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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29화 (129/132)

#129화. 왕도 (1)

아르곤 왕국의 중심이자 심장, 왕도 아르메니아는 커다란 강줄기를 낀 대도시였다.

또한 아르곤 왕국의 식량 생산 절반을 넘게 책임지는 땅인 동시에, 수많은 도시 귀족의 자제들 중 가문을 잇지 못한 이들이 입신양명의 꿈을 품고 상경하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왕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소유한 도시였고, 그만큼 상업도 크게 발달해 재화의 흐름이 가장 활발하여 왕국에서 유일하게 대륙 최대의 은행인 ‘낙원 은행’의 지점이 들어와 경제의 중심지 역할도 수행했다.

그만큼 출입 절차도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확실한 신분의 증명이 없다면 출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기본이고, 귀족이라도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호위 병력을 대동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그와 별개로 무기 소지증을 발급받지 못할 경우, 무기를 모두 반납한 채로 입성해야 한다는 규칙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그 규칙을 지키고 싶지 않던 이들….

예를 들어 적국의 세작이나, 과거 반란을 획책했던 무리들은 성문이 아닌 샛길을 통해 아르메니아에 침입하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우선 강줄기를 배후에 둔 것이 첫 번째. 무장을 한 상태로 거대한 강줄기를 건너 성벽에 닿는 것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초에 시야가 탁 트여 있어서 강을 건너기도 전에 전부 노출되고 마니까.

설령 운 좋게 감시의 눈을 피했고, 강을 전부 건넜다고 하더라도 성벽을 넘는 과정에서 침입자들은 또다시 벽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용린 성벽이라고. 아르메니아의 성벽은 일반적인 성벽이랑 구조 자체가 달라. 맨손으로 타고 넘다가는 손바닥이 엉망진창이 될 거라고? 물론 그냥 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지. 저렇게 높은 성벽을 어떻게 넘어?”

하지만 이 몸은 해냈지.

왜소한 체구에 비해 길쭉한 팔다리를 한 청년이 실실 웃으며 제 무용담을 자랑했다.

“저기 대단하신 기사 나으리도 나처럼 성벽을 넘지는 못할걸? 크흐흐. 아르곤의 대도둑인 이 몸이 아니라면 누가 가능하겠어?”

“그렇다고 말하기엔… 붙잡혔잖나?”

구석에서 흥미진진하게 ‘자칭 대도둑’의 무용담을 경청하던 남자가 던진 의문에 분위기가 싸게 식었다. 화려한 언변에 홀라당 넘어가 듣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러네. 지금 다 붙잡혀서 왕도까지 끌려온 신세잖아?”

“대도둑이면 안 잡히고 도망 다녔어야 하는 거 아닌감.”

“시, 시끄러! 다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거지. 붙잡혀준 거라고!”

대도둑 청년이 원숭이처럼 긴 팔을 허우적대며 필사의 변호를 해봤으나, 장내의 분위기는 이미 식은 지 오래.

그 분위기를 읽은 건지, 대도둑 청년이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이 눈을 감고 있던 덩치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야만인 친구! 그쪽은 내가 호송마차에 실리던 거 봤잖아? 그냥 군말 없이 잡혀 온 거! 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라니까?!”

“…….”

죄수를 왕도까지 호송하는 마차에서 유독 눈에 띄는 남자. 회색의 피부와 살인적인 근육, 전신에 가득한 흉터를 가진 서릿골의 야만인이 슬쩍 눈꺼풀만 들어 대도둑 청년을 흘겼다.

우묵한 눈두덩이에 잠긴 회색의 눈동자에선 아무런 감정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수다스러운 대도둑 청년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을 정도로 냉담한 눈빛.

“뭐, 뭐! 나도 싸움 좀 한다고?!”

쉬식! 식! 자기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내며 주먹질을 하는 청년의 모습은 누가 봐도 겁에 질린 사람의 그것이었다. 자기도 그걸 중간에 느꼈는지, 얼굴을 붉힌 청년이 헛기침과 함께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아니…. 왕국어를 못하면 못한다고 말했어야지. 사람 무안하게.”

“얌전히 잡혀 오긴 하더군. 그냥 쫄아서 그런 건지, 의도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 잘만 말 하시는구만! 봤어, 이 자식들아? 전부 다 생각이 있었다니까!”

“흥. 그래서? 우리의 대도둑께선 무슨 생각으로 붙잡히신 건데?”

