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왕도 (3)
이번 왕도행의 목표인 궁중백의 등장과 난입.
이는 어찌 보면 예상한 일이기도 하고, 반쯤은 예상에서 벗어난 행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흑익공은 물론이고 그녀의 딸인 루시아 둘 다. 궁중백이 칸을 왕도에서 내보내고 싶어 할 거라 추측한 까닭이다.
기실 객관적인 상황만 놓고 봤을 때도, 국왕파가 아닌 개인적인 세력을 늘려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궁중백이었다. 그런 궁중백에게 기존의 국왕파를 양분하듯 영향력을 행사하던 흑익공의 존재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흑익공은 지나친 권력의 집중을 경계하는 중앙 관료들의 견제 때문에, 왕도 입성이 다소 제한적이라고 했지.’
칸이 날뛰었을 때 자신이 아니라면 막을 수 없다는 명분으로 현재 왕도에 입성한 흑익공이다. 이제 막 딴 주머니를 차기 시작한 궁중백에게, 흑익공의 존재는 몹시 거슬릴 수밖에 없고 어서 쫓아내고 싶을 게 분명한 바.
“재밌네.”
수갑을 풀기 위해 내민 손을 도로 회수한 칸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루시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이 흥미롭지 않은가.
하얗게 센 머리와 달리 이상할 정도로 꼿꼿한 자세와 정광 넘치는 눈동자. 그야말로 꼬장꼬장한 늙은이의 정석과도 같은 생김새를 한 궁중백과 함께 의석을 박찬 귀족의 숫자는 장내의 삼분지 일.
‘기존의 중앙 권력은 칠 할의 국왕파와 삼 할의 강성 귀족과 관료들의 세력으로 양분된 상태라 했지.’
물론 세세하게 나누자면 더욱 다양하겠으나, 일단은 그렇다.
그리고 칠 할의 다수파인 국왕파를 또다시 양분하는 두 거물들이 궁중백과 흑익공이었다. 장내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인원이 궁중백과 뜻을 함께하는 건 크게 놀랄 게 없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일어난 면면들이 대부분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전부 관료들인가?”
“……예. 그렇군요. 모두 고위 관료들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어찌?”
왕성의 각종 업무들을 담당하는 고위 관료들의 대부분이, 궁중백과 뜻을 함께하고 있으며 그걸 대놓고 드러낸 부분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필이면 지금? 물밑에서 힘을 길러도 모자랄 판에, 흑익공이 왕성에 찾아온 지금에서야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궁중백. 지금 내 판결에 구태여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가 뭡니까? 새로 만든 세력을 자랑이라도 하려고요?”
비슷한 의문을 품은 건 칸만이 아니었는지, 판결을 내리던 수석 재판관이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날 선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궁중백은 지극히 무덤덤한 투로 칸의 사형을 반복해 주장할 뿐이었다.
“당연한 의견을 내는 것뿐입니다. 공이 아무리 크건, 왕족을 살해한 혐의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그 누구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수석 재판관은 왕실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겝니까?”
“과장이 심하시군요. 궁중백. 알란 왕자께선 왕위에 대한 야욕을 뿌리치지 못하고, 홀로 일을 벌이시다가 폭주하여 아르곤 전역을 큰 위험에 빠뜨릴 뻔했습니다. 이를 바로잡은 공적을 왕족 살해라며 규탄하고, 죄를 묻는 것이야말로 왕실은 물론. 왕국의 격을 떨어뜨리는 무식한 짓거리란 말입니다.”
“궤변이로군요. 왕실은 곧 왕국의 근간이자, 뿌리이며, 모든 중심입니다. 그런 왕실의 핏줄은 어떤 이유에서건 외부의 존재가 해할 수는 없어요. 이러한 사례를 한 번 만든다면? 그 후로는 또 어쩔 겝니까?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또 공으로 과를 덮는다며 살려 보내시렵니까?”
“…이보시오. 궁중백. 말을 교묘히 몰아가는 그대의 재주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거요? 구태여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저의가 대체 뭐요?”
“아까도 말했듯. 당연한 의견을 내는 것뿐입니다. 도르티 수석 재판관.”
