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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28화 (128/132)

#128화. 왕가의 핏줄 (10)

노르딕 붕괴.

왕국 역사를 통틀어 발생한 적이 손에 꼽는 대사건이며, 기록에 남은 역사에서 가장 세가 강했다는 찬탈왕 이후로는 최초로 발생한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아르곤 왕국의 국민들이 받는 충격 또한 엄청났다.

마물들이 언제라도 왕국으로 진출할 교두보가 마련된 셈이니까. 중앙도, 남부도, 북부도 마물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다. 귀가 밝은 이들 중에선 일찌감치 동부로 피신하는 이들도 많았다.

“당연한 반응이지. 왕국의 방파제가 몇백 년 만에 무너졌으니. 문제는……. 거기서 끝이 났어야 한다는 거다.”

“아버지.”

“루시아. 로열가드가 왕위 계승 싸움에 휘말려 죽은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 아니다. 노르딕에 나타난 히드라라는 괴물을 막으려다 죽은 거라면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이라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건….”

노르딕에서 벌어진 일들이 세세하게 적힌 서류를 책상 위에 내팽개친 흑익공이 침음했다.

“이건 개죽음이다. 로열가드의 암묵적인 규칙까지 어겨가며 지지하던 주인에게 죽다니.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냐.”

“그들은….”

“하물며. 미친 왕자가 날뛰는 꼴을 그 많은 시민들이 보았다. 아무리 정보를 통제하려 해도, 머지않아 아르곤의 모든 국민들이 알게 될 거야. 이왕자가 광분하여 로열가드를 죽였다는 소문이.”

신음하는 흑익공을 보며,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흑익공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루시아는 안다. 나라의 왕자라는 작자가 미쳐 날뛰다 종국에는 외부에서 온 야만인에게 꼴사납게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라는 걸.

‘왕실의 법도를 생각하면 그자에게도 죄를 묻는 것이 옳다.’

그자. 북부에선 영웅으로 불리우고, 동부에선 오우거 슬레이어로, 서부에선 왕자 살해자로 알려지기 시작한 야만전사.

그의 손에 왕자가 죽은 순간, 살아남은 로열가드들이 그와 충돌을 빚었다고 한다. 왕실의 피를 외부인이 멋대로 제거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말이야 맞는 말이야…. 말은 그렇지.’

굳이 아르곤만의 얘기가 아니다. 제국의 황실이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고, 그 상대가 누구건 황실의 법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터였다. 대륙의 어느 국가라도 그럴 테지. 하지만 상대가 상대다.

히드라를 가뿐히 농락하고, 미쳐 날뛰는 왕자를 손쉽게 제압한 괴물. 그런 괴물을 어떻게 압송하고, 판결을 받게 한단 말인가. 하물며 히드라를 마저 끝장낸 그자의 일행들도 만만치 않은 강자라고 했다.

‘공주님이 아니셨다면 로열가드의 공백이 더 늘어날 뻔했어…. 멍청한 녀석들.’

왕실의 법도를 세우려는 로열가드와 얌전히 잡혀줄 생각이 없는 야만전사 일행의 대립에서, 델피나는 로열가드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겉으로는 말이다.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가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명확한 바. 공주는 일의 판결을 나중으로 미뤘다.

“이 사안은 너무나 복잡해요. 왕실의 기강을 생각하면 응당 그를 포박하는 것이 옳으나, 누가 뭐라든 그의 공적 또한 우리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노르딕은 물론이고 왕국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을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알란의 손에.”

비록 왕실의 핏줄은 제대로 잇지 못했으나, 예로부터 현명하고 사려 깊기로 유명한 델피나였다.

그녀는 로열가드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왕혈들의 대부인 흑익공의 이름을 빌렸다.

“우선 사태를 수습하는 게 먼저. 당신들 중 하나가 흑익공께 가서 상황을 알리고, 그분의 사람을 모셔오세요. 흑익공께선 왕실의 대부이시자, 왕국의 하나뿐인 공작. 알란 왕자가 없는 지금, 능히 폐하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시니. 그분께 일의 판결을 맡기면 됩니다.”