“여기부터가 본론이지. 다들 얘기 좀 듣고 나면 군침을 흘릴 거야.”

자칭 대도둑 청년은 순식간에 죄수들의 민심을 잃었지만, 능숙한 화법으로 여전히 이목을 쉽게 사로잡았다. 그가 잠시 귀를 대보라며 손짓하자, 안 그래도 할 게 없어서 심심해하던 죄수들은 금세 청년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잘 들어봐. 우리가 지금 어디서 재판을 받아? 왕성이지? 어지간한 사람은 왕성 흙바닥도 밟아볼 수 없다구. 그런데 우리는 저쪽에서 알아서 들여주잖아?”

“죄수 신분으로 끌려가는 것도 들여준다고 봐야 하남?”

“어쨌건 들어가기만 하면 됐지. 그리고…. 솔직히 다들, 왕국에서 나름 한가락 하는 양반들이잖아? 맞지?”

청년의 말에 죄수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들이 탄 호송마차는, 그 죄질이 극악하여 왕성의 재판장에서 처리해야 하는 중범죄자들을 태운 마차였으니까.

“그쪽 까무잡잡한 형씨. 귀족 부인을 겁간하고 기사까지 죄 살해하고서 도망치다 붙잡힌 양반 맞지?”

“뭐야. 어떻게 알았어?”

“대도둑은 귀도 밝은 법이지. 그리고 그쪽, 얼굴이 흉터로 반쪽 난 형씨는 상단 하나를 통째로 몰살하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죄로 경계마을의 사냥꾼들한테 붙잡혔고.”

“킁. 나까지 알고 있남?”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청년은 차례대로 호송마차에 탄 죄수들의 죄목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내용이 제법 구체적이어서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정말 대도둑이었단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 야만인 형씨는…. 솔직히 잘 모르겠구만. 최근 야만인에 대한 소문이라고 해봐야 동부의 오우거 슬레이어나 북부의 마경 토벌자, 옛날에 노르딕에 나타났다는 골통 분쇄자가 겨우인데…. 전부 왕실의 호송마차에 탈 만한 양반들은 아니라.”

놀랍게도 자칭 대도둑 청년은 칸과 연관된 소문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소문의 주인공들은 모두 공을 세우면 세웠지, 죄수 신분으로 끌려올 짓은 안 했다는 점에서 확신을 못 하고 긴가민가하는 모양새였다.

“뭐…. 야만인들 밤일이 기똥차다는 소문은 유명하잖아? 어디 사는 귀부인이 밤시중으로 들이려 했다가 골로 간 거 아녀?”

“푸흐흐! 그럴 수도 있겠네!”

“됐고. 하려던 얘기나 마저 해봐! 무슨 재밌는 건수가 있나 들어나 보자고!”

보통 야만인이라 하면 다들 조심스럽게 대하기 마련인데, 워낙 밑바닥 인생들이라 두려움을 모르는 모양새였다. 저급한 농담으로 한바탕 웃은 죄수들이, 어서 죄명이 뭔지나 말해보라 재촉했다.

기실 죄수들 사이의 기싸움 비슷한 것이다.

사람이란 특정 인원수가 모이면 어디서든 서열을 나누는 동물이고, 호송마차에 탄 죄수들처럼 제 힘을 드러내길 즐기는 족속들이라면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하니까.

‘뭐, 생긴 건 좀 치게 생겼는데. 실제로는 어떨지 누가 알겠어?’

대부분의 죄수들이 그런 속내를 가지고 목소리를 높였고, 귀찮게 굴지 말라는 태도로 일관하던 야만인이 눈썹을 찡그리며 나지막이 뇌까렸다.

“왕족 살해.”

싸늘한 침묵이 호송마차 안에 내려앉았다.

*

*

*

“와, 왕족 살해라니. 허풍도 심하네!”

“아니, 왕족들은 다 왕성에서 사는 거 아니야? 그런데 무슨 왕족 살해?”

적막을 깬 죄수들의 입에서 부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부분이 추격자들을 피해 몸을 숨기다가 붙잡힌 탓에 근래 벌어진 일들을 소문으로 접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심각한 얼굴로 얼굴을 굳힌 이가 있었다.

‘노르딕에서 왕실의 피가 흘렀다더니. 그게 진짜였다고?!’

그건 바로 대도둑 청년이었다.

그는 곧장 눈치챘다. 저 야만인의 말은 허풍이 아니라는 걸.

