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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30화 (130/132)

#130화. 왕도 (2)

죄수들은 자칭 대도둑 알레한드로의 계획에 모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얌전히 사형대까지 붙들려 목이 잘리고 싶은 이가 누가 있다고?

무엇보다 이 시대의 사형은 일종의 오락 문화처럼 향유되었다. 워낙 심심한 동네다 보니, 사람 모가지가 잘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끝장나는 구경거리나 다름없어서. 사형대와 가까운 자리를 파는 사람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자존심도 세고 자기보다 약한 놈들을 깔고 뭉개며 살아온 죄수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채 최후를 맞이하는 상황이 달가울 리가 있을까.

“내려라.”

그렇게 죄수들을 태운 호송마차가 왕도 아르메니아의 심부, 아르메니아 왕성에 들어섰다.

알레한드로는 참으로 오랜만에 쬐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는 대신, 비스듬히 눈을 깔고서 호송마차를 이끈 면면을 살폈다.

“흑익공께서 직접 나서시다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으셨습니다만.”

“나라고 직접 이러고 싶었을까. 내가 나서지 않으면 죄수들의 탈출을 막을 방법이 없어서 이런 것이지.”

“예? 하지만 로열가드의 루시아 부단장께서 직접…….”

“그래도 부족하다는 말일세. 자세한 얘기는 안에서 하지.”

“예옙!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왕국 유일 공작이라는 공사다망한 양반이 귀찮게 직접 나선 이유가 뭔가 했더니. 알레한드로는 ‘왕족 살해’라는 어마무시한 죄를 저지른 야만인을 보고서 납득했다. 로열가드로도 막을 수 없는 괴물이라는 걸 증명한 셈이니.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도 더 올라간 것 아니겠는가.

“너희도 따라와라!”

죄수들은 갑옷을 입은 여기사. 로열가드의 부단장이자, 흑익공의 적녀인 루시아의 뒤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평소 죄수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조금의 반항이라도 나올 법하건만, 이상할 정도로 얌전한 죄수들의 태도에 루시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전부 알레한드로의 계획이었다. 계획의 실행에 앞서 우선적으로 지하 감옥에 수감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이가 딱 한 명.

“어이, 부단장 양반.”

“왜 그러…. 뭐냐?”

“이놈들이랑 같은 방을 써야 하나? 역겨운 냄새가 나서 싫은데.”

루시아를 내려다보는 덩치 큰 야만인의 행태는, 상대의 경계심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기껏 얌전히 인도 당하는 척 경계심을 낮추고 있었건만….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당장 뛰쳐나가 야만인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눈에 띄는 건 최악의 행동이고, 저 무시무시한 야만인에게 찍히는 건 더욱더 싫었다.

‘염병. 조용히 있길래 얌전히 따라주나 싶었더니….’

게다가 대놓고 깔보는 발언까지 내뱉는 마당에, 자존심 강한 죄수들이 얌전히 참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왕성의 한구석이 저열한 욕설로 가득 찼다.

물론 호송 병력들이 나서서 매질을 하는 것으로 죄수들의 난동은 금방 진압이 됐으나, 문제는 야만인 쪽이었다. 최악의 경우 로열가드 부단장이 직접 야만인을 반죽음 상태로 만드는 것도…….

“크흠. 네놈은 그 죄질이 이 중에서도 최악에 가깝다. 당연히 다른 죄수와는 격리된 상태로 관리될 것이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군. 알았다.”

아니, 뭐가 알았다는 거야?! 알레한드로는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봐도 처음부터 그럴 예정은 없었는데, 루시아가 멋대로 야만인의 제안을 수락한 모양새 아닌가. 수군거리는 호송 병력들의 반응만 봐도 그건 확실했다. 그럼 어째서?

‘어째서 로열가드 부단장이 야만인에게 설설 기는 것처럼 구는 거지……?’

단순 착각인가 싶었지만, 알레한드로는 본인의 눈치를 믿었다. 로열가드 부단장은 저 야만인을 어려워하고 있다. 단순히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좀 더 다른 이유로….

흠칫.

루시아의 눈치를 주의 깊게 살피던 알레한드로의 어깨가 들썩였다. 루시아와의 대화를 끝내고 돌아선 야만인과 눈빛을 마주친 까닭.

“어서 움직여! 꾸물거리면 다시 매질을 당할 줄 알아라!”

방금 전 야만인이 자신을 보던 묘한 눈빛의 정체가 뭘까. 그에 대해 고민하기도 전에, 창대를 들이미는 병사들 탓에 알레한드로는 찝찝함을 뒤로 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그 눈빛의 의미를 그 자리에서 눈치챘어야만 했다.

