.
‘맨주먹으로 내 비늘을 부숴?!’
비늘만 부서진 게 아니었다. 턱을 구성하는 뼈대가 잘못된 건지, 아래턱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다.
“네놈은 뭐냐…!”
“뭐긴, 씹새야.”
주먹 좀 치는 놈이지.
알란이 물러난 만큼, 똑같이 앞으로 전진한 칸이 두 손을 크게 벌린 채 알란을 덮쳤다. 특유의 민첩함으로 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알란이었으나, 칸의 노림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다.
휘리릭.
‘아라크네의 은반지’에서 미리 뿜어낸 침묵로 마검을 회수한 칸이, 이번엔 마검을 그대로 투척했다.
이미 칸의 투척을 멀쩡히 받아낸 바가 있던 알란이었다. 그때처럼 마검을 부숴버릴 생각으로 알란이 손톱을 세운 순간이었다.
‘걸려들었다.’
알란이 마검을 붙든다. 동시에 진각을 밟으며 쇄도한다.
마검을 그대로 반으로 쪼개버리려던 알란의 뱀눈에 당혹이 어린다. 당연하다. 마검에 붙은 파괴 불가 속성은, 초월자 정도가 아니고서야 깨뜨릴 수 없는 ‘설정’이니까. 그를 예상한 칸이 알란의 목덜미를 그대로 낚아챈다.
그제서야 자신이 칸의 노림수에 당했음을 인지한 알란이 입을 쩌억- 벌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대로 이 건방진 야만인의 머리통을 통째로 씹어서 으깨주마!
“멍청한 놈.”
오판의 연속. 알란은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카르투스 박투술은 본디 주먹질이 아니라, 안 그래도 거대한 서릿골의 짐승과 마물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 오히려 질긴 가죽과 단단한 외피를 가진 마물을 상대로 극적인 효과를 보인다는 말이다.
특히나 인간형의 괴물은, 카르투스의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잡고, 나머지 한 손은 알란의 겨드랑이에 밀어넣고서 칸이 빙글-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그대로 굉음과 함께 알란을 바닥에 메다꽂은 칸이 전력을 다해 진각을 밟았다.
꽝──!!
히드라가 벌인 난동에 의해 안 그래도 망가져 있던 도로들이, 칸을 중심으로 역류하듯 튀어오른다. 그 충격을 고스란히 복부로 쏟아낸 칸이 다른 쪽 발로 알란의 어깨를 즈려밟았다.
내장이 다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이었다. 알란은 혼미한 정신으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지만, 회백색의 늑대들은 잡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우드드득─!
“끄아아아악……!”
알란의 입에서 터진 끔찍한 비명에 델피나와 살아남은 로열가드들이 멈칫거렸다. 오른쪽 팔을 생으로 뽑아버린 잔혹함에, 그래도 왕자인데 살려서 데려가야 하는 것 아니냔 말까지 나왔다.
“아직 셋이나 남았다.”
칸은 그런 우려의 목소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번에는 왼쪽 어깨에 발을 올려놓은 그가 다시 팔을 뽑으려 하자, 알란이 발악하듯 외쳤다.
“이, 이 멍청한 놈들…! 네놈들의 주인이 이 꼴이 되었는데도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어서 이 괴물 새끼 좀 치워! 치우라─고──!”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는 반응은 머뭇거림과 냉담한 침묵뿐. 그야 자기 손으로 로열가드를 다섯이나 죽인 왕자였다. 제아무리 충성을 바친 그들이라도, 마음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어쨌거나 그는 아르곤의 왕자니까. 이런 길바닥에서 외부에서 온 야만인의 손에 죽는 게 아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만 왕실의 기강이 바로 선다.
“거기까지면 충분할 거요. 나머지는 왕실의 법에 따라, 그를 사형대로…….”
그런 이유로 살아남은 로열가드 중, 가장 서열이 높은 기사가 나서서 칸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말했을 텐데.”
멈출 거면 시작도 안 했지.
칸은 자신의 경험치를 얌전히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
“처음부터 왕족의 머리를 쪼개보고 싶었다고.”
“자, 잠깐……!”
콰직─!
*
*
*
[레벨 업!]
[레벨 28 -> 29]
[근력 : 66 -> 68] +1
[민첩 : 36 -> 37] +3
[체력 : 38 -> 39] +9
[지능 : 2] -1
[제2막, 용의 흔적이 묻힌 곳]
─실패할 시, 아르곤 왕국의 멸망. 대마경의 침식 가속화. 이후의 시나리오 난이도 증가.
[최소 클리어 조건 달성.]
─용의 흔적, 최초 발견 및 사살 완료.
─(new!)추가 목표물 제거 완료.
─이후 추가 달성률에 따른 보상 변경.
─현재 달성률, 66.6%
─남은 개체 :: ???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949-224-9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