‘허풍일 수가 없지.’

호송마차는 흑익공의 도시에서부터 출발해, 중앙 인근의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죄수를 태우고 남부의 왕도로 향했다. 그리고 저 야만인은 첫 번째로 호송마차에 수감된 죄수였다. 청년 본인이 두 번째로 수감된 장본인이어서 알았다.

즉, 흑익공의 도시에서 감금되었다가 중앙으로 호송하게 된 중범죄자라는 얘긴데.

‘왕국의 유일한 공작이 개인적으로 판결이 불가능하다 판단해서 중앙으로 보낸 죄수라? 왕족 살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

청년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전율했다.

왕족 살해라니? 오로지 맨몸으로 왕성에 침입한 자신의 위업조차, 왕족 살해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그렇다. 저 야만인은 왕국에서 제일 끔찍한 범죄자이자 악인인 것이다! 약육강식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간!

‘머, 멋있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왕성에서 귀족 머리라도 하나 따보는 건데. 청년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가, 문득 눈을 빛냈다.

왕족 살해라는 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열가드라는 철벽을 갑옷처럼 두르고 다니는 이를 어찌 죽인단 말인가. 저 야만인은 엄청나게 강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야만인이 자신의 계획에 동참해준다면 그토록 든든할 수가 없겠지.

“크, 크흠. 역시 한가락 하는 양반일 줄 알았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차피 사형장에 목이 잘리게 될 처지에 얌전히 뒈지고 싶은 사람 있나?”

있을 리가.

조용히 고개를 내젓는 죄수들의 면면을 확인한 청년이 만족스레 웃었다.

“그래. 솔직히 우리가 어디 얌전히 뒈져줄 사람들인가? 기왕 죽는 거. 실낱같은 살길에 일확천금의 기회까지 노리면 좋지 않겠어?”

“살 방법이 있다고?”

“아니, 탈옥이야 시도해 볼만은 하지. 근데 일확천금은 또 뭔가?”

“아까 말했잖수? 나, 성벽을 넘은 대도둑이라고. 성벽만 넘었겠어? 당연히 왕성 내부도 적당히 휘젓고 돌아다녔지.”

그 말에 죄수들이 흥미를 보였다. 어지간한 신분으로는 출입조차 불가능한 왕성을 염탐했다고?

“뭐, 뭐가 있든?”

“왕성 내부는 죄다 금칠을 했다던데. 지, 진짜인감?!”

“자자. 다들 진정하고 들어봐. 처음에는 본궁에 들어가려 했는데, 마법 함정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적당히 피해서 들어가다 보니까 웬 인적 드문 장소가 나오지 뭐야? 간간이 순찰 도는 병사나 기사가 있긴 했지. 하지만 내가 누구야. 대도둑 알레한드로 님이시란 말이야. 감시를 피해서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 보니 웬걸…!”

왕실의 보물고를 찾아버린 것 같더라니까! 청년이 귀엣말처럼 속닥거린 말에 죄수들의 눈이 커졌다.

“나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입구 주변이나 안쪽까지 마법진을 쫙 깔아둔 거 보니까 대충 감이 오더라고. 보통 부자들은 자기 금고를 인적이 드물고, 자기만 아는 방법을 써서 감추는 걸 좋아하니까.”

“정말 보물고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거잖아?”

“아니, 확실해.”

청년의 눈은 확신으로 맹렬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처음부터 왕성에 침입해 왕실의 보물고를 털 생각으로 잡혀 오지 않았나. 물론 지하 감옥에서 탈출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으나, 그 방법도 모두 마련해둔 상황이었다.

남은 건, 자신과 함께 움직여줄 머릿수뿐이다.

‘정확히는, 나 대신 붙잡혀줄 멍청이들이 필요한 거지만.’

물론 자기보다 약한 것들이나 괴롭혀대면서 으스대는 가짜들 말고, 몇몇 진짜배기 강자들은 끝까지 데리고 보물을 챙길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저기 구석에 자리를 깔고 앉은 야만인이라던가.

“……내가 순찰 시간이나 좀 구경하다 나갈 생각으로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단 말야. 거기서 내가 엄청난 걸 목격하고 말았지 뭐야. 무려 보물고에서 뭔가를 들고 나오는 늙은이를 봤다구. 근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 늙은이 정체가 무려 폐하의 심복이라는 궁중백이었다니까. 글쎄!”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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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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