‘내 보물을 노리고 있다, 이 말이지.’

칸의 그 눈빛이, 제 사냥감을 노리는 또 다른 사냥꾼을 경계하는 자의 눈빛이었다는 걸.

*

*

*

“시발, 냄새나네.”

왕성의 지하 감옥에 갇힌 직후,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는 것들과 며칠을 같은 공간에서 지내라니. 하루 두 번의 샤워를 기본으로 하던 현대인에겐 다소 무리한 요구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흑익공의 제안을 거절했을 정도로.

‘뭐, 어쨌거나 감옥까지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가.’

칸이 감옥에 수감된 것은 모두 흑익공의 부탁에 맞춰 움직인 결과였다.

중앙 귀족들의 견제로 쉽사리 왕도에 갈 수 없는 몸이 된 흑익공이었다. 그는 자신이 입성할 구실로, 왕족 살해의 죄를 저지른 칸의 호송을 써먹기로 한 것. 거기에 칸이라는 비대칭전력을 왕성에 아무런 방해 없이 집어넣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사람 하나 죽여달라더니….’

겨우 사람 하나 죽인다기엔 생각보다 일이 거창했다.

그렇다고 마냥 과한 짓거리라 볼 수도 없는 것이, 흑익공의 목표가 왕성에서도 손에 꼽는 거물인 까닭이었다.

국왕과 왕세자가 나란히 국정에서 손을 놓았고, 그나마 있던 알란 왕자까지 뒈져버린 지금. 왕성 내에서 가진 영향력이 첫 손에 꼽힌다는 늙은이가 바로 흑익공의 목표였다.

‘하긴, 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 급발진이긴 했어.’

알란이 공적에 욕심을 낸 것까지는 이해가 가는 행보이나, 히드라의 출현부터 생각보다 이른 알란의 등장 타이밍까지 여러모로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제정신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녀석이 자기 입으로 말했듯, 얌전히 있으면 섭정직이 내정된 상황이라면 말이다.

흑익공은 죽은 알란을 충동질한 장본인이 궁중백이라고 추측했다. 현재 로열가드의 단장인 그의 적장자와 흑익공의 지지세력들을 통해, 궁중백의 움직임에서 수상쩍은 구석을 발견했다는 것이 이유.

‘그리고…. 아르곤 왕국의 왕족들에게 대대로 이어졌다는 혈통의 힘. 그것도 알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다르킨에게서 얻은 용의 비늘조각이 이상반응을 보인 직후 알란의 변이가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그 ‘혈통’이란 게 용과 관련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쩌면…….

‘고대의 주문쟁이들이 연구했다는 그 실험의 일부일지도 모르지.’

깊어지려던 상념이 끊긴 것은, 쇠창살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을 감지한 탓이었다.

“뭐냐.”

“……그, 슬슬 재판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벌써?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아버지…. 흑익공께서도 그리 생각하셨습니다만. 아무래도 저쪽의 상황도 마냥 넉넉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어떻게든 왕도에서 흑익공 각하를 내쫓을 생각인 듯해요.”

루시아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했다. 본래 국왕파의 두 거두로서 힘을 합치는 경우가 많았던 궁중백과 흑익공이었지만, 현재 흑익공을 내쫓는 데 가장 열성적으로 움직이는 장본인이 바로 궁중백이라는 사실을.

“아무래도 궁중백의 변절은 기정사실이라 봐야 할 듯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안다. 약속한 대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내가 손을 쓰지. 그리고.”

칸은 쇠창살의 문을 여는 루시아에게, 알레한드로라는 좀도둑이 떠든 계획들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보물들을 노리는 녀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건 또…. 하아.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은 상황에 귀찮은 놈들이. 그 부분은 잘 알았습니다. 간수장에게 방비를 강화해두라 전해두죠.”

“아, 그러고 보니. 좀도둑 녀석의 말로는 궁중백이라는 늙은이가 보물고에서 뭘 가지고 나왔다던데.”

“예…? 궁중백이 말입니까?”

“그래.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마냥 거짓말 같지도 않았어.”

“정말 그런 거라면…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보물고의 출입 권한은 현재 폐하와 왕세자 전하를 제외하면, 흑익공 각하와 궁중백. 수석 자문관인 로즈웰 부인만이 보유하고 계시니까요.”

“로즈웰 부인?”

루시아는 ‘로즈웰 부인’이라는 여자에 대해 떠드는 것에 꺼림칙함을 느낀 건지, 잠시 머뭇거린 후에야 설명을 시작했다.