델피나는 칸과 흑익공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칸 사이에서도 ‘왕실의 보물고를 열어준다.’는 계약이 있었다. 때문에 흑익공에게 신병을 맡긴다면 칸이 응할 것이라 확신했고, 칸은 순순히 델피나 공주의 뜻에 따랐다.

그렇게 현재.

“술이나 좀 더 채우라고 해라. 영 밍밍해서 마신 기분도 안 드는군.”

“하하…. 공께서 대단한 말술이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그러다 흑익공의 술창고가 거덜이 날 겁니다.”

“그러라지. 이만큼 어울려주는데, 그것도 못 해주나?”

칸 일행은 네그라스 성의 지하감옥-. 정확히는 네그라스 가문의 인물들이 가문의 무술을 전수하기 위해 만든 비밀 수련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랜 폐관 수련을 위해 마련된 호화로운 시설을 자유로이 만끽하면서 말이다.

“술 돼지.”

“이 근육을 보고도 돼지란 소리가 나오시오?”

“배 나왔잖아.”

진짜 술배가 뭔지 몰라서 하는 말씀이시군.

하루 종일 술만 마시는 걸 타박하는 아리에스에게 피식 웃어 보인 전직 배불뚝이, 칸이 느물거리는 투로 말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시오. 나처럼 술을 마시고 싶다고. 뭣하면 비법이라도 전수해드릴 수 있는데.”

“맛 없어.”

“아직 어려서 그런 거요. 나도 그쪽 만할 때는 술이 참 썼지. 근데 나이를 먹다 보면 저절로 느낌이 온단 말이오. 아, 술이 참 달다고…….”

“시온 추기경이랑 똑같은 소릴 해. 할아버지 같아.”

“주도를 아는 분이신가 보군. 나중에 소개라도 시켜주시오.”

“싸움 날 텐데.”

“음. 그건 그렇겠군.”

“주군. 여기 마지막입니다.”

하마터면 만신전 교회의 추기경과 불편한 술자리를 가질 뻔한 칸이 마이아가 내미는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노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는데.’

간만에 즐기는 호화로운 휴가도 하루 이틀이지.

집구석에 처박혀서 보내는 휴가란 결국 쉽게 질리는 법이었다. 하물며 여기는 컴퓨터는커녕, 티비도 없는 중세 판타지 세계 아닌가. 맛있는 음식이나 차가운 맥주, 흑익공이 아끼는 술을 축내는 것도 이제는 점점 물렸다.

‘어서 왕실의 보물고를 구경해야…. 레벨도 올리고 그럴 텐데.’

알란 왕자와 히드라를 사냥하면서, 현재 칸의 레벨은 29가 되었다. 거기에 경험치가 좀 남아서 30%가량이 찬 상태. 괜찮은 보스를 두셋 정도 털면 레벨업이 가능한 수치다.

물론 그만한 사냥감을 찾기란 쉽지 않아서, 더욱 몸이 달아올랐다. 무엇보다 ‘미들랜드 퀘스트’의 시스템에서 30레벨은 제법 의미가 깊었다. 정확한 명칭은 존재하지 않으나, 유저들 사이에선 ‘전직 퀘스트’라 불리는 서브 퀘스트가 발생하는 까닭.

캐릭터의 행적에 따라서 전직 퀘스트는 그 내용이 천차만별이었는데, 제국의 검호에게 검을 익혔다면 검호의 면허를 획득하라는 퀘스트가 발생하고, 암살자 계열 스킬을 획득했다면 퀘스트가 지정하는 강적을 암살하라는 계열의 퀘스트가 발생하는 식이었다.

‘내 경우에는…… 야만전사니까 대전사 자리라도 차지해야 하나.’

퀘스트 창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머리를 굴려서 방향성을 유추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DLC로 추가된 새로운 종족의 경우에도 ‘전직 퀘스트’가 발생하는지 모른다는 것. ‘이미 종족 보너스로 꿀을 빨았으니, 전직 퀘스트는 없다!’라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나.

‘그렇게 되면 사고인데….’

전직 퀘스트 보상으로 종결급 아이템을 준다거나 스탯을 추가로 주지는 않지만, 그보다 귀한 A등급 스킬을 공짜로 얻을 수 있기에 어지간해선 퀘스트를 깨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야만전사는 종족 보너스로 획득하는 전투 계열 스킬의 등급이 하나 상승하지 않던가.