정치에는 이골이 난 두 노인의 설전은 몹시 첨예했다. 누군가 끼어들 틈도 없이 의견을 쏟아내는 모습은, 주변의 귀족과 관료들에게 기사들의 전투를 방불케 하는 압박감마저 느끼게 했다.
‘뭐라는 거야.’
물론, 입을 벌리며 하품을 쩍- 내뱉는 야만인에겐 영 뜬구름 잡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혼자 발광을 하다 뒈진 왕자. 그걸 용기 있게 나서서 막은 시민. 그 간단한 상황을 뭐하러 저리 복잡하게 떠들어 댄단 말인가. 그냥 용감한 시민상이나 주고 사진 한 방 찍고 퉁치면 될 일을.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냐.”
“…상황이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궁중백을 비롯한 상당수의 고위 관료들이 반대하고 나서면, 판결을 무작정 밀고 나갈 수가 없어요. 도르티 수석 재판관의 입장에선, 정치적 역풍을 맞게 될 테니까요.”
어쩐지, 자기 일처럼 열심히 떠든다 싶더라니.
칸은 다 죽어가는 노인이 통한의 쉴드를 쳐주던 이유를 알아채곤 웃음을 흘렸다.
“그럼 대충 보류하자고 해라.”
“예? 아닙니다. 차라리 여기서 무죄 판결을 확정 짓는 것이…….”
“아니, 그냥 대충 보류해둬. 감옥 위치는 그대로 혼자 동떨어진 독방으로 주고.”
루시아는 칸이 내뱉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구 틈새로 드러난 눈을 찡그렸지만, 이내 알았다는 듯 도르티 수석 재판관에게 다가가 귀띔을 전했다.
“우선 판결을 보류하고, 추후에 재논의하는 것으로 하지요. 수석 재판관께서도 더 이상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흑익공 각하께서도 이만하면 충분하다 여기실 테니까요.”
“…그럼세.”
체력 스탯이 늘어나면서 묘하게 더 밝아진 귓가로 루시아와 수석 재판관이 나누는 귀엣말이 엿들렸다. 하지만 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쩍- 하품을 했고, 이후 되돌아온 루시아가 보내는 의문의 시선을 모른채 하며 얌전히 감옥으로 되돌아갔다.
우우우웅──.
[이런, 그 불쾌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이제야 꺼내주는구나.]
혼자가 된 직후, 아에카리스의 주머니에 넣어둔 드라우프니르를 꺼내기 무섭게 들은 첫마디에 칸이 피식 웃었다.
“악마라는 좋은 말동무도 있는데, 뭐가 불쾌하단 거냐.”
[네놈이 직접 들어가 보면 안다. 미친 인간아. 그 역겨운 악마의 위장을 무한히 유영하는 기분은 참으로. 불쾌해.]
“아에카리스에 대해서 잘 아나?”
[글쎄. 미친 인간, 너라면 눈치챘겠지만 내 기억은 몹시 난잡하여 나조차 알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혼이 찢어지며 파편처럼 나뉘어진 까닭이지. 어느 순간에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있어. 현재로선 그 악마가 몹시 ‘역겨운 존재’라는 것만 떠오르는구나.]
놈이 역겹게 생기기는 했지.
원념의 말에 속으로 동의한 칸이 화두를 돌렸다.
“너, 저번에 그 얼치기 왕자를 봤을 때. 뭔가 아는 눈치였었지. 뭔가 알고 있나? 아르곤 왕가가 가진 혈통의 힘이라는 것에 대해?”
[흐음.]
원념은 잠시 기억을 되새기듯 침묵했다가, 웃음기 섞인 투로 기억나지 않는다 말했다. 그에 칸이 ‘이 새끼가 장난을 치는 건가?’ 하고 비늘조각을 흔들자, 설명이 부족했다며 말을 덧붙였다.
[그때 떠오른 감상을 그대로 읊었을 뿐. 뭔가 알고서 말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미친 인간아. 차라리 조금 더 단서를 내놓아 보거라. 기억이 떠오를 수 있게 말이다.]
“단서라.”
마침, 떠오르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초월 인자. 그리고 실험체 아르고스.”
무법도시 베이츠에서 발견한 석판에 등장하는, 고대의 마법사들이 벌인 수상쩍은 실험.