“그, 자세한 신분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들이신 자문관이시라는 것 말고는요. 일각에선 폐하께서 외부의 애첩을 들이신 거란 낭설이 있습니다만. 그녀가 여러모로 국정에 도움을 준 부분이 많다는 것엔 이견이 없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법사이기도 하고요.”

“그 로즈웰이라는 여자가 변수가 될 여지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항상 폐하의 곁에만 머무르는 까닭에.”

국왕이랑 같이 자리를 비웠다는 말이로군. 칸은 ‘로즈웰 부인’이란 수상쩍은 주문쟁이 여자에 대한 정보를 대충 머릿속에 밀어두고, 죄질이 극악한 범죄자를 위해 마련된 독방을 벗어났다.

“우선, 판결은 무죄로 나올 겁니다. 그 부분은 이미 얘기가 끝났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테고….”

“궁중백. 그자를 제거할 방법은 따로 구상한 게 있나?”

“재판이 끝나면 보물고를 개방하기 위한 논의가 또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그 사이에 제 오라비…. 단장님께서 궁중백의 외도를 증명하는 데에 필요한 증거들을 각하와 궁내의 인사들이 모여든 자리에서 공개하게 될 겁니다. 그 상황에서 궁중백이 얌전히 물러난다면 가장 좋겠습니다만.”

“궁중백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해서 날 부른 거라 이 말이군.”

“예. 당신의 동료들도 지금쯤이면 왕성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루시아는 그 이후로도 변수가 될 수 있는 요소와 그에 따른 행동 방침을 칸에게 열성적으로 전달했다. 최대한 이쪽의 방식대로 따라달라는 흑익공의 단호한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부턴, 대화가 불가하니 양해를.”

“알아서 해라.”

독방을 벗어나, 함께 호송된 죄수들의 대열에 합류한 칸이 심드렁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을 따라 걸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역할은 만약을 대비한 예비 병력에 불과하지 않은가. 궁중백이라는 늙은이가 얌전히 잡혀줘서 아무런 일도 없이 사태를 마무리하는 쪽이 그로서는 최선의 결과였다. 굳이 일을 만들어서 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배불뚝이 회사원이건, 야만인이건, 자기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 거지.’

그렇게 들어선 재판장은 현대의 법원보단 널찍한 대학교의 강의실을 연상케 하는 구조였다. 조금 다른 특징이 있다면 학생들의 위치를 차지한 게 귀족과 성의 관료들이라는 점일까.

귀족 및 관료들이 앉는 의석들의 앞쪽에는 왕실 기사단의 일원으로 추측되는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죄수들의 난동에 대비해, 의석과 죄수들이 올라간 단상을 분리하는 형태로.

“그럼, 차례대로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재판에 불과했기에, 수석 재판관이라는 꼬장한 노친네가 죄수의 죄목을 읊고 그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전부였다. 기실 중세의 재판이 다 이런 식이었다.

줄줄이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가운데.

칸은 느긋한 태도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고, 마지막에 이르러 그의 차례가 다가오자 잠시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무려 일국의 왕자를 살해한 야만인의 등장이었다. 이미 무죄 판결을 내정한 상태라고는 하나, 소요가 발생하는 건 당연한 바.

“잠시 정숙해주시오.”

수석 재판관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조용하라 이른 후, 칸이 알란을 살해한 대역죄인이란 사실과 함께 북부를 구원한 영웅이자 그 외에도 혁혁한 공으로 왕국을 위해 분골쇄신 노력했단 사실을 늘어놓았다.

“또한, 저 야만인이 알란 왕자를 막지 않았더라면 왕실의 권위를 더욱 실추하게 되는 최악의 결과가 도래했을 것이니. 과보다 공이 더 크다고 판단.”

콜록- 콜록-

힘겹게 긴 설명을 늘어놓은 수석 재판관이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는, 무죄 판결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왕족을 살해하고도 나온 무죄 판결에 놀란 얼굴을 한 자들이 삼분지 일이었고, 나머지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주억일 따름이었다.

‘뭐, 짜고 치는 고스톱이 다 이런 법이지.’

그때 루시아가 직접 다가와 칸의 수갑을 풀어주려 했다. 칸은 얌전히 손을 내밀었고, 루시아가 품에서 꺼낸 열쇠를 수갑에 밀어 넣으려던 그때-.

“동의하기 힘든 얘기군요. 제아무리 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왕실의 핏줄을 멋대로 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풀어주다니요.”

갑자기 날아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루시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야만인에 대한 판결은 무조건 사형. 그 외에는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도르티 수석 재판관.”

“궁중백…!”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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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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