그렇게 된다면 무려 S등급 스킬을 30레벨대에 획득하는 것이다.

‘일단은 유물 획득으로 방향성을 잡되. 여차하면 퀘스트에 끼어들어서 보스만 턴다. 30레벨은 무조건 찍어야지.’

그러려면 결국 왕실의 보물고부터 열어야 한다.

이러나저러나 흑익공과 델피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겠지. 미친 야만전사의 깽판을 경험해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

*

*

흑익공과 델피나가 칸을 호출한 건 이튿날의 아침이었다.

“얼굴이 영 퀭하시군. 밥을 좀 시원찮게 드셨소?”

“…누구 덕분에. 대신 밥은 토할 정도로 먹었네. 일을 하려면 배라도 든든해야지.”

“맞는 소리요.”

흑익공의 뼈있는 농담을 모른 척 되받아치며, 자리에 앉은 칸이 흑익공과 나란히 앉은 델피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내 처우에 대한 고민은 다 하셨소? 공주.”

“그러지 않았다면 귀하를 부르지도 않았겠지요. 다소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오늘부터는 그 지하에 갇혀계실 필요가 없다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거 불행 중 다행이로군. 조만간 심심해서 산책이나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거든.”

“다, 다행이네요.”

“그럼 나도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무엇을요…?”

“알란 왕자.”

흠칫.

델피나의 미소에 균열이 갔다. 자신의 손에 죽은 왕자의 이름을 칸이 구태여 다시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서, 대강이라도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시겠지. 알란 왕자 본인도 뭘 알고 있는 말투였으니까. 그렇지 않소?”

“……물론 알고 있어요. 저 또한 왕실의 인원이니까요. 하지만 그걸 귀하에게 답변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예요.”

“왕실의 치부라서?”

“그게 왕실의 치부인지, 영광을 상징하는지, 저도 이제는 잘 모르겠네요…. 다만 아르곤 왕가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라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정확한 내용은 알려줄 수 없다는 간곡한 거절의 표현에, 칸이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뭐, 그렇다면야 굳이 캐묻지는 않겠소. 그럼 다음 얘기로 넘어가서…….”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대, 대부님?!”

당황하는 델피나를 눈빛만으로 제압한 흑익공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강 눈치를 보아하니 알겠어. 자네는 이미 짐작이 가는 바가 있네. 동부에서 로렌의 마녀와 함께 오우거를 사냥한 자네이니, 그녀에게 무언가를 들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어째서 서릿골의 전사인 자네가 관심을 가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얘기를 듣게 되는 순간, 자네도 발을 빼기는 힘들 걸세.

흑익공의 선언은 단순 말로 끝나지 않을 협박이자, 동시에 제안이었다. 왕실의 비밀에 대해 알려줄 테니, 그를 해결하는 일에도 도움을 달라는.

“이 얘기를 받아들이면 왕실의 보물고에서 원하는 물건을 하나 더 가져갈 수 있게 해주지.”

“대, 대부님! 그건 폐하가 아니고선…!”

“걱정 말아라. 원래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기회를 넘겨주는 것뿐이니.”

흑익공에게 보물고 출입 권한이 있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는지, 델피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자네가 가진 붉은 검…. 용을 상대로 특히 위협적인 힘을 품었다고 그러더군. 용살(龍殺)의 무구라, 그런 걸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도 궁금하네만. 여러모로 자네 의외에 더 적합한 인선이 없어.”

“대체 뭘 시키려고 그리 뜸을 들이는 거요.”

“사람을 하나 죽여주게.”

“그거야 내 전문이지.”

흑익공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흔쾌해서 좋군. 그럼 서둘러 움직이지. 일정이 꽤 촉박하거든.”

“죽일 대상이 멀리에 있나 보군.”

“아무래도 그렇지. 멀리 있기도 하고, 까다로운 곳에 있기도 하니까. 그러니 우선은…….”

철컹-.

벽에 걸어둔 장검을 뽑아 칸에게 겨눈 흑익공이 웃으며 말했다.

“얌전히 붙잡혀서, 나와 함께 왕성의 재판장으로 가주시게.”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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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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