칸은 그 초월 인자 실험에 등장하는 아르고스라는 실험체가, 아르곤 왕가의 선조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다.
[초월 인자…. 그리고 아르고스라.]
그럴싸한 게 떠오르진 않는구나. 원념이 나지막한 속삭임에 쓸모없는 놈이라 타박하려던 칸이, 이어지는 사념에 관심을 보였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알겠구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용의 기운이 느껴진다.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만큼 희미하게.]
*
*
*
아르메니아 왕성은 몹시 드넓었고, 그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비처들이 왕성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현재 왕가의 일원들조차 그 전부를 파악하지는 못했고, 오로지 국왕과 왕세자에게만 모든 비처의 위치가 공유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국왕의 심복인 궁중백 또한 남들이 모르는 비처를 알고 있었다.
“궁중백 각하. 아무리 그래도 도르티 수석 재판관과 대립하는 건 조금 서두르지 않았습니까? 그때야 각하께서 나서시니 어쩔 수 없이 나섰습니다마는.”
그런 비처들 중 하나에서 같은 세력의 관료들과 회담을 가지던 중, 왕실의 금전 흐름을 관리하는 재무관이 걱정을 드러냈다.
“흑익공이 왕도에 들어선 지금. 괜한 부담을 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 야만인을 왕성 안에 붙들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그를 확보해 손아귀에 넣어야 하지요.”
“어째서…. 그자에게서 뭔가 발견하신 겁니까?”
“다들 잊으신 겝니까? 알란 왕자의 폭주는 우리가 의도한 바가 맞으나, 그 시기가 예정과 달리 크게 뒤틀렸다는 걸요. 원래 흐름대로 라면, 왕자는 대부분의 병력을 소모한 끝에 자의로 혈통의 힘을 일깨웠어야만 했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정도로요. 하지만 그는 폭주했고, 끔찍한 형상을 한 채 머리가 반쪽이 나 죽었지요.”
“그 부분은 로열가드들에게 들었습니다만. 그것이 그 야만전사와 무슨 상관이…….”
“다들 잊으셨나 본데. 그 야만인이 네카르 산의 흑마법사를 처리한 장본인입니다. 그와 함께한다는 어린 성기사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
“아……!”
그제야 재무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자가 그 흑마법사에게서 ‘그 물건’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정말 그렇다면, 왕자가 폭주한 이유에 대해서도 납득이 갑니다.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자극이 가해졌을 테니.”
“맞아요. 그러니, 우리는 그 야만인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겝니다. 정확히는 그자가 가진 물건을 회수할 필요가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가 있다.
“폭주한 왕자를 단독으로 토벌할 정도라면, 그를 확보할 방법이 마땅치 않을 텐데요.”
“청염 기사단을 움직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청염 기사단 전체를 움직일 게 아니라면, 오히려 섶에 불을 지르는 꼴이 될 겝니다. 게다가 일을 은밀히 처리할 필요가 있어요. 흑익공의 검에 찔리기 싫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으으음…. 그렇다면야, 그 야만인도 끝장이겠군요. 네카르 산의 흑마법사가 너무 일찍 죽어서 미완성에 불과하다지만, 전투력만큼은 로열가드를 상회할 테니.”
“우리는 그저 여기서 걸레짝처럼 망가진 야만인을 기다렸다가, 물건을 회수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마치 벌써 모든 일이 착착 해결된 것처럼 구는 관료들.
그건 궁중백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실의 핏줄을 이용해 만든 그것들은 천하의 흑익공이라도 쉬이 당해낼 수 없는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궁중백과 그와 손잡은 고위 관료들, 심지어 그와 적대하는 흑익공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의 동료들조차 ‘걸어다니는 재앙’이라 평한 칸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쿠구구궁───!!!
아르메니아 왕성이 깊은 어둠에 잠긴 야심한 시각.
모두의 잠을 깨울 기세로 울려 퍼진 거대한 붕괴음과 함께 왕성의 곳곳으로 파발들이 돌아다니며 소식을 전했다.
‘왕성의 지하 감옥이 무언가에 의해 붕괴. 그로 인해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이 모두 풀려났다.’라는 소식을-.
망겜 속 야만전사
지은이 : 보헴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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